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옥좌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곧, 붉은 입술 사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여라.”
남자의 옆에 도열해 있던 다수의 마족들이 유은영과 지화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은영이 쥐고 있던 봉을 크게 휘둘렀다.
캉, 카앙―!
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죽어라느니, 몰아붙이라느니 고성이 곳곳에서 오갔다.
유은영이 봉을 휘둘러 저를 향해 달려들던 마족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동시에 제 뒤를 노리는 마족의 명치 부근을 발로 차버렸다.
본능과도 같은 움직임.
유은영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밀려드는 공격을 맞받아치며 소리 질렀다.
“지화자 씨!”
“나는 걱정하지 마, 언니.”
탕, 타앙―!
경쾌하게 울리는 총성과 함께 여러 마족들의 몸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곧, 쓰러진 자들의 뒤로 또 다른 마족들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지화자가 짧
게 혀를 찼다. 유은영은 골치 아프다는 얼굴을 보이며 지화자와 등을 맞대었다.
뒤로 닿는 온기에 지화자가 놀란 눈을 보였다가 이내 키득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이야.”
“뭐가요?”
“누구랑 이렇게 등을 맞대고 싸우는 거.”
지화자가 즐겁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유은영은 와락 얼굴을 구기고는 소리 질렀다.
“지화자 씨는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요?!”
“하지만 정말 오랜만인걸?”
지화자가 웃는 낯으로 말하고는 탄창을 갈았다.
“있잖아, 유은영 씨. 싸움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게 뭔지 알아?”
“살아남는 것?”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타앙!
지화자가 유은영을 노리려는 마족을 그대로 쏴 버렸다. 귀 바로 옆에서 울린 총성에 유은영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지화자의 움직임은 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왜였지?’
의문도 잠시, 유은영이 제 귀에 들려오는 지화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상대의 목을 먼저 베는 거야.”
유은영은 단번에 지화자가 원하는 바를 알아들었다.
옥좌에 앉아 있는 저 마족을 죽이라는 거겠지.
유은영이 이제는 제 분신이나 다름없는 봉을 쥐고서 말했다.
“뒤를 부탁할게요.”
“폐급 힐러한테 너무 많은 걸 부탁하는 거 아니야, 언니?”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S급의 랭킹 1위이신 지화자 씨잖아요.”
능청스럽기 그지없는 말.
지화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탄창을 갈았다. 철컥, 그녀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울리는 소리와 함께 유은영이 바닥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옥좌에 앉아 있던 마족, 마왕 ‘과라피냐’의 앞에 도착한 유은영은 그대로 쥐고 있던 것을 휘둘렀다.
과라피냐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까가각―!
과라피냐의 날카로운 손톱이 유은영이 휘두른 봉을 막아냈다.
‘손톱이 뭐가 저렇게 단단하대?’
의미 없는 힘겨루기는 금물.
유은영이 빠르게 제 무기를 거두고는 과라피냐한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타악,
구둣발이 바닥에 닿기 무섭게 과라피냐의 날 선 손톱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흐악……!”
유은영이 뒤로 한껏 허리를 접으며 가까스로 과라피냐의 공격을 피해 냈다.
과라피냐가 미간을 살포시 좁히고는 손가락을 한 번 맞부딪쳤다.
파지직―!
허공에서 튄 붉은 전격이 유은영을 노렸다. 유은영이 바쁘게 다리를 움직이며 저를 노리는 것들을 피해 냈다.
쾅, 콰광! 콰과광!!
대리석 바닥에 움푹 구멍이 패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유은영의 몸뚱이는 확인할 수 없었다.
“으악! 오, 와악!”
유은영은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마왕의 공격을 모두 피해 내는 중이었다.
과라피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 빌어먹을 인간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자, 장난이라니요? 저는 지금 목숨 걸고 당신을 상대하고 있는 중인데요?!”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질렀다. 그 와중에도 전격은 계속해서 내리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피하고만 있으면 안 된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든 생각이었다.
유은영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다리를 더욱 바쁘게 움직였다.
콰광!
크게 내리친 전격에 주변에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곧, 바람이 이는가 싶더니 유은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이를 아드득 갈고는 쥐고 있던 것을 과라피냐를 향해 휘둘렀다.
화르륵, 이는 불길이 과라피냐를 향했다.
그가 제 목으로 향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
일어난 불길이 순식간에 과라피냐의 몸을 집어삼켰다.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서 과라피냐가 괴성을 내지르며 괴로워했다.
유은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에게서 물러났다.
“해, 해치웠나?”
유은영은 몰랐다.
자신이 내뱉은 말은 죽어 가는 적을 단숨에 살아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임을.
어쨌든 유은영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꺼져 가는 불과 함께 쓰러졌던 과라피냐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건 그때였다.
쐐액―!
유은영이 제 옆을 지나간 인영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처를 회복한 과라피냐는 긴장을 놓고 있던 유은영을 노리지 않았다. 그가 노린 건.
“지화자 씨!”
저를 상대하고 있던 여자보다 몇 배는 약해 보이는 여자였다.
F급의 몸뚱이로 밀려드는 마족을 상대하느라 지친 기색이 완연했던 지화자는 힘없이 과라피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다행인 점은 마왕 아래로 도열해 있던 마족들 대부분은 이미 죽은 지 오래라는 것.
그러나 불행인 점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왕에게 붙잡혔다는 것.
과라피냐가 지화자의 목 아래에 손톱을 세우며 경고했다.
“인간, 무기를 내려놓고 목숨을 내놓도록 해라.”
보통은 투항하라고 하지 않나?
유은영이 울지 못해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들었다.
“저기요, 우리 일단 대화로……!”
날카로운 손톱의 끝이 지화자의 목에 길게 상처를 만들어 냈다.
제 몸에 상처가 새겨지는 것을 본 유은영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으아악! 알았어요! 무기 내려놓을게요! 하지만 목숨은 내줄 수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 잘도 말한다 싶었다. 어쨌거나 유은영은 울상을 지으며 몸을 숙였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보고 말았다. 지화자가 저를 향해 싱긋 웃는 것을.
‘지화자 씨……?’
유은영의 두 눈이 살짝 떨렸다. 그때였다.
“야.”
지화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나 죽어.”
지화자가 마왕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기다란 손톱이 여린 목에 상처를 만들어 냈으나 지화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인간이!”
가까스로 총탄을 피해 낸 마왕이 지화자를 죽이려고 들었으나.
까가각!
유은영이 마왕의 공격을 막아내는 게 한 발 먼저였다. 마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화자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언니, 눈 감아.”
지화자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천장 높이 던졌다. 위로 올라가던 것이 번쩍! 강한 빛을 내었다.
“크아아악!”
과라피냐가 두 눈을 붙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마이 아이즈!!”
유은영 역시 마찬가지. 지화자가 그 모습을 보고서 소리 질렀다.
“이, 멍청아! 눈 감으라니까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유은영은 억울했다.
지화자의 말에 따라 눈을 감아 버리면 마왕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그랬던 것뿐이다.
“섬광탄 던질 줄 알았으면 눈 감았죠!”
유은영이 충혈된 눈으로 외쳤다.
어쨌든 마왕을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유은영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마왕이 그 기척을 느끼고 몸을 틀었다.
후웅!
허공을 베어 낸 것이 다시 한번 더 마왕을 노렸다. 마왕은 두 눈을 감은 채 저를 향한 공격을 모두 피해 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타앙―!
짧게 울린 총성과 함께 마왕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여자인가?!’
저를 상대하던 여자보다 몇 배나 약해 보이던 인간.
그녀가 주제도 모르게 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 건가 싶었다. 하지만 방아쇠를 당긴 건 그녀가 아니었다.
섬광탕으로 인해 멀어졌던 시야가 돌아왔다.
“인간……!”
과라피냐가 이를 으득 갈았다.
유은영이 권총을 쥐고 있었다. 총구를 과라피냐를 향한 채로.
과라피냐가 쿨럭, 피를 토해 내고는 그대로 쓰러졌다.
“나이스, 언니.”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화자가 짝짝, 손뼉을 쳤다. 유은영은 크게 숨을 토해 냈다.
자신도 모르게 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그게 이 싸움의 정답일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거였다.
“쓰, 쓰러뜨린 거예요?”
“아니.”
조금 전에도 쓰러뜨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쓰러졌던 마왕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무슨 좀비도 아니고!’
유은영이 질색하며 봉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되살아난 마왕은 유은영을 향해 달려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화자를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두 여자를 응시하다가 구멍 뚫린 바닥으로 냅다 몸을 던졌다.
“엇?!”
유은영이 놀라 그 뒤를 쫓았다. 뻥 뚫린 구멍은 끝도 없이 아래로 향해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휑한 것에 유은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지화자가 말했다.
“쫓아가.”
“네?!”
“쫓아가라고.”
유은영이 진심이냐는 듯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화자는 씨익 웃을 뿐이었다.
“언니, 어땠어?”
주어가 분명치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유은영은 지화자가 무슨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한 듯 대답했다.
“쉬웠어요.”
그 대답에 지화자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쉬웠지? 부활한 몸이라고 해도 똑같을 거야. 그러니까 언니.”
지화자가 유은영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말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죽이도록 해.”
“…지화자 씨는 뭐 하고요?”
“따로 알아볼 게 있어.”
“그 몸으로요?”
지화자는 상처투성이였다. 마왕에 의해 입은 상처뿐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상처가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지화자가 목에 맺힌 핏물을 닦아 내고는 말했다.
“내 몸 하나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
그건 당장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마족의 사체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모두 졸개나 다름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
“마왕 못지않은 마족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어쩌기는?”
지화자가 철컥, 탄창을 갈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싸워야지.”
그러고는 웃는 낯으로 유은영에게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언니야말로 S급 몸뚱이 가졌다고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싸우고 오도록 해.”
그 말을 끝으로 지화자는 유은영을 가볍게 밀었다.
“……?”
뻥 뚫려 있는 구멍으로 말이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멍하니 두 눈을 끔벅이는 것도 잠시.
“흐아아악!”
지화자, 저 미친 사람!! 왜 자꾸 자신의 몸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건데!
“지화자 씨! 야!!”
유은영이 빼액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지화자는 태연하게 웃었다.
“유은영 씨, 파이팅!”
라는 말을 지껄이면서 말이다. 유은영으로서는 환장할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