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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자영업자 25화 (25/119)

S급 자영업자

25화

거부감과 호의. 찰나, 천칭이 기울어진 것은 후자였다.

당연했다. 평생 시달려 온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은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기적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껏 그 어떤 가이드들이나 가이딩제도 그에게 고통만 주었지, 이런 안온감을 선사하진 않았다.

질끈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 올라간 눈꼬리는 조금 사납게도 보였다. 눈에 띄게 화려한 외모가 아닌데도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쿠폰 만들어 달라고 하셨죠? 잃어버리기 쉬우실 테니 카페에 보관해 드릴게요. 그러려면 쿠폰에 적어야 해서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녀의 시선이 향하자 그는 원하는 선물을 얻어 들뜬 아이처럼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저는 연우-.”

[국민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길드 ‘메시아’가 A급 상위 게이트 클리어 세계 최단 기록을 성취해 냈습니다!!]

그의 말을 삼킨 것은 텔레비전에서 나온 목소리였다.

대화가 끊긴 것에 짜증을 느끼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그는 화면에 뜬 저번 게이트 클리어 소식을 지루한 얼굴로 응시했다.

단조로웠던 표정이 자취를 감춘 것은 제 앞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로 인해서였다.

“연우진 X발놈…… 눈에 띄기만 해 봐라.”

살벌하게 이 가는 소리와 함께 이어진 목소리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연우예요. 주연우요.”

머리를 거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입이 움직였다.

* * *

연우진은 카페를 제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집 근처라 이용했던 것과는 이제 의미가 달라졌다.

딸랑, 작은 종소리가 들리고, 제일 먼저 찾는 것은 김유정이라는 이름의 직원이다.

첫 만남부터 딱딱하긴 했지만, 조금씩 대화도 늘고 하여 연우진은 마냥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던 게 바로 얼마 전이었다.

최근 눈에 띄게 그녀가 그를 피해 다니기 시작한 것 때문에 도통 못마땅한 심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럴 리가. 이 이상 미움을 살까 뭐 하나 섣불리 하지 못하는데.

뚱한 표정으로 게이트 앞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연우진에게 누군가가 비꼬는 게 역력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이야…… 귀한 나머지 얼굴 보기가 그렇게 힘들다던 메시아 길마 아니야? 네가 이런 데 다 오고 웬일?”

회색 단발머리를 반묶음 한 여자였다. 안 본 사이 피어싱이 늘었는지 오른쪽 귀 전체가 보석으로 메꿔져 있었다.

설대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담뱃대를 꼬나물며 여자가 물었다.

“죽을 때 됐어?”

연우진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로 서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너야말로 내 손에 먼저 뒤지려고?”

그 대답에 여자가 사나운 미소를 그려 냈다.

그녀의 이름은 ‘권시현’.

연우진, 하도경과는 대격변 때의 동기이며 연우진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 다섯밖에 없는 S급 중 하나이자, 이온 길드의 길드 마스터였다.

두 S급이 사나운 기를 방출하자, 분위기가 오싹하게 가라앉았다. 몸을 잘게 떠는 길드원들의 모습에 결국 하도경은 자진하여 고래 싸움에 낀 새우가 되기로 했다.

“와, 권시현 너야말로 상부 부름에는 안 오더니 웬일이냐?”

“유능한 신입이 들어왔거든. 에스퍼로서 발현된 건 얼마 안 됐는데, 재능이 충만해 보여서 구경시켜 줄 겸 데려옴. 저 새끼랑은 다르게 어찌나 귀여운지.”

권시현 뒤에서 여자아이 한 명이 빼꼼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키가 180에 가까운 권시현 옆이라 그런지 유달리 작아 보였는데, 아직 학생인 듯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냐.”

하도경은 허허롭게 미소 지었다.

권시현도 정상은 아니다. 어떤 미친놈이 제 길드 신입을 대형 게이트에 데려오는데.

물론 게이트의 위험도 측정 등급은 중급에 가깝다고 해도, 보통 각성자가 되고 얼마 안 된 신입을 초장부터 데려오는 경우는 잘 없었다.

하도경은 길드 마스터라는 놈들은 다 이런 건가 싶어 탄식했다.

애초에 길드 명을 짓는 것부터가 남달랐다.

권시현의 경우 이온 음료를 마시던 도중 지은 거였고, 연우진은 대격변 이후 길드 명을 정해야 한다는 말에 대충 댓글 창에서 3번째 댓글에서 나온 단어를 쓰라고 했다.

3번째 댓글은 최상급 게이트 클리어한 어린 구원자들을 찬양하는 글이었고, 그렇게 길드 명은 ‘메시아’가 되었다.

하도경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아래 댓글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4번째 댓글은 ‘김치볶음밥 먹다가 뿜었다.’였는데, 하마터면 ‘김치볶음밥’이 길드 명이 될 뻔했기 때문이다.

하도경의 마음이 어떠하든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권시현과 연우진. 둘 다 남에게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다 보니 마찰이 잦긴 했지만,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시간이 있었기에 서로 아는 척해 줄 정도의 사이는 되었던 것이다.

권시현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 쪽은 그 새끼들 두고 볼 거야?”

“그 새끼들?”

“‘에러’. 요 2년 사이 급부상한 길드 말이야. 처음엔 웬 관종들인가 하고 그냥 넘겼는데, 요즘 보니 더러운 짓거리 하고 있더라.”

“내 알 바 아니지.”

“네가 그럼 그렇지. 나도 하도경한테 물어본 거임. 하도경이 메시아 찐 길마인 거 누가 모른다고.”

“진짜 은퇴할까…….”

하도경은 한탄하듯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곧이어 게이트가 열리고, 던전이 펼쳐졌다.

쿵.

퀴퀴하고 버석한 지하 도시였다.

신화 속 미노타우르스의 미궁을 토대로 한 듯한 미궁이었다. 해당 던전의 근간인 암석 바닥이 합쳐져 소의 얼굴을 한 이계의 괴물을 형성했다.

바닥에서 끊임없이 빠져나오는 마물들은 무너지면 다시금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여러모로 기괴하기 그지없는 던전이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무려 S급이 둘이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이온 길드의 신입을 제하면 나머지 역시 상급 에스퍼였고 말이다.

‘저 둘이 올 줄 알았으면 데려오지 말걸.’

인력 낭비가 따로 없다. 하도경이 후회하고 있는데, 신입이 움직일 수 있게 연기로 공간을 나눠 준 권시현이 하도경 쪽으로 다가오더니 물었다.

“그런데 쟤 진짜 왜 옴? 연우진이 이 정도 게이트에 올 놈은 아니잖아. 또 변덕?”

“글쎄, 자기 집 근처라는 소리 듣고 오던데.”

“맞는 가이드는 찾음? 아니면 여전히 시한폭탄 상태?”

“네가 웬일로 연우진을 다 걱정하냐.”

“왜긴. 최악의 경우 옹기종기 모여 폭탄 처리를 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

담뱃대를 꼬나문 권시현의 입에서 뿌연 연기가 새어 나왔다.

처리. 폭주한 에스퍼를 사살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공적인 단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하도경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연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그 모습에 낄낄대며 웃던 권시현이 말했다.

“너 부길마잖아. 저 자식 좀 어떻게 해 봐. 나도 아는 사람 처리하는 건 별로 달갑지 않거든. 내 명 재촉하고 싶지도 않고.”

권시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싫든 말든 대격변을 함께 겪은 이였다. 그녀는 연우진을 인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지만, 그의 강함은 신용했다.

제 말에 하도경이 머리카락을 쥐어뜯든 말든 할 말을 마친 권시현은 다시 신입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였다. 그녀가 자리를 옮김과 동시에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연우진이 권시현의 옆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너 전담 가이드 있었지?”

“허…… 연또 새끼가 내 설탕 과자에 관심을 보여? 야, 너 진짜 죽을 때 됨? 그럼 마음 준비라도 하게 미리 알려 달라니까?”

“개소리 그만 지껄이고. 그래서 그 가이드 어떻게 꾀었는데? 머리가 있는 이상 제 발로 너한테 가는 미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니, 그게 왜 미친 짓임? 미친놈은 너지 이 사이코패스야.”

짜증도 잠시, 권시현은 연우진이 한 질문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고는 경악했다.

“……야, 진짜 미침? 너 연우진 아니지?”

가이드를 일회용 충전기 정도로 생각하던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에 권시현은 미친놈이 한 층 더 미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 * *

그러지 않아도 망가져 있던 몸을 이끌고 무리한 탓인지, 몸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알약 형태로 된 가이딩제를 과다 복용해 봐도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곁에서는 하도경이 가이드들을 들이밀며 자꾸 귀찮게 굴었다.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오밤중에 능력까지 써서 이동을 했는데, 평소와 달리 제어가 되지 않았는지 난데없이 길거리에 떨어진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던 연우진은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그동안 멋대로 굴지 않고 잘 참아 낸 것에 대한 선물이기라도 한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집 거실에 김유정이 있었다.

‘정신없이 아팠다가 갑자기 편해졌던 것 같긴 한데…….’

깨어난 그의 손목은 케이블로 단단히 묶여 있었고, 이마에는 젖은 수건이 올려져 있었다.

반쯤 마른 물수건을 바라보다 집에 낯익은 이의 기척이 느껴져서 거실로 나가 보니 며칠 동안 그를 피해 다니던 김유정이 소파에 누워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옷을 입은 채로, 자신의 코트를 덮고.

지금껏 동화에나 나올법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믿어 본 적은 없지만, 이 순간만큼은 산타에게 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착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크리스마스도 지났고.’

무심결에 입가를 가리려다, 묶여 있는 두 손에 멈칫했다.

손이 없어도 케이블 선을 끊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지만, 이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된 이상 그럴 생각은 없었다.

혹시 경계라도 살까, 그는 얌전히 자신의 두 손을 모은 채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작은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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