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파직, 검붉은 스파크가 연우진의 몸에서 거칠게 튀어 올랐다. 무리한 능력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이었다.
당연했다. 지금 이 공간을 장악한 쪽은 던전의 주인인 저쪽이었고, 그는 침입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간 자체도 불안정했다.
엄밀히 따지면 헤르만이란 나라의 세계로 이어지는 이 게이트는 어중간하게 닫혔다가 다시 열린 불완전한 게이트였다.
그렇기에 시공간이 불안정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던전의 주인도 아닌 그가 멋대로 힘을 방출했다간 공간 자체가 산산조각 날 것이 분명했다.
전기톱으로 단단한 나무를 자르기는 쉬워도 무른 과일을 자르기는 어려운 법이다. 전기톱의 강한 회전력에 의해 원래의 형태를 남기지도 못한 채 파괴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공간을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힘을 최대한으로 압축시키고, 조정해야만 했다.
마치 혈관 속 혈액이 기름처럼 끓어오르기라도 하는 듯 열통이 일었다. 차라리 몸을 잘게 쪼개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한 통증 앞에서 연우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고통을 참는 건 익숙했다. 김유정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지겹도록 함께했던 것이었으니까.
‘……왜 누나가 여기에?’
연우진은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일그러진 그의 두 눈이 살의로 선뜩했다.
그런 연우진을 본 도이현은 김유정을 제 뒤로 숨겼다. 마치 그에게서 그녀를 보호하는 듯한 태도였다.
연우진은 상황을 살폈다. 감히 제 가이드에게 다가간 이를 뭉개 버리고 싶어 손가락이 움찔거렸지만,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제 가이드가 있는 이상 그는 무턱대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고, 당장 도이현이 김유정을 죽이지 않으리란 것은 오는 길에 아멜리아에게서 들었기에 그는 살의를 억눌렀다.
콰득.
연우진은 제게 접근하는 마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강한 압력에 의해 마물의 몸이 크게 부풀었다 터졌다. 수많은 마물들이 침입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붉은 피가 눈앞에서 튀었다. 난잡한 풍경 속, 아멜리아는 그런 연우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이드를 향해 저런 눈빛을 하는 연우진이 생소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그 순간, 마물 중 하나가 아멜리아를 향해 접근했다. 동시에 강한 바람이 일었다.
“윽, 괜찮으세요?”
마물의 다리를 자른 서일후가 아멜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물에게 당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도 서일후는 아멜리아를 우선시했다. 그녀를 자신이 지켜야 할 약자라고 인지한 듯했다.
아멜리아는 그런 서일후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드레스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무수한 마물들이 생성되고, 날뛰고. 에스퍼로 추정되는 존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미궁처럼 나뉘었던 공간이 합쳐지며 던전이 재조립되었다.
풍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좌는 처참하게 부서지고 사방에서 피가 튀고 비명이 울려 댔다.
인간임을 잊은 마물들은 누군가를 죽이고자 끊임없이 불완전한 몸을 움직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몸은 점점 마물로서 완전해져 갔다.
혼란 속, 아멜리아의 시선이 김유정과 그리고 그 앞에 선 도이현을 향했다. 그를 보자 느껴지는 것은 안타까움과 슬픔이었다.
‘어째서…….’
아멜리아는 캠벨 백작가의 사생아로서 태어났다.
다정한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일찍이 죽음을 맞이했고, 아멜리아는 사생아로서 캠벨 백작가에 들어가게 되었다. 캠벨 백작은 아멜리아를 필요 없는 것으로서 취급했다.
아멜리아는 그 저택에서 인간의 악을 보았고, 그리고 그 이상의 선을 만났다.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이에서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고 몰래 챙겨 주고자 하는 다정함 또한 존재했다.
아멜리아는 누군가에게 있어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다면 누구도 그녀를 혼자 두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멜리아의 인생에 전환점이 생긴 것은 그녀가 능력을 개화하고 난 뒤였다.
타인의 생명력을 빼앗거나 줄 수 있는 힘.
처음에는 막연히 기뻤다. 어쩌면 제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게 무색하게도 능력을 개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멜리아는 얼굴도 모르는 황태자와 약혼하게 되었다.
필요하기에 쓰임을 다하긴 했으나, 결국 그건 아멜리아가 원했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치 필요 없는 물건을 치우듯 버려진 기분이었기에.
약혼을 앞두고 아멜리아는 도피하듯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할 검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검은 숲은 마물들이 나왔던 터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에 당도한 그녀는 처음 듣는 이명과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김유정’이라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유정이 된 뒤로, 처음으로 자신을 필요로 해 주는 가족들이 생겼다.
아멜리아가 그토록 바라던 필요성. 아니, 애정이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이상한 기억들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차해연’이라는 이 세계 사람에 관한 기억이었다.
그녀에게는 제겐 없던 남동생과 그 무엇보다 그녀를 필요로 하던 사람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7년이란 긴 시간이 지나고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뒤.
아멜리아는 저와 약혼할 사이였던 레이몬드 마빌 헤르만을 만나고 나서야 그가 차해연의 연인, 도이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제게 아무 상관없는 다른 세계 사람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차해연의 삶이 마음에 들었고, 그녀는 낯선 세계에서 제가 가진 유일한 기억을 좇아 행동했다.
차해연은 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은 수국.
수국이란 이름의 꽃을 보는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지만, 아멜리아 또한 머지않아 그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
차해연이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면 저 또한 언젠간 그러한 애정을 타인에게서 받을 수 있으리라. 무의식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이후 이 기억에 관한 것을 키센이라는 김유정의 전 동료에게 말했을 때, 차기 대마법사였던 그는 7년 전 세계의 시공간에 이상이 생기며 그 과정에서 죽은 이의 기억이 흘러들어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죽은 이의 미련이 강할 때 드물게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사례를 고서에서 본 적이 있다며.
쾅!
갑작스러운 굉음에 아멜리아는 상념을 끊고 번뜩 고개를 들었다.
미완성이었던 상급 마물들이 합쳐지며, 최상급 마물로 변모했다. 거대해진 기괴한 덩어리에 각성자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쳤다.
“도망쳐!!”
그 순간, 갈라진 공간 한편에서 붉은 용오름처럼 거대한 불길이 뿜어져 나와 마물을 덮쳤다.
“X발, 이건 또 뭔데!”
막 중앙에 도착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소리쳤다.
그와 같은 통로에서 빠져나온 회색 머리의 여자가 한껏 얼굴을 구기며 들고 있던 담뱃대를 툭 쳤다. 비구름이 모여들듯 보라색 연기가 구멍에서 쏟아져 나와 마물을 덮쳤다.
그러나 거대해진 마물은 불길에도 독에도 녹지 않았다.
쾅. 거대한 발이 그들이 딛고 있는 바닥을 뚫어 버릴 듯 내리쳤다.
그에 말려든 사람들이 보였다. 아멜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안 돼…….”
아멜리아가 가진 능력의 기반은 생명력이다. 그녀는 생명력을 빼앗아 간직하고 그걸 나눠 줄 수 있었다. 따로 간직한 게 없다면 자신의 생명력을 소진하게 되는 힘.
김유정은 제 몸으로 그 힘을 능숙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그럴 수 없었다. 타인을 해치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이 죽는 것도 무서웠다.
차해연이라는 존재를 다시 만들어 내고자 김유정을 찾아 저와 합치기 위한 도이현은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다.
다른 이들이 죽는 동안 아멜리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며 무력하게 바라만 보았다.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나라를 병들게 하고, 끝내 황성을 던전으로 만든 극악무도한 행동을.
‘제발, 누군가가 구해 줘.’
예전에 캠벨 백작가에서 누군가가 저를 괴롭힐 때면 혼자 옷장 안에 숨어 이렇게 빌곤 했다. 아멜리아는 고통스럽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멜리아!”
소음 속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혼란을 헤치고 이곳까지 달려온 김유정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중앙을 살피자 도이현은 연우진과 싸우고 있었다.
김유정이 다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도이현은 우리만큼은 죽이지 않아. 마물들이 우리만 공격하지 않고 있잖아. 그가 이곳에 있는 한 우리는 마물들에게 공격받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아멜리아는 멍하니 김유정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구원을 바라고 있는 동안, 김유정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뇨, 저는, 못 해요.”
아멜리아는 김유정을 잘 모르면서 동시에 잘 알고 있었다. 차해연의 기억을 좇았다면, 김유정의 흔적은 가능한 한 피하고자 애썼다.
김유정으로 사는 동안은 행복했다. 원했던 가족이 있었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온전한 제 삶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멜리아는 일부러 김유정의 친한 친구였던 오민아와 멀어졌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김유정의 흔적을 없애면 나아질까. 그렇다면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비겁하게도.
아멜리아의 대답에 김유정은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김유정이 자신을 비겁하다고 질책할까 두려웠다.
“그럼 내가 할게.”
그러나 김유정에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다른 말이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들어 김유정을 마주했다.
“너는 일단 안전한 곳에 있어. 그리고 만약 힘을 쓸 수 있다면 부상자를 치료해 줬으면 해. 뭐가 되었든 도이현에게만큼은 잡히지 마.”
먹먹한 소음 속, 김유정이 저를 똑바로 응시했다. 다채롭지 않은 검은색 눈동자는 모든 색을 삼킬 듯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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