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라이와 리아.
두 사람은 유은영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사건 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놓칠 수 없었다. 유은영은 황급히 두 사람을 쫓았다.
“어엇? 지화자 씨?!”
경찰이 그녀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유은영의 관심은 온통 라이와 리아에게 쏠려 있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라이와 리아를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라이 씨! 리아 씨!”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에 라이와 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놀란 눈을 보였다.
“누님?”
“지화자다!”
놀라움도 잠시, 라이와 리아가 서로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는 냅다 뛰기 시작했다.
“누님, 우리 안녕하고 인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맞아! 왜 자꾸 따라오는 거야! 끈질긴 여자는 매력 없어!”
“그 전에 이런 건 스토커나 하는 짓이에요!”
“맞아, 스토커! 지화자는 스토커야!”
저 꼬맹이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유은영이 이를 으득 갈고는 건물 외벽을 탔다. 살인 사건의 현장에 모여든 시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유은영은 건물 외벽을 길처럼 이용하며 라이와 리아의 뒤를 쫓았다.
중력을 거스른 움직임.
지화자가 봤다면 잘한다면서 손뼉을 쳐 줬을 몸놀림이었다.
“라이 씨, 리아 씨! 잠깐만 기다려봐요! 기다려 보라고요!”
그런다고 기다려 줄 두 사람이 아니었지마는.
“에잇!”
어쨌거나 유은영은 라이와 리아를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으악!”
“오빠!”
유은영은 라이의 목덜미를 잡아 눌렀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의 위에 올라탔다.
“누님! 이게 무슨 짓이에요?!”
“대화 좀 하고 싶어서요.”
유은영이 싱긋 웃었다.
“제가 주먹 쓰는 일은 영 별로라 그런데, 근처 카페에서 차분하게 이야기 나누지 않을래요?”
유은영이 지화자의 얼굴로 싱긋 웃었다. 라이와 리아에게는 한없이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사납게 얼굴을 찌푸리고는 이를 드러냈다.
“갈 것 같아요?”
“절대로 안 가! 멍청이 지화자, 어서 우리 오빠를 놔 줘!”
리아가 조막만 한 손을 들어 유은영을 때리기 시작했다. 유은영은 아픈 척 울상을 지었다.
꼬르륵―!
누군가의 배꼽시계가 울린 것은 그때였다. 유은영을 열심히 때려 대던 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유은영은 멍하니 두 눈을 끔뻑이다가 리아에게 물었다.
“배고파요?”
“아… 안 고파!”
리아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격한 고갯짓에 유은영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배고픈 것 같은데요?”
“안 고프다니까?!”
버럭 지르는 목소리에 유은영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뭐 드실래요?”
유은영이 지화자의 지갑에 고이 모셔 놓고 있던 블랙 카드를 꺼내 들었다.
주르륵, 라이와 리아의 입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
[지화자 팀장님] : 지화자 씨, 카드 좀 썼어요.
화면에 나타난 메시지에 지화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유은영과 휴대폰을 바꾼 지 오래였다.
괜히 제 휴대폰을 계속 쓰고 있다가 이상한 오해라도 받을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카드는 갑자기 왜 쓴 거지?’
지화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스마트폰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우웅, 다시 한번 더 진동이 울렸다.
[오랑우탄] : 은영아, 나 한 달 뒤에 귀국해. 뭐 가지고 싶은 거 없어? 샤낼이든 루이는똥이든 말만 해. 다 사 가지고 갈게.
나타난 메시지에 지화자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오랑우탄?”
유은영과 휴대폰을 바꾼 상태라고 하나, 연락처를 살펴 본 적이 없는 지화자였다.
지화자는 잠시 오랑우탄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그만뒀다.
‘국제 전화.’
귀국한다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해외에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돈 쓰기 싫었다.
제 돈이 아닌데도 그랬다.
‘나중에 언니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급한 연락도 아닌 것 같고.’
가하성이 지화자를 욕하던 SNS 계정을 해킹하고 돌아온 건 그때였다.
“유은영 씨, 부탁하신 것들 다 처리하고 왔어요.”
“그리고 저도 왔습니다.”
하태균의 방문에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병문안 오신 거라면 오실 필요 없었는데 말이에요.”
대놓고 왜 왔느냐는 불쾌감을 드러낸 목소리였으나 하태균은 사람 좋게 웃었다.
“아하하! 쓰러지셨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회복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제가 멀쩡하다고 했잖아요.”
가하성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지화자의 목소리에 섞여 있던 불쾌감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태균은 말했다.
“그래도 하성아, 우리 팀에 온 지 얼마 안 된 분께서 쓰러지셨다는데 와 봐야지! 그것도 귀한 힐러 분께서 쓰러지셨다는데!”
그 힐러 분께서 하실 줄 아는 거라고는 안마밖에 없는데요.
가하성은 순간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하태균은 사람 좋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들고 있던 묵직한 봉지를 지화자 앞에 내밀었다.
“뭐죠?”
“점심입니다.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속에 편한 걸로 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하태균은 지화자 앞에 죽을 놓았다.
“하성아, 너는 뭐 먹을래?”
“에그 토스트요. 마실 건 초코 우유로 주세요.”
“그래.”
나머지는 모두 하태균의 것이었다. 몸집만큼이나 많이 먹는 그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지화자의 곁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당장에라도 그들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지화자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우적우적, 샌드위치를 씹어 먹으며 하태균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유은영 씨, 팀장님께서는 무슨 일로 외근 중이라고 합니까?”
지화자가 죽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자세한 건 듣지 못해서요. 자세한 건 부장님께 여쭤보는 게 어떨까요?”
“하긴, 부장님과 이야기를 나눈 후 곧바로 외근 가셨으니까요.”
가하성이 에그 토스트를 개미 오줌만큼 베어 먹으며 말했다. 그 말에 하태균이 고민에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팀장님께서도 저희를 좀 의지해 주셨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죽을 퍼먹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지화자는 플라스틱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지화자 팀장님께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데요?”
“네?”
“지화자 팀장님께서 의지해 줬으면 한다면서요?”
지화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는 비딱하게 웃었다.
“하태균 씨가 의지할 대상이어야 의지하지 않겠어요?”
“아…….”
하태균이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한 얼굴을 보였다.
“이봐요, 유은영 씨. 사람 무안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하, 하성아, 나는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그러게 왜 병문안을 오자고 해서.”
가하성이 얼굴을 구겼다.
“저는 먼저 일어납니다.”
그가 먹다 남은 에그 토스트를 그대로 버리고는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유은영 씨는 아직도 컨디션 별로인 것 같은데 그냥 오후 반차 내고 퇴근해 보세요. 팀장님께는 제가 말해 놓을 테니까요.”
가하성은 그 말을 남겨 놓고 홱 의무실을 나가 버렸다. 하태균이 우물쭈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그는 유은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가하성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나가기 전, 하태균은 유은영에게 꾸벅거리고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유은영 씨, 몸조심하시지 말입니다. 건강이 최고이지 않습니까? 하하!”
드르륵, 탁.
닫힌 문과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지화자는 가하성과 하태균이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팀장님께서도 저희를 좀 의지해 주셨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지화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웃기는 소리를 다 하네.”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지화자가 실소를 흘렸다.
각성자가 되기 전에도, 그 후에도 누군가를 의지해 본 적이 없는 지화자였다.
손등 위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은 뺀 지 오래, 지화자가 몸을 일으키고는 휴대폰을 들었다.
***
[유은영 씨] : 지화자 팀장님, 오후 반차 내고 합류하겠습니다.
날아든 문자에 유은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이 라이 씨랑 리아 씨를 찾자는 소리겠지? 어쩌지? 라이 씨랑 리아 씨를 만났다고 연락을 넣어야 하나?’
그보다 오늘 쓰러진 사람이 왜 또 움직이겠다는 거야?
‘그냥 쉬라고 할까?’
유은영이 어떻게 답장을 보내면 좋을까 고민할 때였다.
“지화자야.”
“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우물거리고 있던 리아가 명랑하게 물었다.
“왜 갑자기 우리한테 존댓말을 쓰는 거야?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는데 곧 죽어?”
“헉! 누님 곧 죽어요?”
라이가 피자를 먹다 말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화자는, 아니, 유은영은 격하게 두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 안 죽어요!”
“그럼, 왜 오빠랑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건데?”
“이게 편해서요.”
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제 앞의 여자가 곧 죽을 때인가 보다 싶었다.
‘지화자’가 존댓말을 쓰든 쓰지 않든 별 상관이 없는 라이는 음식을 먹는 데 열중이었다.
“누님, 이거 더 시켜도 돼요?”
“네, 시켜요. 먹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앗싸!”
지화자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라이가 종업원을 불렀다.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던 음식은 모두 깨끗하게 비워지고 있었다.
유은영이 먹성 좋은 두 사람을 보고서 웃었다.
“두 사람, 지금까지 굶었어요?”
장난스럽게 물은 목소리였으나.
“응.”
들려온 대답에 유은영은 놀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굶었다고요?! 왜요? 월급은 어쩌고요!”
“우리 월급 누님께서 관리하고 있잖아요.”
“맞아.”
그랬단 말이야?!
전혀 몰랐던 사실.
유은영이 크흠, 헛기침을 흘리고는 다른 것을 물었다.
“잠은요?”
“잘 자고 있었는데요?”
유은영이 그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공원 화장실에서!”
안심은 금물이었다.
“집은 어쩌고요?!”
“집주인이 나가라고 했어요.”
“맞아! 집주인 못됐어! 마귀 같은 할멈! 이 추운 겨울에 우리를 쫓아내다니!”
리아가 씩씩거렸다. 라이는 그녀에게 제 몫의 음식을 덜어 주며 중얼거렸다.
“집에서 쫓겨난 지 한 달 됐나? 리아, 우리 노숙한 지 얼마나 됐지?”
“두 달!”
유은영이 기가 차다는 듯 입을 뻐금거렸다.
“그럼, 씻는 건……?”
“공원 화장실에서 했죠. 샤워 못한 지는 좀 돼서 몸에서 냄새날 거예요. 양해해 줘요, 누님.”
“양해해 줘!”
라이와 리아가 씨익 웃었다
유은영은 뒤늦게 두 사람한테서 구린내가 풀풀 풍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종업원이 구석 자리를 안내해 주더라.’
그 이전엔 가게에서 아예 쫓아내려고 했었다. 이 몸이 ‘지화자’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쫓겨났으리라.
유은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이와 리아는 새로 나온 음식을 해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아 유은영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저기, 두 사람 나이가 어떻게 돼요?”
유은영이 던진 질문에 리아가 두 눈을 샐쭉하게 떴다.
“뭐야, 지화자. 우리 못 본 지 오래됐다고 그새 까먹은 거야?”
“하하. 제가 요새 정신을 두고 다녀서요.”
그러니까 부탁 좀 하자면서 유은영은 라이와 리아를 보며 헤실거렸다.
“흐음.”
“으음.”
남매가 서로를 쳐다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17살이요.”
“나는 14살!”
열일곱 살? 열네 살?
유은영이 두 눈을 끔뻑였다.
대한민국의 9급 공무원은 18살 이상이면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가 기관 중 한 곳, ‘센터’는 나이 제한에 상관없이 시험만 통과하면 어떤 각성자라도 입사가 가능했다.
그래, 그랬지마는.
“미친 거 아니야?!”
학교에서 교육받고 보호받으며 자라나야 할 아이들을 센터에서 구르게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유은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데없이 소리를 지른 유은영의 모습에 라이와 리아는 당황한 얼굴을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