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오랜 시간 끝에 연극의 대본이 갖춰졌다.
시작일시는 20■■년 11월 24일, 오전 4시 30분.
북구에서 C급 게이트가 열리는 시간과 거의 일치한 때에 연극은 열리게 됐다.
“야, 지화자. 나하진, 그 여자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 햐냐?”
“응.”
유은영이 고민도 않고 답했다.
“하태균 씨에 대한 원망이 무척이나 많은 여자야. 너희가 의뢰를 들어주겠다고 하면 멀리서라도 보려고 할걸?”
“우리가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할까봐?”
‘지화자’와 서이안은 모두 S급 각성자였다.
“그래서 말했잖아.”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우리 쪽에서 움직이는 건 라이와 리아, 그리고 너희 쪽에서는 서도운 씨.”
S급 각성자들은 이번 연극에서 빠져있기로 했다. 정확히는, 먼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타협을 봤다.
연극이 이뤄질 무대, 그곳의 모든 CCTV를 센터 권한으로 통제하에 둔 곳에서 말이다.
유은영의 말에 서이안이 머리를 긁적였다.
“서도운한테 이런 일 시키기 싫은데.”
“왜? 너무나도 아끼는 슈퍼 루키님이셔서?”
유은영의 말에 서이안이 비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슈퍼 루키 시절은 지났지. 당당하게 돌격 1팀의 팀장 자리를 꿰차게 된 녀석인데 걱정할 게 뭐가 있어?”
“그럼, 왜 그러는데?”
“걔, 연기 더럽게 못 하거든.”
“서도운 씨가 연기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지만 알 수 있지.”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곧 유은영은 이어진 서이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식, 저기 있는 네 똘마니와 똑같이 군인 출신이거든. 뭐, 걔는 누구와는 다르게 불명예 전역은 하지 않았지만.”
그 말에 유은영이 비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서이안 길드장님께서 말하신 ‘누구’가 부디 우리 하태균 씨만 아니면 좋겠네.”
살기 어린 목소리였다. 서이안이 움찔거릴 정도로 말이다.
‘팀원 걱정은 하나도 안 하는 것 같더니만.’
서이안이 속으로 혀를 찰 때.
“뭐,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뭐가?”
“서도운 씨나 우리 하태균 씨나 똑같은 것 같거든.”
유은영이 가리킨 곳에서는 라이가 하태균에게 연기 지도를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형님, 따라해 봐요. 당신은 스콜피언의 서이안 씨 아닙니까?”
“다, 당신은 스콜피언의 서이안 씨 아닙니까?!”
전직 군인 아닐까봐, 각이 잡힌 목소리에 서이안이 앓는 목소리를 냈다.
“이 작전,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냐?”
“작전이 아니라 연극.”
유은영이 말했다.
“우리는 나하진 씨만 속이면 돼. 그것을 위한 연극이니까.”
“하여튼 말은 잘해요.”
서이안이 쯧 혀를 찼다.
“그럼, 그때 보자고.”
“그래.”
지화자와 이야기를 끝마친 서이안이 더는 볼 일 없다는 듯 센터를 떠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러는 사이에도 라이는 하태균에게 연기를 가르쳐주는 중이었다.
“으아악!”
“형님, 더 리얼하게요!”
“맞아, 오빠! 좀 더 아픈 티를 내봐!”
리아도 덩달아 오빠를 따라 하태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서툴기 그지없는 모습에 유은영이 벽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괜찮을까?”
“뭐가요?”
“흐아악!”
유은영이 비명을 질렀다.
“지, 아니. 유, 유은영 씨?”
“네, 유은영입니다. 팀장님, 목청 좋네요? 고막 나갈 뻔했어요.”
지하자가 싱긋 웃는 낯으로 비아냥거렸다. 유은영은 꿀꺽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가하성 씨는요?”
“영웅호걸 팀장님들과 다시 합을 맞춰보는 중이에요. 저는 게이트 공략을 어떻게 진행할지 듣기만 하고 왔고요.”
“아아.”
“그래서 뭘 그렇게 구경하고 있었던 건가요? 라이, 리아. 너희 하태균 씨와 뭐하고 있었어?”
“연기요!”
“맞아, 연기 지도 중이었어!”
라이와 리아의 말에 지화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기 지도 중이었다고?”
“응! 태균 오빠가 연극 무대에 잘 설 수 있도록 열심히 연기를 봐주고 있었어!”
지화자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유은영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나 보네요, 지화자 팀장님?”
“네, 그렇게 됐네요.”
유은영이 뚱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멋쩍게 뺨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네?”
“어젯밤, 그런 충고를 해서 미안했다고요.”
지화자가 살짝 입술을 벌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팀장님.”
지화자가 ‘유은영’의 모습으로 친한 척,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는 속삭였다.
“나는 쉽게 사과를 하는 사람이 아니야. 참고로 알아둬, 언니.”
유은영이 불퉁한 얼굴을 보였다. 지화자가 픽 웃었다.
“나는 그런 멍청한 얼굴도 하지 않으니까 알아두고.”
그렇게 말한 지화자가 걸음을 옮겼다.
“하태균 씨, 어디 한번 봐요. 연기 얼마나 잘하는지 구경 좀 해보게요.”
“네?! 아니, 그, 그게 사람이 많으니까 긴장돼서……!”
“잔말 말고 해보세요.”
명령과도 같은 목소리가 왜 저기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지 팀장님을 떠오르게 하는 걸까?!
하태균을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내뱉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드디어 20■■년 11월 23일의 저녁이 되고 말았다.
대충 업무를 정리한 유은영이 가하성과 지화자에게 물었다.
“가하성 씨랑 유은영 씨, 내일 새벽에 3팀과 4팀과 함께 공략 들어가죠?”
“네, 하필이면 새벽이네요.”
가하성의 짜증 섞인 목소리 뒤로 지화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게요. 하필 새벽에 게이트가 열리네요.”
“저는 미리 오전 반차 신청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유은영이 가하성의 말에 싱긋 웃었다. 그 대답에 가하성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요, 평소 같으면 고작 그런 걸로 반차를 내냐면서 있는 대로 꼽을 주셨을 분이 그렇게 말하니 신기해서요.”
쿨럭, 유은영이 헛기침을 터트렸다. 동시에 지화자를 쳐다봤다.
‘지화자 씨, 정말 그러셨어요? 직장인에게 반차가 얼마나 소중한 건데!’
지화자는 유은영이 보내는 시선 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지만.
‘내 알 바 아니었어.’
라고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뭐, 어쨌든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태균 형님, 내일 봐요. 라이랑 리아, 너희도 내일 보자.”
“그래, 하성아. 몸조심 하고.”
“네에.”
가하성이 다칠 일 없다는 듯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잘 가요, 하성이 형님!”
“잘 가, 하성 오빠!”
라이와 리아는 반갑게 웃으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줬다. 가하성이 나가자마자 지화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팀장님께서도 오늘이죠?”
“네, 오늘이에요.”
유은영이 미소를 그렸다. 지화자 역시 그녀와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디 공략 후 좋은 소식 들을 수 있기를 바랄게요.”
“꼭 그러도록 노력해볼게요.”
20■■년 11월 23일.
연극의 무대가 막을 오르기 하루 전날의 저녁.
유은영은 창밖을 쳐다봤다.
‘무대는 모두 준비됐어?’
자신이 그 무대를 지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지화자’의 몸으로 이런저런 일을 해결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람도 참 오래 보고 살 일이라니까?”
멍하니 중얼거린 말에 ‘지화자’보다 나이가 많은 하태균이 쿨럭, 헛기침을 터트렸다.
***
지화자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3팀과 4팀의 전담 어시스트로 내일 새벽, 그들과 함께 C급 게이트를 공략하게 되겠지만.
‘내가 할 일은 별로 없겠지.’
F급에서 E급.
암만 등급이 올랐다고 해도 여전히 폐급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몬스터에도 성언(聖言)이 적용되는 거라면, 이 몸을 더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지난번 S급 시나리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여러 마족들을 상대하지 않았던가?
그걸 생각하면 아쉬운 지화자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가 센터를 빠져나갈 때였다.
“유은영 씨!”
갑작스럽게 불린 이름에 지화자가 걸음을 멈췄다.
“오늘 일찍 퇴근하나 보네?”
3팀의 팀장, 신영웅이 그녀를 불러세웠기 때문이다.
지화자가 구겨지려던 얼굴을 억지로 펴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새벽에 게이트가 열리니까요. 컨디션 좀 회복시켜 나야죠.”
“그래봤자 폐급 힐러잖아.”
능글맞게 웃으며 신영웅이 지화자의 속을 긁었다.
“암만 컨디션을 회복한다고 해도 우리한테 별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물론, 그런다고 성질을 내거나 그럴 지화자가 아니었다.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지화자가 목소리의 끝을 흐리고는 웃는 낯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걸 아시는 분께서 왜 가하성 씨와 함께 저를 지목한 거죠? 저는 게이트 공략에 있어서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말이에요.”
“그야, 유은영 씨께 흥미가 많이 있어서?”
흥미라니.
지화자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신영웅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신호걸이라면 몰라도, 나는 또 이런 흥미를 참지 못하거든.”
“그런가요?”
“응, 간호 관리 부서의 이혜나 누님께서 입 가벼운 거 알지?”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간호 관리 부서에 있을 때, 한 일이라고는 커피 심부름밖에 기억나지 않는 지화자였다.
‘아, 그리고 대머리 부장 새끼 성질도 조금 건드렸었지.’
조금이 아니라 ‘많이’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간에 신영웅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 누님께서 그러더라고.”
“뭐라고요?”
지화자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관심이 없다는 투가 역력한데도 신영웅은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유은영 씨께서 0팀의 전담 어시스트 힐러로 가버리더니 싸가지가 있는 대로 없어졌다고. 고작, 폐급 주제에 말이야.”
그 말에 지화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누가 누구를 욕하든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거다.
애초에 지화자는 저를 향한 많은 손가락질에도 덤덤했으니까.
하지만.
“신영웅 팀장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죠?”
지화자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하게 목소리를 냈다.
“조심하세요, 신영웅 팀장님. 폐급 힐러가 언제 당신의 뒤통수를 노릴지 모르거든요.”
신영웅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지화자는 그대로 싱긋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새벽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몸을 돌려 센터를 떠나가고 말았다.
신영웅은 지화자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아하하!”
때마침 신영웅을 찾아다녔던 그의 쌍둥이 형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영웅아, 미쳤니? 그보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아니, 그게 말이지. 나 사랑에 빠질 것 같아.”
그 말에 신호걸이 질색했다.
“진짜 미쳤나 보구나? 아님, 머리라도 다친 거야? 공략하기 전에 다치면 곤란한데?”
“마음대로 생각해.”
신영웅이 키득거리고는 지화자가 사라진 쪽을 쳐다봤다.
“지화자만큼이나 재미있는 여자라니까?”
신영웅이 웃음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을, 조수현이 보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어쨌거나 째각, 20■■년 11월 24의 새벽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