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88화
“능력을 사용하는 에스퍼가 가이딩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이딩제를 쓰고 있다면요.”
그야 그렇겠지. 연우진만 해도 매칭률 맞는 가이드가 없어 지금껏 거의 가이딩제에 의존해 왔다고 들었으니까.
나는 다시금 물었다.
“가이딩제와 완전히 같진 않더라도 대체재를 만들 수는 있겠죠?”
“그게 무슨…….”
연우진이 말끝을 흐린 채 나를 응시했다.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와, 생각도 안 해 봤는데 헤르만 제국 마법사들이 유능한가?”
문득 떠오른 것은 동료였던 마법사 키센이었다. 내가 막 백작가에서 뛰쳐나왔을 무렵, 내가 골머리를 앓고 있던 마법에 도움을 줬다고 기꺼이 제집을 내어 준 나의 친구.
당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키센이 황족과 관련된 중요한 마법이었다며 내게 감사를 전했다는 것은 또렷이 기억난다.
어쩐지 몸이 안 좋을 때마다 내가 아니라 키센을 찾아가더라니. 애초에 정말 단순한 병이었다면 웬만한 불치병도 치료하는 힐러를 찾는 게 당연하지 않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한 번은 레이몬드와 함께 어린 시절 소꿉동무였다던 고위 귀족을 만났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귀족은 레이몬드를 보자마자 삿대질하며 누구냐고 소리쳤다. 마치 괴한을 만난 사람처럼 경악한 얼굴로.
아무리 로판이라지만 황족한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 눈치를 본 것도 잠시, 몇 초 뒤 고위 귀족은 농담이었다며 레이몬드에게 사과했고, 자연스레 상황은 풀렸다.
그런데 만약 그게 정말로 황태자를 사칭하는 낯선 이에 대한 반응이었다면…….
‘……진짜 도이현 씨 맞는 것 같은데?’
불현듯 꿈속, 혼란스러워 보였던 헤르만 제국의 상태와 함께 검은 숲에서 혼자 서 있던 아멜리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도이현 씨가 우진 씨 능력도 복사했다면서요? 도가빈 씨는 그것 때문에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거면, 우진 씨는 괜찮아요?”
연우진의 능력이라면 중력장인가? 자연히 시선이 처참한 상태의 바닥을 향했다.
내가 있어서 자제한 게 저거면 능력 좀 약해졌다고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은데.
오히려 약해진 능력이 저 정도면 그 전은 어땠는지 두려울 정도였다.
“저는 문제 없었어요. 그리고 저도 쓰기 꺼리는 능력이라, 복사한 능력을 상대 쪽에서 사용할 수 있을지도 상상이 안 가서.”
“저는 일단 레이몬드- 그러니까, 도이현 씨가 연우진 씨의 능력을 쓰는 건 보지 못한 것 같아요. 중력장이면 분명 눈에 띌 텐데 레이몬드는 한 번도 그런 힘을 쓴 적이 없거든요. 황태자가 대놓고 그런 능력을 썼다면 마법사로 오해받았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헤르만 제국의 황태자가 마법사라는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살짝 당황한 듯한 연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연우진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누나, 제가 다중 능력자인 거 알고 있으시죠?”
중력과…… 뭐였더라?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말없이 고민하고 있자, 연우진이 대답했다.
“다른 능력, 시공간 조작이에요.”
도이현의 복사한 능력은 그쪽.
“네? 뭐요?”
교육받을 때 전속이 아닌 이상 가이드가 에스퍼의 능력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들었다.
능력이 알려지면 임무에 지장이 가는 에스퍼도 있고, 애초에 에스퍼의 능력이 필요한 곳은 대개 게이트 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에스퍼들의 능력이 비밀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서윤호처럼 육안으로 보이는 능력도 있고, 일부러 말하고 다니는 에스퍼들도 적잖게 있었으니까.
그리고 게이트 클리어로 따지자면 개인 성과 1위를 달성하고도 남을 메시아의 길드 마스터 연우진. 그의 능력은 다중 능력자에 주 능력은 공격 계열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추측 글을 살펴봤다면 다른 걸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이렇게 휘말리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각성자에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뭔가…… 음, 능력 이름이 거창해서 쉽게 상상이 안 가네요.”
“아, 그럼 보여 드릴까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의 손끝에서 찬란한 빛 방울이 터져 나왔다. 마치 어둠 속 반딧불이처럼 피어난 황금빛의 빛이 허공을 부유하며 집안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저는 중력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지만, 국가에선 다중 능력이라 칭하더라고요.”
눈꺼풀을 한 번 깜박이는 시간. 딱 그만큼인 찰나에 불과했던 것 같다.
무언가 바뀐 걸까. 시선을 돌린 나는 이내 숨을 들이켰다.
조금 전의 사건으로 인해 훤히 뚫려 있던 바닥이 언제 뚫렸냐는 듯 그 공간을 완전히 메우고 있었다.
그저 바닥이 고쳐진 게 아니다. 이 공간의 시간을 되돌려 이전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건 도가빈이 있을 당시 바닥에 떨어져 깨졌던 찻잔 또한 그대로 자리한 것을 보고 알 수 있었다.
달칵, 찻잔의 둥근 끝부분이 살짝 움직였다.
“…….”
나는 연우진이 왜 온갖 명칭으로 불리며, 칭송하는 이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깨달았다.
이 능력의 대가가 무엇일지 상상도 안 갔다. 사람이 생각이 너무 많으면 말문이 막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이걸 도이현 씨가 복사했다고요?”
그럼 큰일 아닌가.
“네, 하지만 복사했다고 해도 제대로 쓰는 건 어려울 거예요. 제가 알기로 감당하기 힘든 능력일수록 능력 사용도 실패할 확률이 높았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는 것은 8년 전의 도이현이지 않나? 애초에 복사 조건이 까다롭다면서 그 난리 통에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에스퍼 둘의 능력을 복사한 도이현도 대단했다.
시공간이라면 어디까지 가능하지?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의 합성어인가? 멀쩡해진 바닥을 빤히 쳐다보던 그때,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쳤다.
“우진 씨, 혹시 그때 레드 게이트…… 그때도 이 능력 사용했었어요? 검은 숲속에서요.”
그래. 앞서 연우진은 앞서 내게 레드 게이트를 통해 나온 검은 숲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온통 검고, 상급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숲이었다고.
헤르만 제국에서 그런 곳은 검은 숲밖에 없다. 그러나 헤르만의 검은 숲에는 인간은 물론이며 마물조차 살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그 숲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들어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아 금지 구역으로 지정된 곳이었다.
몇몇 황성 마법사들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 조건으로 조사해 본 결과 나무, 땅 그곳의 그 어떤 것이든 훼손하면 얼마 안 가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래서 기괴한 숲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건, 방금 본 연우진의 능력과 비슷하지 않나?
“네, 그 숲의 시간은 제가 멈췄어요. 당시 토벌에 필요해서요.”
멀리 떨어져 있던 점과 점이 선으로 이어졌다.
나는 왜 도가빈이 검은 숲의 이야기를 듣고 내 기억을 읽었을 때 일문일답은 그만두었는지 깨달았다.
이미 원하는 답을 보았는데 굳이 이어 나갈 필요는 없었겠지.
‘……됐다. 그만 생각하자.’
어찌 되었든 당장 궁금했던 것은 해결되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게 되어 불안할 지경이었다.
꿈속 아멜리아는 헤르만 제국이 이곳과 이어진 게이트 중 하나라고 했다.
어쩌면 8년 전 대격변으로 인해 세계가 바뀌거나, 내가 아멜리아라는 다른 세계의 사람에게 빙의되는 일이 벌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제 나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고, 애초에 나는 게이트를 닫는 에스퍼가 아닌 가이드에 불과했다. 이 이상은 내가 알아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 뭘 할 수 있겠어.’
사람은 자신의 이해를 넘는 현실을 직면하게 되면 오히려 관대해지는 법이었다. 그건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간 별일을 다 겪어 보며 내가 배운 것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적응하는 법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하고 싶은 건 다 해 봐야 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득도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되고 나자 연우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능숙하게 가이딩을 했다.
“……!”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연우진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귓가는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보는 이조차도 부끄러워질 정도로 선명한 반응이었으나, 내 쪽에서 먼저 잡을 때마다 매번 이랬던 탓에 이젠 익숙해졌다.
차분히 가이딩을 진행하던 도중 무심코 그의 얼굴에 시선이 갔다. 그의 반응에 익숙해진 것과는 별개로 얼굴은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특히나 지금은 가이딩으로 인해 눈가가 살짝 달아오른 탓에 마치 명화처럼 얼굴이 평소보다 배는 화사했다.
빤히 쳐다보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하는 게 어쩐지 귀엽…….
‘……미쳤나?’
나는 당황하며 잡았던 손을 뗐다.
무심결에 한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부적절한 것을 생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저절로 굳었다.
나보다 배는 커다란 데다 성격도 더러운 사람을 귀엽다고 생각하다니. 물론 나한테는 고분고분했다고 해도 이건 좀 뭔가 아니지 않나.
연우진이 순식간에 비어 버린 손을 쥐었다 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지레 찔린 나머지 서둘러 덧붙였다.
“어, 음, 시공간 능력은 가이딩 소모가 커서 잘 쓰지 않는다면서요. 그래서 가이딩 부족해졌을까 봐 걱정되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멀쩡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수리 범위가 적어서 그런가? 이 정도는 괜찮나 봐요.”
그에 연우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네. 제겐 익숙한 공간이기도 하고, 이 정도 되돌리는 것은 타격이 크지 않아서요.”
평소보다 정적인 그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던 것도 잊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