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82화
“아뇨, 괜찮습니다. 임무 중이니까요.”
“네, 마스터의 전담 가이드님께 그런 수고를 끼쳐드릴 수는 없죠.”
곧장 거절한 다른 에스퍼 둘과 달리 B급 에스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저! 저, 여기에서만 판매한다는 쿠아 파이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었어요.”
“아…… 쿠아 파이는 지금 재료가 충분하지 않아서, 청이 조금 남아 있긴 하는데 라떼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헉, 저 쿠아 라떼도 꼭 한 번 먹어 보고 싶었는데!”
B급 에스퍼의 눈이 반짝였다.
활발한 성격으로 보이는 그에게 쿠아 라떼를 만들어 준 뒤 곧장 야채부터 썰었다.
이번에 만들 신메뉴는 식사 메뉴인 스튜였다.
가끔 카페에서 디저트류 말고도 간단히 식사 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찾는 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들이기로 했다.
스튜라고 하면 만드는 게 어려워 보이나 생각보다 쉽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건 예전에 내가 로판 세계에서 함께 전쟁에 나갔던 기사 중 한 명이 제 방식이라며 알려 준 것이었다.
우선 양파와 당근, 감자, 브로콜리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준다.
본래의 방법과 다르게 조리 단계를 줄이기 위해 루를 생략하고 버터를 크게 자른 고기와 함께 볶는다.
그 후 야채를 익는 순서대로 넣고, 어느 정도 볶아졌으면 재료가 물에 잠기지 않을 정도로만 물을 붓고 끓인다.
“어? 그건 뭐예요? 던전에서나 볼 법한 이상하게 생긴 잎이네요. 그걸 왜 스튜에…….”
끓이는 와중 무언가를 스튜 속에 넣자, 앉아서 라떼를 마시던 B급 에스퍼가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방금 내가 넣은 것은 형광빛이 돌 정도로 파란 데다 끝부분이 톱날처럼 생긴 나뭇잎이었기 때문이다.
“세피아 잎이요.”
세피아 잎은 쿠아 열매과 함께 나는 나뭇잎이었는데, 쿠아 열매를 끓일 때 썼던 나뭇잎을 다른 음식과 끓이면 열매만큼의 효과는 못 봐도 간단한 상처 회복 효과가 있었다.
쿠아 열매와는 달리 고소한 맛이 나기도 하여, 어느 정도 감칠맛을 더할 수도 있었고.
“세피아 잎이요?”
“네, E구역에서 발생한 열매와 함께 나는 나뭇잎이에요.”
왜 나뭇잎을 넣는지 모르겠다는 시선에 나는 이 사람 요리 한 번도 안 해 봤구나 싶었다.
그도 그럴 게 원래 스튜에는 보통 월계수 잎이 쓰이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세피아 잎이 독특하게 생겨 시선을 끌기도 했지만.
‘그러고 보니 쿠아 열매가 나타났다던 구역이 C구역 근처인 E구역 아니었던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쥐고 있던 국자를 놓쳤다.
나는 서둘러 상체를 숙여 국자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 순간 땅이 뱀처럼 꿀렁거리더니 시야가 흐려지고 귓가가 먹먹해졌다.
“읍-.”
나는 국자를 잡아채고는 곧바로 상체를 들었다. 머릿속이 울렁거렸지만,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는 위협이 느껴졌다.
털썩, 쾅.
고개를 들자 카페 안에 있던 에스퍼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쓰러진 그들의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내가 바짝 굳어 있을 때였다.
저벅, 저벅.
구두 소리와 함께 마치 연인에게 속삭이듯 달콤한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안녕, 예쁜아.”
익숙한 금발, 얄궂게 휘어지는 검은 눈동자.
“……안녕하세요, 레이몬드 짝퉁 분.”
그날 배에서 만났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 * *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한지도 모른 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우선 문은 따로 잠가 놓지 않았으니 알아서 열고 들어왔다고 쳐도, 결계 탓에 에스퍼의 능력이 불가하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능력을 썼는지 모르겠다.
이로운에게 그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이로운은 지금 여기에 없었고, 나는 그 대신 니체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신은 죽었다며 속으로 수십 번 되뇌었다.
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은 이상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진창일 리가 있나.
“잠깐, 짝퉁이라니?”
저 사람들 죽은 건 아니겠지?
힐끗, 쓰러진 에스퍼들을 확인하며 아직 먹먹한 귓가를 매만졌다. 살짝 스친 귓불에는 낀 지 얼마 안 된 밋밋한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하나 고민했다. 저 남자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배에서 도망치는 나를 도와주긴 했으나, 그 배에 있던 것 자체가 전혀 걸릴 게 없는 선량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쁜아, 듣고 있어? 짝퉁은 내가 아니라 다른 쪽이라니까?”
“네? 아, 스튜 드실래요?”
일단 자극하지 말자.
배고픈 맹수를 앞에 둔 것처럼 음식부터 권하자, 남자가 황당한 듯 웃음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 음식을 권하다니, 전에도 그랬지만 담력이 크네~ 예쁜아, 긴장 안 돼?”
안 할 리가. 긴장을 너무 한 나머지 지금 이런 상태가 된 거였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면 생존 본능이 발동하여 움직임이 되레 침착해지곤 했는데, 지금이 그 상황이었다.
물론 몸이 긴장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머릿속은 평소와 다르게 엇나갔다.
남자가 카운터에 팔꿈치를 댄 채 턱을 괴고 나를 응시했다.
“농담이야~. 내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지 궁금한 것 같은데 이 결계 이로운의 능력이지? 이로운의 결계는 당사자가 계속 능력을 사용 중인 게 아닌 이상 정신계의 경우 통하지 않거든. 그리고 나는 정신계 에스퍼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고.”
무슨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남자가 말을 꺼냈다.
“아, 이건 읽은 게 아니라 그냥 표정에 쓰여 있어서 그래.”
“…….”
“진짜야. 나 읽는 건 직접 만져야 가능하거든.”
“……혹시 굿도 하실 줄 아세요?”
정신계 에스퍼라고 하긴 했는데 실시간으로 사람 속이라도 읽은 것처럼 답하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봤다. 초능력자가 있는데, 귀신 섬기는 능력자라고 없을까.
만약 굿 좀 할 줄 알면 내 불운 좀 가져가 줬으면 좋겠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보통 사람이라면 게이트에 휘말리거나 사건에 휘말리는 것만으로도 죽었을 텐데 매번 살아 나왔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반대로 휘말렸으니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쓰러진 에스퍼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미접촉 시 능력 조절이 까다로워서 한 번에 기절시키기 위해 살짝 출력을 높인 것뿐이라 큰 부상은 없을 거야. 나도 싸우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거든.”
그는 괜한 소동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며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소동은 이미 일어난 것 같은데.
나는 조심스럽게 이전에 들은 남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니까…… 도가빈 씨?”
그러자 그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대답했다.
“왜, 영희 씨?”
“네?”
“아, 아닌가. 김수미 씨였나?”
의문도 잠시, 나는 깨달았다.
그날 나는 배에서 이름을 물어보는 남자에게 가명을 말해 주었다.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탓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정황상 아무래도 저 이름들이 그때 내가 말한 이름들인 것 같았다.
황당함이 역력한 내 얼굴을 마주한 남자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었다.
“그래도 역시 유정이가 제일 예쁘지?”
어떻게 말해 주지도 않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지. 내가 운영하는 카페를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차분히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신계 에스퍼라고 했고,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배에서 그에게 턱이 잡혔었다.
하나를 떠올리자 연이어 다른 것들도 속속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날 남자는 가운 차림임에도 손에는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내 턱을 붙잡을 당시 남자는 굳이 장갑을 벗었다.
그 이후 속이 울렁거렸고, 그는 가이딩을 최대로 낮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때는 수갑 형태로 가이드인 것을 알았거니 뭐니 하고 둘러댔지만.
‘-접촉.’
나는 곧장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죽 장갑을 낀 바로 위, 천이나 가죽으로 감싸지 않은 맨 손목이었다.
“지금부터 능력 쓰지 마세요. 능력을 쓰는 순간, 그쪽 목숨 보장 못 합니다.”
에스퍼가 능력을 쓸 때 파장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놓고 있는 것보단 붙잡고 있는 게 안전상 더 나았다.
능력을 쓰는 기미가 보이는 즉시, 가이딩을 빼앗으면 되니까.
조금 전 다른 에스퍼들을 기절시킨 것을 보면 그는 접촉하지 않아도 능력을 쓸 수 있는 듯했다.
본인 입으로 말하길 접촉하지 않으면 조절이 힘들다고 했으나 그게 진실일지 거짓일지는 모를 일이다.
“와, 너무하네.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도가빈은 내게 얌전히 잡힌 채로 어깨만 으쓱였다. 그리고 태연스레 물어 왔다.
“나를 죽이려고?”
그의 말로 들어 보아 내 능력을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이 사람도 그때 있었지. 그의 능력이 어디까지 통하는지는 몰라도 만약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유추는 비교적 수월했을 테다.
“필요하다면요.”
“그러지 마. 나는 서로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받고자 온 것뿐이니까.”
도가빈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무기인가 싶어 곧장 능력을 쓰려는 순간, 내 시야에 익숙한 붉은 보석이 들어왔다.
“그건…….”
보석 안에는 반투명한 암석 같은 게 들어 있었는데, 그 암석 위에는 헤르만 제국어로 ‘비비안’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저것을 잘 알고 있었다. 비비안 소유의 정령석 중 하나로, 비비안은 항상 정령석 안에 제 이름으로 표시를 해 놓곤 했다.
필체도, 정령석의 형태도 비비안의 것과 똑같았다.
“선물이야. 우리, 한번 친하게 지내 볼까?”
도가빈은 그걸 마치 프러포즈 반지라도 바치듯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넣어 내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