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76화
그러나 대답한 것은 질문을 받은 연우진이 아닌 조예나였다. 조예나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안 돼요, 길마님.”
“아니, 왜에…….”
“길마님은 얼굴이 잘 알려져 있잖아요. 혹시라도 유정 언니가 부담스러워하면 어떡해요.”
“예나야, 나야 그 가이드야?”
“유정 언니요.”
만담 같은 대화가 이어지던 와중, 연우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연우진은 휴대폰이 진동하자마자 화면을 켰다.
문득 하도경은 연우진이 제 연락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던 김유정을 떠올렸다.
하도경은 조소했다.
연락을 확인하지 않긴 개뿔. 연우진이 유일하게 알림 설정해 놓은 것은 김유정의 연락처뿐이었다.
문자를 확인한 연우진은 갑자기 하도경을 팔을 잡아끌며 출입문을 향해 나아갔다.
대뜸 눈앞에서 사라진 목표물에 권시현은 두 눈을 깜빡였다.
뭐지, 이건.
언짢아진 권시현이 입가를 삐뚜름하게 내린 참이었다. 연우진이 하도경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송화연에게 연락해서 누나 상태 확인해 보라고 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보고 올려.”
“뭐, 뭐?”
“누나 위치, 건물 내부인지 당장 확인해 보라고.”
낮아진 음성이 내뱉은 말을 되풀이했다.
가이딩제로 인한 부작용은 이제 우스울 정도로 가라앉은 연우진의 얼굴에 하도경은 대답 대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 * *
연우진이 김유정을 피해 다니기 시작한 이유는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 때문이었다.
「당분간 그쪽 얼굴 볼 일 없길 바랍니다. 제발, 부탁이니까.」
연우진의 정체를 알게 된 김유정은 화가 났음에도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따뜻하게 불어오던 봄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서늘하고, 버석한 목소리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김유정이 무력으로 연우진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었다.
애초에 연우진은 누가 자신을 죽인다고 해서 겁먹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가깝던 죽음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허망이 더 꺼림칙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유정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 연우진은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워졌다.
바닥이 순식간에 꺼진 것처럼 짙은 공포가 발끝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변명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냉정하게 이어지는 김유정의 목소리를 막고 싶어서 입을 열었으나, 제대로 된 문장을 이루지 못한 채 의미 없는 부정만 끝없이 반복했다.
끝내 김유정이 당분간 얼굴을 보이지 말라고 고했기에 그는 따랐다.
의지를 갖고 수락한 것이라기보단 이 이상 관계를 망칠까 두려웠던 게 더 컸다.
그러나 연우진은 김유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애타게 갈망해 본 적이 있었을까? 미래에도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란 확신만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차라리 망가뜨려서라도 곁에 둔다면 이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까?
설령 나를 싫어하게 되더라도 영영 잃어버리는 것보단 낫지 않나.
에스퍼의 본능, 가이드를 향한 집착이 까맣게 일렁였다. 날카롭게 머릿속을 헤집는 탐욕에 아무리 마물을 죽이고, 주변의 모든 것을 부숴도 파괴 본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게 제겐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던 무렵, 연우진은 다시 김유정을 볼 수 있었다.
오로지 그녀만이 선명했다. 지금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에게 붉은색은 어울리지 않았다.
울컥, 자꾸만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았을 때,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연우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겐 너무나도 익숙한 색이 두려워서 그는 계속해서 그녀를 물들인 붉은색을 닦아 내고자 손을 문질렀다.
후에 다가온 하도경이 제 팔을 붙잡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망가뜨려서라도 곁에 두면 어떻겠냐고?’
벗어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연우진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멍청한 소리였다.
연우진은 그녀의 뺨에 상처가 그어졌을 때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향해 원망의 말을 쏟아 내었을 때도.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작은 상처조차 온종일 신경 쓰여 미칠 것 같고, 미움받는 게 그토록 두려워 진실을 미뤄 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김유정이 깨어나지 않는 동안 연우진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죽으면 어떡하지? 내가 잠시 잠들었을 때, 자리를 비웠을 때. 그래서 더는 볼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식사를 거르고, 잠조차 자지 않았다. 매 순간이 악몽 같았던 기다림 끝에서 김유정이 깨어났다. 일어난 김유정은 우는 그를 달래고, 안아 주었다.
「연우진 씨. 우리 저번 일로 할 말 있었죠?」
그러나 기쁨도 잠시, 얼마 안 가 김유정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그의 품을 벗어나 대화를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한숨이 섞인 지친 목소리.
「당분간 시간을 갖자고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말하게 되네요. 우선-.」
시선조차 더 마주하기 싫다는 듯 피해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끝내 초조함이 그를 삼켰다.
혹시 마지막을 고하려는 걸까. 내가 끔찍하다고 한다면-.
그때 당분간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다시 나타나 화가 난 것일지도 모른다.
걷잡을 수 없는 생각에 그는 결국 그 자리에서 벗어났고, 계속해서 그녀를 피했다. 그리고 지금, 연우진은 김유정이 있는 방문 앞에 섰다.
“안 열면 내가 연다?”
김유정이 메시아와의 계약을 체결했기에 이젠 김유정 쪽에서 연우진을 보기 싫다고 해도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당장은 끝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연우진은 좀처럼 문을 열 수 없었다.
결국 지켜보다 못한 하도경이 문을 연 순간, 열린 문 사이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더니 연우진을 뒤에서 잡았다.
“화연 씨, 그거 잘 잡고 있어요!”
“진짜 저 오늘 죽는 거 아니죠?!”
“제가 무슨 일 있어도 화연 씨 목숨 지켜 줄게요! 저 믿죠?”
“믿습니다!”
난데없이 펼쳐진 상황에 붙잡힌 연우진이나, 막 방 안으로 들어서려던 하도경이나 너나 할 것 없이 놀라 굳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유정은 들고 있던 밧줄을 잽싸게 연우진의 다리에 칭칭 감고는 해냈다는 듯 씩 웃었다.
“드디어 잡았다.”
연우진은 자신을 묶은 밧줄의 끝을 쥔 채 웃고 있는 김유정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송화연은 김유정이 연우진의 포획을 마친 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그에게서 떨어졌다. 정적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하도경이었다.
“와…… 내가 살다 살다 별 광경을 다 보네…….”
“어? 도경 씨도 있었네요.”
“제가 먼저 들어왔는데 저 못 보셨어요? 연우진한테 집중하고 계셨나 봐요.”
“당연하죠. 또 도망가면 어떡합니까.”
김유정은 대답하는 와중에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연우진의 손목도 묶고 있었다.
무슨 범죄자라도 포획하는 듯한 풍경에 하도경은 조금 흐린 눈을 했다.
짧은 사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많았다.
밧줄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다른 걸 찾아봐 주겠다든가, 그건 왜 그렇게 잘 묶는 거냐라든가…….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입에서 나온 말은 간단했다.
“둘만 있을 수 있게 자리 비켜 드릴까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
“송화연 씨, 우리는 식사라도 하러 가죠. 제가 쏠게요.”
“네, 좋아요!”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듯 눈을 굴리던 송화연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가고 방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연우진은 당황도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
제일 듣고 싶지 않았던 ‘더는 보지 말자.’라는 말이 나올 일은 없었다.
이제 적어도 1년간 김유정은 메시아의, 연우진의 전담 가이드였으니까. 그럼에도 좀처럼 시선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아직 화난 걸까?’
어쩐지 목이 탔다. 어린 시절 제 부모가 저를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이렇게 긴장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우선-.”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먼저 끊은 것은 김유정이었다.
“대체 왜 저를 피해 다닌 거예요?”
“……당분간 얼굴을 보이지 말라고 하셔서요.”
“네? 제가요? 언제…… 아, 혹시 그때 말하는 거예요? 카페에서?”
“…….”
“그게 언제 적- 그보다 이미 지킬 수 없게 되지 않았나? 아니, 진짜 전담 계약도 맺었는데, 어떻게, 아니, 왜??”
김유정은 미간을 좁힌 채 밧줄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하도경의 생각과는 달리, 애초에 김유정이 연우진을 묶은 것은 기분상 붙잡힌 기분이라도 느끼고 얌전히 있으라는 의미로 묶은 것뿐이었다.
조금 악감정이 들어가서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포박하긴 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확실히 자신이 한 말이 맞았다. 그러나 그 이후 일어난 일도 있고, 계약도 맺게 되어 이미 쓸모없는 말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정작 말을 뱉은 당사자는 그때의 말을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은 계속 기억하고 있던 것이다.
“……일단 알겠어요. 뭐가 되었든 결과적으로 잡혔으니까 이 피곤한 술래잡기는 그만하도록 합시다. 그럼 이제 말해도…… 아니지, 제가 잡았으니까 제게 잡힌 연우진 씨는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얌전히 다 들어야 해요.”
연우진은 내렸던 눈꺼풀을 들어 김유정을 쳐다보았다.
김유정은 그가 도망가지 않을 것 같자 그의 다리를 묶었던 끈을 풀었다.
솔직히 진심 반 장난 반 묶은 건데 상대방이 너무 순순히 묶여 있어서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