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64화
그냥 미친 듯이 달렸던 기억밖에 없다. 긴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르고, 커다란 지붕이 달린 통로도 지나고.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숨도 차고 위에 감시 카메라가 달리지 않은 복도가 있기에 달리기를 잠시 멈췄다.
사각지대라고 할 법한 모퉁이에 바짝 붙은 채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며 허리춤에 손이 닿았다. 조금 전과 달리 허리 부근이 허전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이야.’
탈출할 때 쓴 아이템들은 전부 주연우, 아니 연우진이 준 것이었다.
저번 데이트에서 호신용 아이템으로 쓰라며 내게 안겨 주었는데, 너무 많기에 그나마 작은 거 세 개를 골랐다.
세 개만 받겠다는 내 말에 연우진은 잠시 시무룩한 얼굴로 불만을 표하다 이내 반드시 갖고 다니라며 내 바지에 매달아 주었다.
떨리는 손 탓에 몇 번이고 거는 것을 실패해서 결국 하나만 달아 주고 남은 두 개는 내가 달았지만.
나는 이제 하나 남은 허리춤을 가만히 쳐다보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남은 것은 일회용 방어막이었다.
“그건 그렇고 여긴 또 어디야…….”
벽에 등을 기댄 채 빼꼼 고개를 내밀려는 순간, 여러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듯한 빠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나는 어깨를 움찔 떨며 서둘러 주변을 살폈다.
지금 있는 복도는 내가 갇혀 있던 곳보다 호화스러웠다. 귀빈실인 것 같았다.
금이 새겨진 검은색의 벽지, 그리고 숫자만 다를 뿐 똑같은 형태를 가진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수없이 많은 문들 중에서 유일하게 살짝 열려 있는 문을 발견했다.
저벅. 나를 찾는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모퉁이를 돌면 곧장 마주치기라도 할 것처럼.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이 문과 길게 이어져 있는 복도를 향했다.
……도망갈 수 있을까? 다른 방향으로 가기엔 뛰어가다 들킬 듯했다.
쿵, 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발소리와 맞춰지고 그 소리가 더 커지는 듯하자, 나는 더 망설이지 않고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칵.
입을 막은 채 문 뒤에 기대선 나는 귀를 기울여 발소리에 집중했다. 바로 문 앞까지 온 듯 가까워진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주춤, 뒤로 물러나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무언가를 잘못 밟고 넘어졌다.
탁! 급히 손부터 뻗어 소리가 커지지 않도록 했지만, 아주 안 나는 것은 무리였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안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으음- 뭐야.”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나른한 목소리였다.
자라. 그냥 다시 자라!
들키지 않게 내 입부터 막고 벽에 몸을 붙였지만, 안타깝게도 소리를 들은 상대방이 이쪽으로 와 버렸다.
“아직도 안 갔…… 어라, 누구?”
쭈그린 몸 위로 크게 그림자가 졌다. 맨발, 맨다리. 살짝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흰 가운이 보였다.
좀 더 고개를 들자 벌어진 가운 사이로 탄탄한 근육으로 짜인, 그러니까 가슴이 보였다.
립스틱과 울혈 자국.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얼굴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빗장뼈와 그 위아래로 펼쳐진 적나라한 붉은 자국들이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내 방에 누가 넣었지? 지금은 피곤해서 그럴 생각 안 드는데-.”
남자가 고개를 내려 나를 응시했다. 나는 가까워지는 몸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레이몬드?”
헤르만 제국에 있을 적, 황태자이자 아멜리아 캠벨의 약혼자였던 이.
살짝 헝클어진 금발, 타인을 제 아래로 보는 듯한 눈은 이 상황에 대한 놀람보단 흥미를 담고 있었다.
조각처럼 날렵한 느낌이 드는 얼굴은 음울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러나 가늘게 올라간 눈꼬리가 휘어지면 인상이 달라졌다.
“응? 나보고 한 말이야?”
생각하기 무섭게 남자가 두 눈을 유려하게 휘었다. 감정을 덧씌우는 것처럼 무채색이던 표정에 색이 입혀졌다.
어딘가 낯익은 분위기에 멍하니 바라보는 것도 잠시, 눈앞의 남자가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아니야.’
밝은 레몬색의 머리카락도, 닮긴 했다. 그러나 레이몬드의 푸른 눈과 달리 눈앞 남자의 눈동자는 살짝 붉은 기가 섞인 검은색이었다.
외양 또한 자세히 보면 조금 비슷할 뿐인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놈은 또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한국어를 하고 있긴 하지만, 번역 장치만 달면 언어 변환이 가능했기에 분간할 수 없다.
그렇다고 외양으로 분간하기엔 게이트 이후로 지형뿐만 아니라 인간 또한 영향을 받아 머리 색이고 눈 색이고 특이한 이들이 많았다.
물론 대부분 각성자들이 그러했지만, 일반인 중에서도 그런 이들이 없진 않았다.
뭐가 되었든 이런 귀빈실에 있다는 것 자체가 주최자 아니면 그 상품이니 뭐니 하는 걸 거래하는 잔치의 손님이라는 말이었다.
“아~.”
내가 가만히 그를 응시하는 동안 남자의 시선은 내 손목에 달린 수갑을 향해 있었다. 수갑을 보고 살짝 커졌던 눈이 다시금 야살스럽게 휘어졌다.
“뭐야. 시작 전 깜짝 이벤트인가? 아니면-.”
움찔, 반사적으로 손목의 수갑 쪽으로 시선을 내리자 남자가 내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턱에 닿는 가죽 특유의 느낌에 나는 뒤늦게서야 남자의 손에 검은색 가죽 장갑이 끼워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가 손에 끼워져 있던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내 얼굴을 틀어쥐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더운 날 끓어오르는 포장로 위의 아지랑이 속으로 던져진 것처럼.
또 뱃멀미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놔!”
나는 얼굴을 세게 도리질하고 재빨리 엉덩이로 뒷걸음질 쳤다.
웩.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헛구역질하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드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제 입가를 가린 채 중얼거렸다.
“가이드? 아니…… 그보다 그건-.”
“내가 가이드란 건 어떻게 알았지?”
가이딩은 여전히 최대로 낮추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껏 연우진 외에 가이딩을 최대로 낮췄을 경우 내가 가이드라는 것을 눈치챈 에스퍼는 없었기에 긴장을 곤두세웠다.
내 물음에 그는 짧게 드러났던 놀란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는 힐끗 눈짓으로 수갑을 가리켰다.
“……그런 허술한 수갑, 상품 중 인간에게 쓴다면 보통 가이드거든.”
“당신도 납치범이야? 이곳은 대체-.”
생각 외로 돌아온 답변에 나는 쏟아 내듯 질문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불현듯 무언가라도 들은 사람처럼 문 쪽으로 고개를 든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쥐었기 때문이다.
“메타모포시스.”
공격인가 싶어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리려던 차에 내 머리카락이 남자와 비슷한 금색으로 물들었다.
당황하여 굳은 찰나, 남자가 나를 잡아끌어다 침대로 던졌다.
덜컥, 위협을 느낀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나는 눕혀졌던 상체를 빠르게 일으켰다.
“X발, 지금 뭐 하자는-.”
“착하지. 잠깐 조용히 있자? 그거 기껏해야 10분밖에 안 가거든.”
남자가 일으켰던 내 상체를 힘으로 눌렀다. 다시금 몸이 강제로 눕혀지며, 이윽고 남자가 나를 따라 누웠다. 그리고는 내 몸을 이불로 감싼 채로 꽉 끌어안았다.
‘뭐야, 이 새끼?’
손을 쓸 수 없다고 발도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남자의 중심부를 발로 차려는 찰나, 문 쪽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잠겨 있네? 그럼 들어갈게요~.”
나는 바짝 몸을 굳혔다. 숨소리를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아, 어쩐지~ 여기 카드 빼놓으면 문 안 잠긴다니까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표준어를 쓰고 있음에도 사투리처럼 악센트가 일정치 않았다.
“응? 아까 전의 여자와는 머리카락 색이 다른데 뭐야, 그새 또 다른 사람 데려온 거예요?”
“예쁘더라고. 그보다 왜 왔어?”
“곧 경매가 시작될 것 같으니 침대에서 나오라고 말해 주려고 왔죠. 기다릴 테니 옷 입으세요. 아, 그러고 보니 듣기로는 상품이 도망친 것 같더라고요. 검은 머리 여자 둘, 가이드라는데 먼저 찾으면 주최 측에서 뭐라도 주나~?”
상황이 어찌 굴러가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장은 나를 숨겨 줄 생각인 것 같았다.
남자의 품에서는 약초인지 담배인지 모를 독한 약 냄새가 났다. 나는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굴렸다.
흘낏 남자를 올려다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상대를 향해 있었다.
“그래? 그럼 옷 입고 나갈 테니 먼저 나가 봐. 이 애 지금 자고 있어서 깨우기 싫거든.”
“흐음…… 의외네요. 하룻밤 아니었어요? 아니면 마음에 들었나?”
“왜. 마음에 들었으면 주선이라도 해 주게?”
“참가자 중 어느 쪽인지 알아봐 줄 수는 있죠. 필요하다면 더 긴밀하게 돕고.”
“……글쎄 아마 그쪽은 못 도와줄걸. 상당히 귀한 아가씨라 말이야. 그보다 그쪽이 그렇게 내 연애 사업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네.”
농담처럼 던진 말에 상대측 남자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당연하죠~ 가빈 씨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요? 단순히 어울리는 것을 넘어서 ‘동료’로 발전하려면.”
가벼웠던 목소리에 점차 무게가 실렸다. 조금 전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상대측이 말을 이었다.
“‘에러’로 들어오라는 제안은 여전해요. 우린 그 사람의 형제인 당신이 우리와 함께해 주길 바라거든요. 당신도 그를 만나고 싶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