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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110화 (110/119)

110화

가지고 있던 가이딩제는 이미 최대 섭취량을 넘긴 지 오래였다.

권시현 또한 스파크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욕설을 지껄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던전에 들어온 뒤로 권시현과 서윤호는 많은 수의 마물들을 상대했다.

더구나 방출보다는 변환에 가까운 권시현의 능력과 달리 서윤호는 두말할 것도 없는 방출형 능력으로, 능력 소모가 큰 만큼 가이딩 소모 역시 빨랐다.

“지금 폭주하면 넌 나한테 합법적으로 뒤짐.”

권시현은 낮게 읊조렸다.

이 상황에서 폭주한 상급 에스퍼를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다. 만약에 폭주 진행이 빠르다면 답은 처리밖에 없었다.

서윤호가 잠시 능력을 멈추자, 그 틈을 타 마물 하나가 그를 향해 커다란 입을 벌렸다.

권시현의 고개가 그쪽을 향해 돌아갔고, 담뱃대에서 나온 연기가 허공에서 분산한 그 순간, 굵은 가시 줄기가 마물의 입 안을 뚫고 지나갔다.

콰득.

줄기 끝에 선 것은 검은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서윤호 씨. 이런 상황에서 왜 공격을 멈춰요? 혹시 자살 희망자예요?”

그 말에 서윤호는 표정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고, 그에 반해 여자아이, 조예나는 통쾌하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조예나의 옆에는 유순한 인상의 남자와 그보다 연령대가 높아 보이는 회색 머리의 남자가 서 있었다.

권시현이 당황한 낯으로 조예나를 가리켰다.

“예나? 잠깐, 예나가 왜 여기-.”

“죄송합니다, 길마님. 추가 지원자로서 레드 게이트에 입장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조예나는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제가 한 행동이 길드 내 명령 불복종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시현은 레드 게이트에 자신도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던 조예나를 떠올리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일단 이건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말끝을 흐린 권시현의 시선이 조예나의 옆을 향했다.

유순한 인상의 남자는 차진서 가이드였다. 기어코 저 가이드를 찾아 레드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는 건가.

“그래서 저 남자는 누구임?”

문제는 차진서 가이드 옆의 남자는 누구냐는 거다.

하나로 내려 묶은 회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눈매.

남자는 보석이 달린 눈에 띄게 화려한 로브를 두르고 있었는데 권시현의 기억상 원정대 중 저런 외양을 한 사람은 없었다.

“딱 봐도 댁이 아는 놈 아니야?”

서윤호가 미간을 좁힌 채 남자와 권시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둘 다 똑같은 회색 머리에 거추장스럽게 무기에 보석을 박은 것까지 하는 행동이 똑같지 않냐 뭐 그런 뜻이었다.

권시현은 그런 서윤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나한테 감사해라. 이 게이트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내 친히 너 새끼의 뇌에 보석을 박아 줌.”

뇌에 보석이라도 박히면 조금쯤은 쓸모 있게 되겠지.

권시현이 본 서윤호는 높은 공격 능력에 전투 센스 또한 훌륭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인내심도 없고, 뇌는 장식품인 것 같고, 건방지기까지 하다.

연우진과 사이가 나쁘다더니 연우진 쪽이 머리 쓰는 게 훨씬 뛰어나다는 것만 빼면 짜증 나는 게 둘 다 아주 똑같다.

‘……특이한 옷의 시체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권시현의 눈이 가볍게 남자를 훑었다. 남자의 손에는 큰 보석이 박힌 긴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조예나가 두둔하듯 남자를 소개했다.

“길마님, 이 사람의 이름은 키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저희도 도와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운 에스퍼의 능력 같은 결계도 쳐 줬어요. 일단 발견한 부상자들은 던전 보스가 있는 쪽으로 가면 갈수록 마물 수가 늘기에 뒤쪽 결계 안에 두고 왔거든요.”

“그래서 어디 소속?”

“마탑 소속 마법사인데.”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탑이라는 길드는 처음 들어 보는데. 더구나 마법사라니? 권시현은 제가 기억하지 못한 원정대 혹은 조예나처럼 추가 지원자라는 가정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조예나가 눈을 빛내며 답했다.

“무엇보다도 유정 언니의 전 동료라고 했어요!”

“……김유정 가이드가 무슨 보증 수표임?”

권시현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조예나는 영리한 편이었으나 제가 받아들인 사람에 한해서 지나치리만큼 낙관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 순간, 키센이란 이름의 남자가 권시현의 뒤쪽을 주시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곧 종막에 다다를 것 같군. 힘을 중앙에 집결시키고 있어.”

권시현은 문득 주변이 고요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화하는 동안 연기를 주변에 쳐 놓긴 했지만,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화 내내 마물들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권시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복도는 그들이 처리한 마물들의 사체들을 제하면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손목을 살짝 틀어 담뱃대를 고쳐 쥐며 입을 열었다.

“그래, 자칭 마법사.”

담뱃대의 끝부분이 키센의 턱 바로 아래에 겨누어졌다.

“이곳의 뭘 알고 있는지, 당장 말해.”

* * *

뺨에 닿은 손끝이 차갑다. 푸른 눈동자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지만, 그 애정의 대상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직시했다.

헤르만 제국에 있는 동안 레이몬드는 내게 친절했다. 유달리 내게 관대했고 다정하게 굴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레이몬드가 나를 사랑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황태자 레이몬드 마빌 헤르만의 화려한 여성 편력도 있었지만, 묘하게 그의 시선이 나를 빗겨 있었기 때문이다.

옛 연인을 내게서 비쳐 보는 건가. 그도 아니면 단순한 여흥인가. 그 정도로 생각하며 나 또한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애초에 로판 세계인 줄 알았다가 서바이벌 물로 바뀐 마당에 거기까지 신경 쓸 기력도 없었고.

“……안 본 사이 옛 동료의 이름도 잊었나 보지? 그 이름이 아닐 텐데.”

버석한 입술을 움직여 목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서늘하고 무거웠다.

단순히 분위기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실제로 호흡하는 게 조금 전보다 힘들어졌으니까.

레이몬드, 도이현이 푸른 눈을 곱게 휘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차해연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는 예상외로 태연했다.

“뭐라고 불러 주길 바라는데? 아멜?”

설탕으로 녹여낸 것처럼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낯익은 이름을 입에 담았다.

도가빈을 만난 뒤라 그런지, 아니면 흉내 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라 그런지. 그에게서 도가빈이 비쳐 보였다.

“나는 김유정이야. 아멜리아 캠벨도, 차해연도 아닌.”

“괜찮아, 기억은 차차 되찾을 수 있을 거야.”

“뭐?”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영혼이 쪼개질 수도 있지. 괜찮아. 기억은 다른 쪽이 갖고 있으니까.”

그의 두 손이 내 뺨을 단단히 감쌌다. 마치 입을 맞추듯 시선이 가까워졌다.

뺨에 맞닿은 차가운 손바닥에서 이질적이고 기분 나쁜 감각이 느껴졌다.

몸 안의 무언가가 강제로 끄집어내지는 느낌, 역가이딩이었다.

나는 곧바로 손을 올려 내 뺨을 감싼 그의 두 손 중 하나를 붙잡았다. 잡은 손에 힘을 주던 나는 머지않아 이상함을 눈치챘다.

다칠 것을 감수하더라도 뿌리치듯 그의 손길에서 빠져나오자, 그는 생각보다 쉽게 놓아주었다. 그 이상 세게 잡으면 내 머리가 뽑힐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자신의 한쪽 손을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기분 좋은 가이딩이네. 해연아.”

“……파장이 비슷하다고 착각한 거야? 그런데 이거 어쩌지. 그냥 비슷할 뿐이야. 나는 차해연 가이드와 다른 사람이니까.”

“해연아, 이해해. 그날의 충격으로 인해 네가 잠깐 잊어버린 것뿐이야. 그때 레드 게이트를 무리하게 열며 네 영혼이 분산된 거야. 내 눈엔 보여.”

“나는 차해연이 죽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어.”

“그날 시공간 능력으로 인해 다른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어. 다른 세계의 시간 흐름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그는 마치 내가 기억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 나간 이야기였다.

내가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성자의 존재가 당연시되어 온 다른 세계였다.

세계가 바뀌게 된 것이 이쪽 세계의 레드 게이트 때 일어난 거대한 시공간의 힘으로 인한 여파라면 모를까, 단순히 파장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내가 차해연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다.

주춤. 나는 그에게서 뒷걸음질 치고는 그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도이현은 처음부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제 생각이 옳다고 맹신하는 이의 눈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차해연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겠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거 미친 새끼네.”

흰 물감에 검은색을 떨어뜨리듯. 알현실 공간이 점점 넓어지며 마물 또한 늘어났다.

바닥과 벽, 마치 그림에서 뽑아내듯 기어 나온 이형의 존재들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마물들이 공격하는 대상은 내가 아닌 이해수와 도가빈이었다.

마물들의 기괴한 비명이 판치는 가운데, 마치 무대의 주역처럼 우리가 있는 공간만이 깨끗했다.

도이현은 에스퍼. 나는 그와 접촉해 저번처럼 가이딩 흡수를 하려고 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마치 시체의 팔을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소름 끼치는 이질감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나는 힐끗 눈을 굴려 도이현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두 팔 중 한쪽은 무엇인지 모를 검은 얼룩이 목까지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붙잡은 팔이 바로 그쪽이었다. 얼룩은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였다.

‘마물화라고 했지.’

황성의 인간들은 마물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던전의 보스는 바로 저 도이현이었다. 마물들이 판치는 던전의 보스가 과연 멀쩡한 인간일까?

‘그럴 리가.’

이미 저 검게 변한 부분은 조금 전에 보았던 다른 마물들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로 바뀌고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게 나았다.

내가 그를 죽이기 위해서는 그가 완전히 마물이 되기 전에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는 부분을 잡아야만 했다.

“해연아. 그때처럼 모두가 우릴 위협하고 있어.”

도이현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괜찮아.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 낼게. 내가 다 죽일게.”

공간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마치 합쳐지듯 수많은 풍경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윽고 성의 형태를 한 건축물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다른 공간에 있던 인간들이 떨어지고, 알현실에 있던 마물에게 잡아먹히고-.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나의 가이드.”

끔찍한 풍경이 연이어 눈앞에 펼쳐졌다. 누구 것인지 모를 다수의 비명이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동시에 떠오른 것은 오래전 헤르만 제국에 있을 때의 전쟁이었다.

나는 무심결에 귓가를 틀어막을 뻔한 손을 붙잡았다. 새삼 이런 상황에 두려워질 이유는 없는데도 손이 잘게 떨려 왔다.

그 순간, 알현실에 있던 문 중 가장 큰 문이 있던 공간이 찢어지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연우진이었다.

“미쳤어, 형? 누가 형의 가이드야.”

사나움이 고인 금안이 유려하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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