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58화
평소라면 다소 강제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목적을 달성했을지도 모르나 그 방법을 행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김유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했다가는 연우진에게 살해당한다.
김유정이 사라졌을 때 어떠했던가?
연우진은 멀쩡한 사람도 돌게 만들 수 있는 대단한 놈이었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가진 정보를 풀어서 찾으려고 하니 혹시라도 김유정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안 된다고 하고.
그러면 눈치 보지 말고 김유정과 접촉했던 이들에게 능력을 써서라도 발자취를 좇자고 하니 주변 사람 건드렸다가 김유정에게 미움 사면 다 죽여 버릴 거라고 막은 개자식.
김유정이 떠났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간 주제에 혹시라도 미움받을까 봐 초조해하는 연우진의 모습에 하도경은 매칭률이라는 게 이 정신 나간 개자식을 진짜 개로 만드는구나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김유정의 흔적과 가이딩을 없애기 싫다고 청소도 하지 말라고 하고 죽은 듯이 방 안에만 박혀 있더라.
저러다 인내가 끝나면 큰일 내겠다 싶어 기분 좀 풀라고 임무를 보내면 회수조차 할 수 없게 전부 도륙 내 버리기에 그냥 집에 있어 달라고 사정사정하기도 여러 번.
연우진의 상태가 안정된 것은 다시 김유정을 만난 후였다.
무슨 말을 나눈 건지는 몰라도 그날 이후로 표정이 펴지더니 점점 사람이 변해 갔다.
이러한 변화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우연이란 게 있네. 사실 그런 식으로 놓쳐서 찾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줄 알았거든.”
“우연?”
“어. 우연히 서류를 확인해서 찾을 수 있던 거잖아.”
그때 비서가 말해 주지 않았다면 좀 더 찾는 게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재각성 검사 결과가 S급 가이드라서,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던 그 이름을 제가 잠결에 말해서. 작은 우연들이 겹쳐 하도경의 위를 살렸다.
그러나 연우진은 하도경의 말에 부정했다. 연우진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입을 열어 답했다.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야.”
마치 혀가 녹을 정도로 단꿈에 푹 잠긴 사람처럼 연우진의 눈이 유려하게 휘어졌다.
얇아진 시선 안에 고인 것은 짙고도 진득하게 녹아난 감정이었다.
미친 새끼. 하도경은 목 위까지 올라온 말을 겨우 삼켰다.
‘가이드가 운명? 지금 저 새끼 입에서 운명이라고?’
괴이 현상 두 번째, 저 염세주의자 입에서 운명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리 이상한 말은 아니었다. 가이드나 에스퍼의 매칭률을 운명이니 뭐니 하니 떠들어 대는 사람은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연우진의 입에서 나왔다면 말이 다르다.
하도경은 당장이라도 욕을 지껄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한숨을 토해냈다.
“야, 그 운명이든 뭐든 그래서 정체는 대체 언제 말할 건데?”
“신경 꺼.”
연우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언제까지 미룰 수만은 없을 텐데.’
그러나 지금 연우진은 그런 끝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결국 하도경은 입술을 달싹이다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그보다 지금 김유정 씨 상태를 보니 우리 쪽으로 넘어올 것 같진 않던데. 다른 길드로 들어가면 어쩌려고?”
“없애. 그럼 들어갈 수 없잖아.”
“와 씨 진짜 돌겠네…….”
보통 이런 경우 가입하려는 사람을 막지 가입하려는 길드를 부순다는 발상을 하진 않지 않나?
하도경은 거친 손짓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무슨 길드 통합이라도 하자는 건가? 만약 하나 없앴는데 김유정이 그다음에도 메시아를 선택하지 않으면 하나하나 처리해야 하는 거냐고…….
‘그 가이드는 대체 어디로 갈 생각이지?’
김유정의 반응도 예상외긴 했다.
그녀에게 내민 조건은 지금껏 메시아 길드원 누구에게 내밀어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애초에 복무 상태인 교육생의 경우 신입보다 계약 대우가 낮은 편인데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신입은 물론 경력직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했다.
당사자에게 얼굴이 팔려서 직접 가서 설득하진 못했지만, 인사팀 최고 직위자가 직접 가서 설득까지 했다. 그런데도 안 됐다.
‘……우리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길드가 있다고?’
그럴 리가.
하도경은 이마를 짚었다.
다소 강제나 빼 오는 게 아니라면 어떤 수를 써야 김유정을 메시아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따로 원하는 조건이 있나? 하지만 계약서에 괜찮은 조건이란 조건은 다 붙였는데?
직접 간 길드원 말로는 혹시 따로 원하는 게 있냐고 물어보니 김유정은 잠시 어색하게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했다.
‘아 진짜 문제 일으키긴 싫은데-.’
하도경으로서는 김유정이 순순히 메시아로 와 주었으면 했다.
연우진이 김유정을 포기할 일도 없을뿐더러, 음침하게 뒤에서 손을 쓸 바엔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해 주고 데려오는 게 어딜 봐도 나았으니까.
솔직히 난동을 피워 이 이상 길드에 쓸데없는 소문을 추가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김유정을 다른 곳으로 보낸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김유정이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 하게 한다고? 그 꼴을 연우진이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매칭률 높은 가이드에 대한 에스퍼의 집착은 정상이 아니었다.
교육 기간도 겨우 넘겼다. 실습 대신 면담을 한다는 말 듣고 참았던 놈이다.
심지어 그 면담도 상대가 이로운이라는 말에 성질을 죽인 거였다. S급 에스퍼인 이로운이 신체 접촉에 거부감을 가졌다는 것은 연우진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성격 더러운 연우진이 지금껏 모든 것을 참은 건 혹시라도 김유정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거칠 게 없는 놈이 제 가이드 앞에서는 천적이라도 만난 듯 몸을 사렸다. 유순한 짐승처럼 한없이 몸을 낮추고, 제 성질을 죽여 가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이때, 하도경은 잊고 있었다.
지금 문제는 다른 길드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원래 난동은 원치 않아도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 * *
클리어 기념일까지 며칠 안 남은 시점이었다.
연우진은 기념일의 주역인 것과는 별개로 그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날은 그에게 있어 승리보단 추모에 가까운 날이었으며,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북적여서 그리 좋아하는 날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기념일만큼은 달랐다. 명분이 없으면 제 가이드의 얼굴조차 보기 힘든 그에게 이번 기념일은 다시 한번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그럴싸한 핑곗거리였다.
딸랑, 현관문에 달린 작은 종이 소리를 냈다.
그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버릇처럼 김유정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분명 계산대 앞에 설 때까지만 해도 할 말이 많았다. 우선 간단히 안부를 묻고, 기념일에 시간은 되는지, 혹시 디저트 말고도 좋아하는 음식은 있는지.
그러나 김유정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저도 모르게 입이 닫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평소와 달리 검은 눈동자엔 온기 하나 없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돌아온 대답에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질문들이 지워졌다.
마치 커다란 독사가 발밑부터 천천히 감아 올라오는 것처럼 발밑이 선뜩했다.
태연한 얼굴을 가장한 채 그는 반사적으로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뗐다.
“누나, 오늘은 언제 퇴근해요?”
“손님, ‘언제 퇴근해요’라는 메뉴는 저희 가게에 없는데요.”
“다음 주 클리어 기념일 때도 가게 열어요? 안 열면 저랑 놀아요.”
이런 식으로 조를 때 김유정은 곤란한 낯을 해도 대놓고 거절하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 김유정은 한쪽 눈썹을 설핏 찌푸릴 뿐 그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힐끗 그를 지나서 뒤쪽을 향했다.
“손님, 아직 정하지 못하셨다면 뒤에 분 먼저 주문 도와드려도 될까요?”
뭐지? 내가 뭘 실수한 거지?
불안함으로 저릿한 손끝을 애써 무시하며 그는 고개를 돌려 제 뒤에 선 여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김유정은 조금 전보다 더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님, 혹시 주문하실 의향이 없으시다면 비켜 주시겠습니까.”
“……왜, 자꾸 저를 손님이라고 불러요?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아요……. 거리감 느껴져서 싫어요. 예전처럼 이름으로 불러 줘요.”
평소와 다른 딱딱한 말투에 덜컥 겁이 났다.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 주던 호칭이 오늘 처음 본 사람을 대하듯 바뀌었다는 게 묘하게 서럽기도 했다.
짧게 이어진 침묵 뒤로 작게 한숨을 내쉰 김유정이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주연우 씨.”
살짝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김유정은 연우진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쉽게 자리를 내주지는 않으면서도 한 번 내주면 좀처럼 내치지 못하고 져 주었다.
항시 관심 없는 낯을 하고 있어도 주변에 아프고 약한 사람이 보이면 곧잘 시선을 주곤 했다.
음료 픽업과 동시에 돌아선 고개에 연우진은 본능적으로 김유정을 붙잡았다.
“누나, 오늘 정말 시간 안 돼요?”
“주연우 씨-.”
“저 많이 아파요…… 하급 에스퍼는 가이드를 마음대로 부르기가 힘들잖아요. 달리 도와줄 가이드도 없고, 저는 매칭률도 낮고…….”
그는 그녀의 연민에 기대 애원했다.
그러나 김유정의 반응은 평소와 달랐다. 헛숨을 작게 내뱉은 김유정이 픽업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에 담긴 감정은 비웃음보단 분노를 닮아 있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놀란 것도 잠시, 낮게 내리깐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봐요, 주연우 씨. 아, 아니지. 그 이름이 아니었죠? 그럼…… 이렇게 불러야 하나?”
그는 떨리는 눈으로 그런 김유정의 눈을 마주했다. 온기 한 점 담기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메시아 길드 마스터 연우진.”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제 본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