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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47화 (47/119)

S급 자영업자

47화

나중에야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살려 내면 감사와 찬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살려 내지 못하면 원망과 울분이 쏟아지기 일쑤였다.

물론 그곳에서 나쁜 기억만 있던 것은 아니지만, 고작 1년 만에 잊을 만큼 대수롭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 기억이 있었기에 다시 김유정이 되었을 때 난 내가 각성자가 아니길 바랐고, 이로운을 봤을 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힘을 가질수록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른다. 당연한 말인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희생을 강요하는 말이기도 하다.

힘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아이가 그런 책임을 져야 하는가? 힘을 가졌으니 두려움을 무시하고 사지로 들어가는 게 당연한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있기에 지금 이 세계가 비교적 평화롭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안다.

나는 이로운을 쳐다보았다.

지금이 스무 살. 듣기로는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는커녕 센터에서만 지냈다고 하니 그 또한 아주 어릴 때부터 에스퍼로서 살았으리라.

어릴 때부터 발현한 고등급 각성자 중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각성자 전용 학교에 가는 예도 있다고 하지만, 능력이 불안정한 경우엔 따로 훈련부터 받는다고.

“……?”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로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쿠키 상자를 통째로 내밀었다. 먹고 싶어서 쳐다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냐, 괜찮아. 너 먹어.”

나는 그런 이로운 손에 쿠키 하나를 더 쥐여 준 뒤 조용히 턱을 괴었다.

나는 이로운의 머리카락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머리는 풀어헤치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단정하게 땋아져 있었다. 매번 식사할 때마다 불편해 보여서 접촉이 가능해진 김에 내가 묶어 준 것이었다.

지금은 나뿐만이지만, 점점 나아져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닿을 수 있게 되면 좋을 텐데.

남들처럼 미용실에 가서 머리카락도 정리하고. 평범하게─.

빠르게 뻗어 나가던 생각은 평범이란 대목에서 멈췄다.

‘하지만 저 아이가 과연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날이 올까?’

이미 이 세계부터가 평범하지 않은데, S급 능력자인 저 애가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가만 내버려 둘까?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를 당시 백작가 녀석들에게 떠밀려 억지로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센터에서만 지내 와 세상 물정에 어두울 이 아이는 나중에 나보다도 더 많은 책임을 떠맡게 되는 게 아닐까.

오지랖이 아닐까 주저한 것도 잠시, 나는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로운아, 너는 강하지?”

그러자 멀뚱히 나를 쳐다보던 이로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차차 네게 무리한 걸 요청해 올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부담된다면 반드시 다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

때로는 그래도 된다.

“너를 위해 가끔은 모른 척해도 돼.”

내 말에 이로운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이로운이 입술을 달싹이다 끝내 닫았다.

분명 아직은 의미가 와닿지 않겠지.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스스로 깨우치는 날이 분명 올 것이다.

그날이 오면 부디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한동안 일이 바쁜 듯 조예나와 서윤호는 카페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늦은 시각에 조예나가 카페에 찾아왔다. 거의 문 닫을 때라 손님은 물론이고, 알바생인 강민지도 퇴근한 뒤였다.

그래서 나는 조예나 앞에 앉아 커피나 홀짝였다.

교육생 컨택란에서 내 이름을 발견하고 놀라 확인차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가이드인 것을 말해 주지 않은 탓에 서운함을 토로할 줄 알았는데, 조예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성자인 거 떠벌리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존중해요.”

웬만한 어른들보다 낫다. 조예나는 자신보다 서윤호가 먼저 알았다는 게 조금 짜증이 나는 것뿐이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뭔가 닮은 것 같고 시선이 가더라니. 그 사람과 같은 가이드라서 그랬던 건가…….”

“그 사람?”

“아, 어릴 때 알던 언니가 있는데 유정 언니를 보면 그 언니가 생각나서요.”

하긴 조예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다. 본래 성격이 초면의 사람에게 먼저 친근하게 굴거나 유한 편이 아닌데도 말이다.

내가 가이드라 은연중 친절했던 것일 수도 있고, 조예나 말대로 어릴 때 알던 사람과 닮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랑 많이 닮았어?”

“아뇨. 얼굴이나 성격이나 완전 반대에요. 유정 언니는 약간 고양이 같은데, 그 언니는 강아지 같은 느낌!”

그럼 가이드라는 것 빼고 닮은 점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요즘도 친하게 지내? 하고 가볍게 물었다. 그러자 조예나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앗, 아뇨. 오래전에 죽어서…….”

“아…….”

순식간에 분위기가 초상집이 되었다. 화타가 와도 이 분위기는 살리지 못할 것 같았다.

좋아하는 잼 쿠키라도 더 줄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우울해하던 조예나가 금세 밝아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맞다! 저희 길마가 언니한테 관심 있다고 저한테 좀 꼬셔 보래요.”

“네가 분명 이온 길드였지? 이온 길마라면…….”

“권시현 에스퍼, S급. 덧붙이자면 죽고 못 사시는 전담 가이드 분과 열애 중! 가끔 하는 말이 오글거리는 것만 빼면 무척 좋은 분이세요!”

조예나가 밝게 미소지었다.

고도의 돌려 까기인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에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온 길드라면 컨택 리스트에서 본 기억이 있다. 제시한 금액이 높은 길드들은 머릿속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죽고 못 사는 전담 가이드가 있으신 분이 왜 나를?”

“얼마만의 S급 가이드냐고 데려올 거라는데요. 그러니까 언니, 저한테만 말해 봐요! 원하는 계약 조건 있어요? 저랑 같은 길드 들어오시면 제가 잘해 드릴게요.”

“-야, 콩알. 너 같은 말단은 못 들어줘.”

그때 딸랑,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서윤호였다. 서윤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김유정 조건 진짜 이상하거든.”

“언니가 왜요? 이상한 건 서윤호 씨가 더 이상한데요.”

서윤호를 발견한 조예나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여느 때와 같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구경하던 나는 슬쩍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최근 들어 카페에 잘 안 오더니 왜 둘 다 오늘, 그것도 문 닫을 시간에 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둘 다 바쁜가 봐?”

내 물음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내 쪽을 향했다.

“게이트 수도 늘었고…… 아! 전부터 실종 사건 때문에 난리예요. 언니도 조심하세요! 요즘 피해자가 는 것 같더라고요.”

“더럽게 바빠. 그래서 오늘 잼 왕창 사 가려고 왔는데 남은 거 있냐?”

“아, 맞다. 언니 그러고 보니 T구역 게이트 생성물인 파란 장미 봤어요? 그거 경매에 걸렸던데, 엄청 예쁘더라고요.”

“잼 남았어? 강도 사건 때 보상으로 내 예약은 언제든지 우선시해 주기로 했잖아.”

“아니, 이 인간은 잼 못 먹고 죽은 귀신이 들렸나. 언니, 저는 쿠아 청으로 하나요. 언니가 만든 수제 청 피로 회복제로 최고예요!”

귀가 두 개라고 두 사람의 말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건 아닌데. 나는 더 길어지기 전에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말을 정리했다.

“우선…… 잼은 원하는 만큼 준비해 둘 테니까 나중에 가져가. 청은 지금 남아 있으니 바로 살 수 있어. 그리고…….”

빠르게 설명을 마친 뒤, 조예나를 향해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려 보였다.

“파란 장미도 당연히 봤지. 엄청 예쁘던데? 안 그래도 전에 민지랑 서로 갖고 싶다고 떠들었어.”

물론 예뻐서 그런 것보단 저걸 팔면 돈이 얼마냐는 생각이 더 컸다.

“아니, 그런 쓸모도 없는 게 왜 갖고 싶은데?”

서윤호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예나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야 예쁘니까 그렇죠. 미적 감각도 없는 서윤호 씨가 뭘 알겠어요? 맞다, 언니도 하나 만들어 드릴까요? 제가 빚이 있어서 사 드리진 못하지만 나중에 연습해서 만들어 드릴 순 있어요!”

맞다, 조예나의 능력은 식물 조종이라고 했지.

식물을 따로 만들어 낼 수도 있냐고 물으니 어렵긴 해도 간단한 생성이나, 급속 성장도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언니는 꽃집 운영도 하셨으니 아마 단번에 알아볼 거예요! 일반 장미랑은 다른 느낌이 들거든요.”

“……그럴까.”

차마 전에 꽃집 사업을 한 사람이 장미와 라넌큘러스도 구분 못 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실제 나는 먹을 수도 없는 꽃보다는 먹을 걸 살 수 있는 돈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호의로 반짝이는 눈을 피해 시선을 멀리 두었다.

* * *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는 꽃 이야기를 한 다음 날, 아침.

나는 꽃을 받았다.

“좋아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한 주연우의 손에는 큼지막한 파란 꽃 세 송이가 들려 있었다.

안쪽은 짙은 푸른색이었고, 밖으로 갈수록 색이 옅어졌는데 마치 바닷가를 보는 듯했다.

겹꽃잎 때문인지 수가 많지 않음에도 꽃다발은 화려하고 가득 찬 느낌이 들었다.

“……장미?”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건, 식물에 조예가 없는 나도 이름을 알고 있는 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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