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빌어먹을 S급 몸뚱이가 중력을 끊임없이 따르고 있다. 유은영은 추락하는 와중에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이시여. 제가 부디 바닥과 하나 되지 않게 저를 지켜 주세요.’
하늘에 닿지 않을 기도였으나, 유은영은 간절히 기도했다.
“마왕……?”
도망쳤던 과라피냐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정확히 마왕 성의 중간 지점, 그곳에 과라피냐가 있었다.
유은영은 마왕을 발견하기 무섭게 몸을 틀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봉을 냅다 던졌다. 반쯤 무너진 기둥에 꽂힌 막대기에 줄이 묶였다.
유은영은 그대로 와이어를 이용해 마왕이 있는 곳으로 높이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곧장 기둥에 꽂혀 있던 막대기를 빼내 과라피냐를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마왕이 저를 향해 날아든 것을 가까스로 피하고는 이를 갈았다.
“쥐새끼 같은 인간 녀석이!”
유은영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보였다.
‘쥐새끼처럼 도망친 인간이 누구인데?’
아 참, 인간 아니지.
유은영이 제 입술을 한 번 찰싹 때리고는 바닥에 가볍게 걸음을 내디뎠다.
지화자가 봤다면 10점 만점에 만점이라며 손뼉을 쳐 주었을 몸놀림이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마왕을 향해 봉의 끝을 치켜들었다. 화르륵, 일어난 불길이 유은영의 주위를 감쌌다.
“우리 이만 끝내면 안 될까요? 저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거든요.”
“어차피 밖에 나가 봤자 짐의 군대가 네 목숨을 죽이려고 할 터! 이곳에서 그 숨이 끊어지는 편이 네게 좋을 것이다.”
제가 원하는 밖은 마왕 성 밖이 아니라 게이트의 바깥인데요.
유은영이 치미는 말을 삼키고는 떨떠름한 얼굴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히익!”
그녀는 눈앞에 쇄도한 날 선 것에 숨을 들이삼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유은영의 목을 베어 내려고 했던 과라피냐가 짧게 혀를 차고는 바쁘게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악, 허억!”
유은영이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며 과라피냐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것이 꼭 저를 놀리는 것 같아 과라피냐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 빌어먹을 인간 녀석이!”
유은영이 과라피냐로부터 멀찍이 물러나서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과라피냐는 이를 악물었다.
“기필코 너를 죽이고 말겠다!!”
파지직―!
허공에서 붉은 전격이 튀기 시작했다. 이내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것들에 유은영은…….
타앗!
힘껏 땅을 박찼다.
***
콰르릉―!
성이 크게 울렸다. 후두둑, 위에서 떨어지는 먼지에 지화자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흐음.”
열심히 싸우고 있나 보네.
지화자는 머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는 걸음을 옮겼다.
책사란 본디 남을 도와 꾀를 내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진다. 하지만 그들 중 몇은 직접 검을 잡고 전장을 휘두르기도 했다.
“죽어라, 인간!”
타앙!
지금의 지화자처럼 말이다. 그녀의 경우에는 검이 아닌, 총을 들고 있었지마는.
“저기에서 소리가 들렸어!”
“인간! 인간이다!!”
“죽여라!”
“남김없이 먹어 치우자!!”
시끄럽네.
지화자가 무심한 얼굴로 방아쇠를 당겼다.
정확히, 다섯 발.
날아간 총탄이 지화자를 향해 달려들던 미물들의 머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지화자는 맥없이 고꾸라진 것들 사이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여기에 뭐가 있는 걸까?”
지하에 내려올 때 마족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지화자였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여럿의 마족이 모습을 보였다.
‘도대체 뭐가 있기에.’
별 볼 일 없는 것들이 지키고 있는 걸까? 지화자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머리 위로 지는 그림자에 지화자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황급히 총을 들었으나 이미 늦어 버렸다.
기척도 없이 다가온 마족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마족은 지화자를 베어 내지 못했다.
“쿨럭……!”
오히려 베어진 건 마족이었다.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 길게 그어진 자상에 마족이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허공에 튄 검붉은 피에 지화자가 미간을 좁혔다. 곧, 그녀는 뺨에 튄 것을 닦아 내고는 마족을 처치한 방문객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서이안 씨?”
“안녕이고 자시고 지화자는 어쩌고 너 혼자 있는 거야?”
“지화자 씨는…….”
쿠구궁!
성이 다시 한번 더 크게 울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먼지에 지화자가 머리를 털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위에 계세요.”
지금쯤 마왕과 신이 나게 전투를 벌이고 있을 거라면서 지화자가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마침 잘 왔어요. 이곳에 마왕 성을 떠받치고 있는 뭔가가 있는 모양인데…….”
“야.”
서이안이 지화자의 말을 매섭게 끊고는 물었다.
“너, 지화자랑 무슨 사이야?”
독사와도 같은 서이안의 두 눈이 탐색하듯 번쩍였다. 지화자는 말없이 그 시선을 마주 보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단순한 팀메이트죠. 지화자 씨는 저희 팀의 팀장이시고, 저는 그분의 동료인.”
“0팀에 배정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그새 소속감이 생겼나 봐?”
서이안이 비딱하게 웃음을 지었다. 지화자 역시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서이안을 쳐다봤다.
하지만 서이안의 입가에 걸려 있던 조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큼, 지화자에게 다가온 서이안이 고개 숙여 그녀에게 물었다.
“너, 누구야?”
서이안의 자안이 번뜩였다.
***
빌어먹을 지화자 씨!
카앙! 캉! 들이닥치는 공격을 몇 번이고 막아낸 유은영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과라피냐한테서 멀찍이 물러난 후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미 없는 공방이 지속될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
‘마왕은 끊임없이 몸을 재생할 수 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의문이 하나 생겼다.
‘왜 도망쳤던 거지?’
바퀴벌레와도 같은 재생력으로 자신과 승부를 봐도 됐을 텐데 말이다.
유은영이 마왕을 살펴보는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전과도 같이 성스럽게 생긴 장소, 마치 보물이라도 있을 것만 같은…….
‘있네, 보물.’
과라피냐의 발아래, 붉게 그려진 표식이 보였다.
“있잖아요, 마왕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가르쳐 줄 것 같으냐?”
“글쎄요, 답해 주고 말고는 자유예요.”
어찌 됐든 물어보겠다는 거였다.
“위에서 싸울 때는 재생을 끝마치자마자 도망쳤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도망치지 않네요?”
유은영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이곳에 지켜야 할 거라도 있나 봐요?”
과라피냐는 말없이 유은영을 응시했다. 그의 붉은 눈이 번쩍이는 순간.
“크윽……!”
유은영이 한달음에 과라피냐의 앞으로 들이닥쳐 쥐고 있던 것을 휘둘렀다.
화르륵, 일어난 불꽃이 과라피냐를 삼키기 시작했다. 거센 불길에 과라피냐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그 몸이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까지도 걸음을 물리지 않았다.
“인간! 네 녀석만큼은 기필코 죽이고 말겠다!!”
유은영을 향해 손을 치켜들었을 뿐이었다.
코앞으로 들이닥치는 날카로운 손톱에 순간 유은영의 머릿속에 목소리 하나가 떠올랐다.
“언니야말로 S급 몸뚱이 가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싸우고 오도록 해.”
그건, 분명 다치지 말라는 소리였을 거다. 유은영이 마왕을 향해 휘두른 것을 고쳐 잡고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것을 막아냈다.
끼기긱―!
불쾌한 소음과 함께 유은영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이거. 제 몸이 아니라서요.”
“뭐랏……?”
“그래서 쉽게 다쳐 줄 수 없어요. 죄송하지만 말이에요.”
유은영은 그대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화르륵, 과라피냐의 몸을 삼키고 있던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과라피냐가 괴로움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듣기 괴로운 소리였다. 유은영은 한껏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마왕님께서 지키려고 했던 건 아래에 있는 이거겠죠?”
부웅, 휘둘러진 것이 마왕의 목을 쳐냄과 동시에 바닥에 박혔다.
쿠궁!
바닥이 움푹 패이며 동시에 표식 위로 금이 갔다. 표식 위로 발하고 있던 붉은 빛이 수그러들었다.
“된 건가?”
유은영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크흑, 흐, 흐하하하!”
몸에서 떨어진 머리가 유은영을 향해 조소를 터트렸다.
“멍청한 인간 녀석! 그것 하나 파괴한다고 짐이 죽을 것 같으냐! 짐은……!”
죽지 않는다. 지하에 그려져 있는 표식 또한 파괴된다면 몰라도.
물론, 과라피냐는 유은영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몸이 한시라도 빨리 재생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게, 무슨……!”
과라피냐의 몸은 재생되지 않았다. 오히려 검게 타 버리며 재가 되기 시작했다.
과라피냐의 붉은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유은영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대 때려도 시원찮을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유은영 씨, 여기 있었네?”
“지화자 씨!”
지화자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등장했다. 유은영이 놀라 빼액 소리 질렀다.
“지화자 씨! 그게 무슨 꼴이에요?!”
“언니야말로 그게 무슨 꼴이야?”
지화자가 유은영에게 다가와서는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내가 분명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싸우라고 했을 텐데?”
“그랬어요! 마왕님이 저 꼴이 된 걸 보면 몰라요?!”
“응, 모르겠어.”
지화자가 태연하게 대꾸하고는 유은영을 지나쳤다.
“이거, 지하에도 그려져 있던데.”
지화자는 바닥에 그려진 표식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붉은 표식은 유은영에 의해 산산이 파괴되어 있었다.
지화자가 타들어 가고 있는 과라피냐를 향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파괴하기를 잘한 것 같네.”
“빌어먹을 인간 녀석이……!”
마왕이 목소리를 내뱉기 무섭게 타들어 가고 있던 그의 몸이 움직였다.
타앗! 지화자의 목을 향한 날 선 것이 유은영에 의해 가로막혔다.
“지화자 씨, 그 몸이 F급 몸뚱이란 것 좀 잊지 말아 주실래요?”
그러니까 괜한 도발 좀 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지화자가 태연하게 말했다.
“언니가 어련히 알아서 나를 지켜 주겠거니 해서 말이야.”
유은영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화자는 웃을 뿐이었다.
‘역시, 유은영은…….’
재능이 있었다. 힐러가 아닌, 싸움. 원초적인 전투의 본능에.
‘도대체 왜 힐(Heal)을 특성으로 받은 거람?’
그것도 F급, 실전에 쓸 만한 구석은 없는 능력치로 말이다.
“지화자 씨, 사람을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세요?”
“내가 뭐 어떤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고 그래?”
“전 여친에 집착하는 전 남친의 음흉하고 질척이는… 아야!”
지화자가 제 몸을 차지하고 있는 유은영의 머리통에 딱밤을 날렸다. 따악, 경쾌하게 울린 소리에 유은영이 울상을 지었다.
“유은영 씨, 헛소리 그만하고 나가자.”
“계단은 저쪽인데요?”
유은영이 그렇게 말하기 무섭게 성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르릉―!
계단이 있던 곳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유은영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런 그녀를 지화자가 툭 건드렸다.
“정신 차려, 언니. 이대로 있다가는 무너지는 성에 그대로 깔리고 말걸?”
마왕님처럼.
덧붙인 목소리에 유은영은 그제야 과라피냐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유은영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지화자 씨, 정말 싫어요!”
그러고는 지화자를 안아 들고서 창문을 깨뜨렸다.
후웅, 날아드는 바람을 가르며 유은영은 그대로 뛰어내렸다.
지화자가 그 목에 팔을 걸치고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가슴 두근거리는 공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