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93화
* * *
“저, 저기요! 거기, 사람 맞죠?!”
한참 홍차를 마시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인 것 같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 희게 질린 얼굴을 했던 남자는 내 얼굴을 확인한 뒤에서야 안도한 듯 손을 흔들었다. 내 쪽으로 다가오려는 듯 발걸음을 이쪽으로 향하는 이에 나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잠깐만! 더는 이쪽으로 다가오지 마세요. 거기서 말해요.”
나는 시선을 내려 돗자리를 살펴보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상해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연우진은 돗자리에 뭔가를 깔아 놓았다고 했다.
다른 마물의 습격에 대처하기 위해 안전상 해 놓았다고 가정하면 지뢰나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럼 인간은 괜찮나? 하긴 내가 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위험한 건 안 깔아 놓지 않았을까……?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상대방은 내 말을 다르게 이해한 것 같았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갑자기 게이트에 오시게 되어서 두려우셨을 텐데 제가 배려가 없었네요!”
쭈뼛거리던 몸을 바로 하고 남자가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리고는 내 쪽으로 성큼 발을 뻗으며 소리쳤다.
“겁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힐끗 돗자리와 내 티타임 세트를 쳐다보았다. 겁…… 먹은 것처럼 보이나?
남자가 찡긋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제가 이래 봬도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현역이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일단 D등급 공격 계열 현역이었거든요.”
“아.”
“큼큼, 자랑은 아니지만 메시아 길드 마스터인 연우진과도 서로 형 동생 하며 알고 지내는 사이기도 하고요. 인적이 드문 이런 구역에 오신 걸 보면 같은 동네에 사시는 것 같은데 이웃은 도와야죠.”
“아…….”
난데없이 등장한 낯익은 이름에 나는 작게 탄성을 흘리며 바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저쯤이려나. 그런 내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남자가 당당하게 걸음 했다.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돗자리 근처까지 다가온 이에 당황한 순간, 돌연 남자가 뭐에 떠밀린 사람처럼 모래사장에 얼굴을 처박았다.
금방 일어날 줄 알았건만 그는 바르작거릴 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얼굴을 처박은 남자의 목에 핏대가 돋아나 있었다.
일으켜 줘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바다 쪽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렸다.
쏴아.
바닷물이 끌어 올려졌다. 아니, 자세히 보니 바닷물이 아니었다.
깊은 바닷속처럼 짙푸른 비늘을 가진 심해어, 정확히 말하자면 심해어처럼 생긴 마물이었다.
마치 처형대에 오르는 것처럼 공중으로 끌어 올려진 마물은 쩌적 내벽에 금이 가는 듯한 묵직한 소리를 내며 이윽고 터져 나갔다.
쿵.
잘게 으깨진 잔해물들이 바다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다 연우진을 발견했다.
그는 높은 허공에 발을 딛고 선 채로 무표정한 얼굴로 아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나!”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연우진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었다. 그는 곧장 하늘에서 내려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가이딩이 부족한 것 같다고 하며 슬쩍 나를 쳐다보는 그에 나는 일단 주변부터 살폈다.
혹시 저게 던전 보스인가? 그렇다기엔 게이트 입구로 추측할 수 있는 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비전조 게이트는 보통 상징물 파괴가 조건이 아니었나요?”
던전 보스가 존재하는 게이트는 레드 게이트가 아닌 이상 굳이 닫히지 않기 때문에 원래 들어왔던 입구로 나가기만 하면 굳이 보스를 죽이지 않아도 빠져나갈 수 있다.
물론 그 이후에 열린 게이트로 마물이 따라 나오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어찌 되었든 목숨이 살아 붙어 있기만 하다면 기어서 나오든 도망칠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비전조 게이트는 보통 입구가 없고 상징물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나가기 힘들다.
클리어 하면 빠져나갈 시간이 대략 10분 정도 주어지는 던전 보스와는 달리 상징물 파괴와 동시에 게이트가 닫히기 때문에 따로 여유 시간이 없기도 했고.
“아- 상징물 맞아요. 이거, 저 마물 뱃속에 들어 있었거든요.”
연우진이 둥근 구슬 같은 것을 내밀었다.
언뜻 보면 진주 같기도 한 구슬은 하얗게 빛을 내고 있었는데 저것을 부수면 나갈 수 있다는 묘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까 알 것 같긴 한데…… 대체 저 사람은 어떻게 알고 바다로 들어간 거지?
하도 익숙해서 감 같은 게 생긴 건가. 어쨌든 저것을 부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 가이딩 하게 손 주세요.”
소모도 크지 않은 것 같고 간단하게 하고 나가면 되겠다 싶어 손을 내밀자, 연우진이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지금 손에 상징물이 있어서요.”
“…….”
“아, 다른 손에는 보석 들어 있어요. 물속에서 발견한 건데 누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구슬을 쥔 손을 좀처럼 펴지 않는 그에 나는 결국 손 대신 몸을 택했다.
말없이 발꿈치를 들어 껴안자 놀란 듯 그가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안아 달라고 그런 게 아닌가?’
돌처럼 굳었던 것도 잠시, 그가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숙였다.
커다란 덩치를 어떻게든 내 품에 넣고자 몸을 구기는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뻔뻔한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내가 진짜 좋아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우진 씨…….”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나는 끌어안은 연우진의 등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지금 당장 그 발 치워요…….”
“읍-! 우읍!”
연우진은 내 앞으로 착지했다.
그 말인즉슨 내 앞에서 무언가에 당해 모래사장에 얼굴을 처박은 남자의 위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
연우진이 슬그머니 남자의 머리를 짓누르던 발을 치웠다.
* * *
결과적으로 우리 셋은 게이트에서 빠져나왔다.
멀쩡한 나와 연우진과 달리 남자의 얼굴은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뒤통수에 선명하게 난 신발 자국을 보며 저걸 말해 주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때였다.
한동안 넋을 잃고 멍하니 걷기만 하던 남자가 정신을 차린 듯 버럭 화를 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누나, 능력으로 이동할까요? 위치 알려 주시면 조정해 볼게요.”
“지금 사람 말 무시해요?!”
“아뇨, 그건 좀…… 그건 머리가 너무 아파서.”
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면 목적지까지 그렇게 멀지 않으니 그냥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연우진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머리가 아프다는 내 말에 설핏 미간을 좁힌 연우진이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왁왁 잘만 소리 지르던 남자는 연우진이 제 쪽을 바라보자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뭐야. 뭐, 뭡니까! 뭐요!”
충분히 긴장할 만했다. 그보다 연우진 쪽이 훨씬 크기도 했고, 조금 전 심해어가 터지는 광경은 목격하지 못했더라도 그 잔해물들은 보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연우진의 시선은 남자가 아닌 남자의 뒤쪽, 그러니까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차된 승용차를 향해 있었다.
길을 가던 중 게이트에 휘말려 버린 탓에 그대로 게이트 안에 두고 온 우리의 차와 달리 남자의 차는 멀쩡했다.
아무래도 잠깐 정차해 둔 채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운 나쁘게 비전조 게이트의 범위에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하긴 여긴 차도 사람도 잘 안 다니니까.’
조금쯤은 세워 놓아도 아무런 문제 없었겠지. 그런데 그건 다시 말하면 차를 정차해 두지 않고 진작 이곳을 떠났다면 비전조 게이트에 말려들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만큼 재수가 없는 듯한 사람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을 무렵, 연우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낡긴 했는데 일단 저거라도…….”
“죄송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차에 태워 주실 수 있으신가요? 좀 전에 같은 동네라고 하셨으니 저희와 목적지가 비슷한 것 같아서요! 태워 주신 사례는 할게요.”
이대로 가다간 차 주인 없이 차를 타고 갈지도 모른다.
급하게 옷을 잡아당기자 연우진은 왜 부르냐는 듯 눈을 두어 번 끔뻑이더니 곧 내가 잡아당기는 방향을 따라 뒷걸음질 쳤다.
내게 바짝 붙은 그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리쉬었다.
“사례는 됐어요. 일단 그…… 도움을 받은 것은 맞으니까.”
남자가 멋쩍은 얼굴로 목 뒤를 매만지더니 이윽고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연우진이 한 말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저 혼자였다면 어쩌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고…… 큼, 뭐, 좀 실력이 되는 에스퍼인가 보죠? 아, 혹시 여성분도 에스퍼?”
“아, 아뇨. 저는 아니에요. 그보다 이 사람 모르세요?”
“네?”
“아니, 연우진이랑 형 동생 하는 사이라고-.”
분명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연우진이 누군가에게 친근하게 구는 상상은 좀처럼 되지 않지만, 도이현에게는 형이라고 불렀다고 들었으니까 다른 예도 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힐끗. 눈만 굴려 연우진을 쳐다보자 그는 이미 무슨 상황인지 파악한 듯 살짝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아, 아니구나.
나는 또한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와 달리 남자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네, 네. 뭐 그렇죠! 우진이가 저한테 형님 형님 하며 잘 따르거든요. 물론 그쪽 말고도 헤베나 이온 길드와도 친분이 좀 있고요.”
남자가 은근슬쩍 연우진 쪽을 쳐다보았다. 어째 견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을 담아 연우진의 팔을 꽉 붙잡았다.
“뭐, 그쪽도 에스퍼라면 알겠지만, 우리 우진이가 워낙 유명하잖아요?”
“아…….”
“큼, 메시아 쪽에서 워낙 신상 보호가 철저하다 보니 우진이 얼굴을 보기 힘들겠지만, 제가 연락하면 보실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하…….”
그 우리 우진이가 당신을 해치기 전에 그만둬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제대로 된 대답 대신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연우진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