제56화
08. 오랑우탄
지화자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신, 뭐야?”
“말했듯, 유은영의 오빠 되는 사람입니다. ‘당신’의 오빠요.”
마지막 말을 강조하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 유승민이 능청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아, 혹시 어떻게 지화자 씨를 알아 보셨나고 물으시는 건가요?”
지화자는 말없이 그를 노려봤다. 유승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 가족한테는 비밀로 하고 있지만, 저 각성자거든요.”
유승민이 유은영과 닮은 얼굴로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지화자 씨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각성자지만, 보유 받은 성언(聖言)이 성언인지라요.”
그러면서 유승민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은영이 몸 안에 들어가 있는 당신을 보게 됐네요?”
능글맞게 말하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국가 넘버, 82.
서울 관악구 관악로 1번지에 게이트 생성 예정입니다.
예상 정보를 전달해드립니다.
Type: 타임 브레이커
Lank: B급
게이트 생성 예정 시간을 아래와 같이 전달해드립니다.
20■■. 11. 31
PM 3: 43―
A-Index로부터 게이트 생성 예정 알람이 떴다.
지화자가 와락 얼굴을 구기는 순간 유승민이 태평하게 말했다.
“현재 2팀은 출장 중이죠? 0팀이 뛰어야겠네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기도 전에 유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화자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은영이한테 몸조심하라고 전해 주세요. 선물도 잘 전해 주시고요. 그리고.”
유승민이 고개를 살짝 숙여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저희 어머니한테 괜찮다는 둥, 그런 메시지만 보내지 말고 전화 좀 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유승민이 ‘유은영’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려준 후 일어났다.
“그럼, 은영아.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파이팅!”
센터를 울릴 듯 유승민의 힘찬 격려에 지화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어쨌거나 그는 그대로 센터를 빠져나갔고.
“뭐야, 저 남자?”
지화자는 얼빠진 얼굴을 보였다.
유은영이 ‘오랑우탄’이라고 저장해놓았더니, 왜 그렇게 저장해둔 건지 알 것 같은 지화자였다.
영장류 중 가장 몸집이 크다는 동물, 유승민은 그 동물을 빼닮은 남자였다.
얼굴과 성격은 제외하고.
어쨌거나 지화자는 유승민에게 받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업무를 보러 갈 시간이었다.
***
벌컥, 지화자가 0팀의 사무실을 열어젖히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은영 씨! 왜 이렇게 늦었어요? 게이트 출연 정보 뜬 건 못 봤어요?”
가하성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지화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봤어요. 오랜만에 오빠랑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누다가 늦었네요.”
“오빠요?”
가하성이 외동 아니었느냐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화자는 그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오빠가 한 명 있거든요. 세계 여행이 취미인 유승민 씨가.”
“유승민?”
가하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이름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던 탓이다.
그가 미간을 한껏 좁히며 ‘유승민’의 이름을 중얼거릴 때,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지화자에게 물었다.
“오빠분은 잘 만나고 왔어요?”
“네, 덕분에요.”
지화자가 싱긋 웃고는 두 손 가득 들고 온 선물을 유은영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요.”
“네? 이걸 저한테 왜…….”
지화자가 유은영의 손에 선물을 꼭 쥐여주며 소곤거렸다.
“네 잘난 오라버니께서 너한테 선물로 주라고 하더라?”
히끅!
유은영이 놀라 딸꾹질했다.
지화자는 놀라 딸꾹질을 시작한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네 잘난 오빠가 각성자인 거 몰랐어?”
“네? 네! 당연히 몰랐죠!”
유은영이 격하게 소리 질렀다.
“저기, 팀장님?”
그때, 하태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게이트 관련해서 브리핑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생성 예정인 게이트는 저희가 맡아야 하니 말입니다.”
“아아, 그렇죠. 잠깐만요.”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고는 지화자에게 말했다.
“나중에 이야기 좀 나눠요, 유은영 씨.”
“기꺼이요.”
지화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유은영은 질린다는 얼굴로 그녀를 한 번 보고는 브리핑 준비에 들어갔다.
“라이 씨, 리아 씨께서는 특히나 잘 들으세요. 아셨죠?”
“네에!”
라이와 리아가 활기차게 답했다.
유은영은 크흠, 헛기침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이번에 관악구에서 열릴 게이트는 B급, 등급이 높은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공략이 어려운 편은 아닐 것 같아 0팀 단독으로 공략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에 가하성이 한 손을 들고서 유은영에게 질문했다.
“게이트에 출현 예정인 몬스터 정보는 확인됐나요?”
“네.”
유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종 계열의 몬스터가 다수 출현할 것 같더군요.”
“충종이라면 군집 단위로 나타날 확률이 높겠네요.”
“그렇죠.”
가하성이 생각만으로도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을 보였다.
“누님, 충종이라면 벌레죠?”
“벌레라면 우리 친구도 만날 수 있어?”
라이의 말을 뒤이어 리아가 물었다. 유은영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잘하면 거미형의 몬스터도 만날 수 있겠죠. 하지만 리아 씨, 그건 친구가 아니에요.”
“그럼?”
“몬스터지. 사람을 해치는.”
그렇게 말한 사람은 지화자였다. 그 말에 리아가 불퉁하게 두 뺨을 부풀렸다.
유은영이 토라진 아이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리아 씨, 친구가 가지고 싶다면 공략 끝나고 같이 곤충숍에 들릴까요?”
“곤충숍?”
“네, 그곳에서 리아 씨의 친구를 사는 거죠!”
“친구는 살 수 없는 거잖아.”
“네? 어, 뭐, 그렇기는 한데.”
유은영이 당황해할 때, 지화자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지 팀장님? 대화가 딴 길로 샌 것 같은데, 게이트 관련해서 브리핑 계속하시죠?”
“네? 아, 넵!”
유은영이 황급히 정신을 챙기고는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유형은 여러분도 확인했다시피 타임 브레이커 유형입니다. 제한 시간은 추정하기로는 3시간.”
“3시간요?”
가하성이 놀라 물었다.
“보통 타임 브레이커 유형은 1시간이 기본인데.”
더욱이 등급이 높아질수록 제한 시간이 촉박한 게 특징이었다.
가하성의 말에 하태균이 말했다.
“하성이의 말이 맞습니다, 팀장님. 그와 관련해서 따로 확인된 정보 없습니까?”
“네? 네, 없어요.”
유은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하성과 하태균이 왜 저렇게 당황해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타임 브레이커의 경우, 등급이 높아질수록 제한 시간이 촉박해진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번에 생성 예정인 게이트는 B급이지 않나?
제한 시간인 3시간인 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유은영이었다.
문제라면 그 이유를 모르는 것.
유은영은 도움을 바라는 시선으로 지화자를 쳐다봤지만.
‘아, 도움은 무슨. 나중에 한 소리 듣지만 않아도 오케이겠네.’
지화자는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어쨌든 게이트 관련해서 브리핑은 여기까지입니다. 가하성 씨? 기술 관리 부서에서 따로 들었던 정보 있으면 공유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하태균 씨는 라이 씨와 리아 씨를 데리고 사전 연습 좀 부탁드리도록 할게요. 아무래도 라이 씨랑 리아 씨는 이번 게이트 공략이 처음이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하태균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며칠 전, 0팀의 팀원들과 다 함께 현충원을 방문한 이후로 부쩍 그녀를 따르게 된 하태균이었다.
“그리고 유은영 씨는…….”
끝을 흐리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잠시 대화 좀 나눠야겠죠? 저희 오빠와 관련해서요.”
유은영이 꿀꺽 침을 삼켰다.
***
센터 내, 지화자의 비밀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지르며 물었다.
“오빠가 각성자라고요? 정말요?”
“그래, 단번에 네가 내 몸속에 있는 걸 알던데?”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지화자가 그만 좀 물으라는 듯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유은영에게 물었다.
“아는 거 없어?”
“없어요!”
유은영이 머리를 부여잡고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할 일 없이 바깥을 돌아다니는 백수 새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국가 기관에 속한 각성자라거나 그런 거 아니겠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쨌든, 나중에 네 오빠 만나면 상황 설명 잘해야 할 거야.”
“무슨 상황이요? 지화자 씨랑 제가 몸이 바뀐 이 상황이요?”
“그래.”
“그걸 제가 어떻게 설명해요!”
애초에 지화자와 왜 이런 식으로 몸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유은영이었다.
지화자는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알아서 잘 설명해. 필요하면 우리가 삼킨 그 ‘불완전환 영혼석(등급 측정 불가)’에 대해서도 말해 보던가.”
아무래도 우리가 몸이 바뀐 건, 그 아이템 때문인 게 분명한 것 같지 않냐면서 지화자는 말했다.
“어찌 됐든 네 오빠잖아?”
“그렇지만 저는 그 백수 새끼랑 안 친한데요?”
“명품이란 명품은 싹 쓸어와서 선물해준 걸 보면 그 백수 새끼는 너를 꽤 아끼는 것 같던데?”
“그래도요.”
유은영이 뚱하게 말했다. 그에 지화자는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아, 나는 모르겠으니까 네가 알아서 설명해. 일단은 며칠 후에 있을 게이트 공략에 집중하고.”
“잠깐만요!”
유은영이 자리를 떠나려는 지화자를 황급히 붙잡았다.
“B급 타임 브레이커 유형의 게이트의 제한 시간이 3시간인 게 흔한 일인가요?”
“아니.”
지화자가 말했다.
“센터에 있으면서 처음 겪는 상황이야.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이것저것 자료를 찾아봐야 할 것 같으니까 나 먼저 들어간다?”
원래 그런 일은 팀장인 ‘지화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유은영은 말했다.
“네… 부탁할게요…….”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조사 좀 해보겠다면서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나섰다가 일을 망치면 어떻게 해.’
그럼 팀원들에게 피해를 입힐 게 분명할 터. 더욱이 ‘지화자’의 명성도 제 실수로 인해 더럽혀질 게 뻔했다.
그런 건 원하지 않는 유은영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지화자’가 처리해야 할 업무 앞에서 이렇게 작아지는 자신을 보니 말이다.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말이지, 나 왜 이렇게 한심한 것 같지?”
“저기, 유은영 씨? 하나도 한심하지 않으니까 기죽어있지 말고 언니도 어서 일하러 가지?”
“꺅!”
유은영이 놀라 갑자기 나타난 지화자에게 물었다.
“드, 들었어요? 업무 보러 간 거 아니었어요?”
“그랬는데 할 말이 있어서 다시 돌아왔지.”
지화자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유은영에게 말했다.
“유은영 씨, 지금까지 나를 대신해서 ‘지화자’를 훌륭하게 연기해왔잖아?”
게이트 공략은 물론, 라이와 리아의 무죄 입증.
그에 더해서 서이안을 구출하고 그에게 빚을 지웠다. 물론, 그 빚은 얼마 전에 청산됐지마는.
어쨌거나.
“언니는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
유은영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다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넵!”
복도를 울리는 그 목소리에 지화자가 픽 웃었다. 유은영은 머쓱하게 웃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할 말이 뭐예요?”
“오랑우탄이 언니한테 준 선물 중에 가지고 싶은 게 있어서. 백 하나 있던데 그거 나 가져도 돼?”
“네? 네, 가지세요.”
마음에 드는 건 얼마든지 가지고 가라면서 유은영은 온화하게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