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급 자영업자
10화
친아빠의 외도로 싱글 맘이 된 엄마는 난데없이 생계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위자료랍시고 돈을 받긴 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졸에 그간 집안일만 하느라 단출한 경력조차 없었던 그녀에게 사회는 자비롭지 않았다.
혼자서 나를 키우는 동안 엄마는 많은 고생을 했고, 그 탓인지 엄마는 내게 공부 열심히 하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너 대학만은 보낼 거라며 시도 때도 없이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 말을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나에게도 대학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아니, 공부고 뭐고 딸이 그런 일을 겪고 기억도 온전치 않아서 온종일 울기만 하는데 어떻게 대학을 보내니. 억지로 보냈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라고.」
「……그래서, 안 보낸 거야?」
「그래. 뒤늦게 내 욕심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 예전과 다르게 너도 잘 웃게 되고, 바쁜 와중에 엄마 돕겠다고 유하도 돌봐 주고. 행복하기만 하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기로 했지.」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얼굴은 지난날과 달리 미련 한 점 없이 깨끗했다.
열일곱. 그곳에 멈춰져 있는 건 오로지 내 시간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1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이런 식으로 이전 세계의 일을 꿈으로 꾸곤 했다.
“괜찮아요?”
문득, 내 위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헉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잘생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연우 씨?”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탓에 나는 아직 피로한 눈을 깜빡이며 환자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흙이 묻은 그의 상의를 잡아당기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왔다.
어느 정도 손이 닿을 높이가 되자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은 내려갔고, 안색도 괜찮아 보이네.
그대로 머리를 꾹 누르고 머리카락을 헤집어 두피도 확인했다.
피가 멎은 것은 물론, 하룻밤 사이 아물기라도 한 것처럼 상처 표면이 매끈해져 있었다.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나는 다시금 흙과 빗물로 얼룩진 그의 상의로 시선을 옮기며 타박하듯 말했다.
“아니, 일어났으면 옷부터 갈아입었어야지. 왜 안 갈아입었어요? 감기 기운은 떨어진 것 같아도 다 나을 때까지는 안심하면 안 돼요. 방이 따뜻해서 옷이 마른 것 같긴 해도 위생 문제가…….”
아, 그런데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지? 어제 비를 맞아서 그런가? 그런데 내가 비를 왜 맞았더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가 다소곳하게 모아진 자신의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눈꼬리를 접어 미소 지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손을 쓸 수가 없어서요.”
“미…….”
“혹시 이런 게 취향이에요?”
“미친…….”
눈부신 아침 햇살이 단단히 묶인 그의 손목을 비추자, 전날 밤의 기억이 파도처럼 머릿속을 휩쓸었다.
튼튼해서 묶기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줄은 늘 가지고 다니는 충전 케이블이었고, 이불 대신 덮고 잔 그의 코트는 내 발과 옷에 묻어 있던 빗물과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 * *
한세영과 양현우의 첫 만남은 길거리에 쓰러진 양현우를 한세영이 자기 집으로 데려간 것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한세영에게 경계 좀 하고 살라고 타박했었는데, 지금 보니 내가 뭐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더하면 더했을 거다.
적어도 두 사람의 장르는 로맨스이기라도 했지 내 경우 생존 범죄 은폐였으니까.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씻으라는 종용에 얼떨결에 샤워까지 마쳤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에 건네받은 쇼핑백 안에는 낯선 외국어 태그가 달린 새 옷이 들어 있었다.
빗물로 엉망이 된 옷을 또 입는 것도 찝찝해서 그걸로 갈아입고 나오니 음식 냄새가 솔솔 났다.
몸에서 나는 청량한 향과 따스한 실내 온기,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재질의 옷.
저절로 나른해지는 분위기에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는 것도 잠시, 손을 들어 뺨을 내리쳤다.
‘돌아와라. 현실 감각!’
긴 시간 비정상적인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 보니, 내겐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는 안전 불감증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다.
그래서 더 남들처럼 상식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렇게 무너질 줄이야!
“배 안 고파요? 혹시 전복죽 같은 거 먹어요? 해산물 못 먹는 건 아니죠?”
이게 다 저 사람 때문에 그렇다.
밤새 앓다가 깨니 집에 낯선 여자가 잠들어 있지를 않나, 집안 꼴은 개판이 된 데다 양 손목은 웬만한 전문가 뺨치는 솜씨로 결박되어 있기까지.
솔직히 이런 상황이면 내가 아니라 저쪽이 더 놀라야 하지 않나? 왜 저렇게 태연한 건데.
“어…… 괜찮긴 한데.”
“다행이다. 어디 아픈 데는요?”
“아뇨, 저보다는-.”
그쪽이야말로 뇌 검사 안 받아 봐도 되겠어요?
어제 제가 본의 아니게 그쪽 뚝배기를 깼는데 벽돌보다 단단한 제 폰에 금이 갔더라고요.
지금이라도 참회할까 망설이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제 또 다친 곳은 없죠? 다리에 상처가 있어서 급한 대로 치료하긴 했는데, 더 다친 곳 있으면 알려 주세요.”
“다리요?”
그러고 보니 샤워하는 동안 아픔을 못 느꼈다. 어제 꽤 심하게 찢어졌으니 물에 닿았을 때 따가움을 느꼈어야 했는데.
“……어? 상처가 없잖아?”
오른쪽 무릎 아래 길게 났던 상처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상처 났던 데가 여기가 아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대쪽 다리를 확인하고 있으니 주연우가 말했다.
“아는 치료계 에스퍼가 있어서 주무시는 동안 불러서 치료했어요. 혹시 상처가 남은 건 아니죠?”
“네, 깨끗하네요.”
“달리 아픈 곳은요? 가이딩 때문에 열나거나 숨쉬기 힘들거나 그렇진 않아요? 조금이라도 아픈 곳 있으면 바로 알려 주세요.”
쏟아지는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처가 있었던 부분을 매만졌다.
이곳에 와서 힐러의 힘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흉터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감탄도 잠시, 나는 곧 깨달음을 얻었다.
아, 힐러를 불러서 머리의 상처도 치료했던 거구나. 어쩐지 다친 거에 비해 너무 빨리 아물었다 했다.
납득이 간 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따뜻할 때 드세요.”
먹음직스러운 전복죽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밤새 앓았던 사람은 그인데, 어째 환자라도 된 듯 도리어 정중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나였다.
‘구해 준 답례인가……?’
어제 오후 5시에 먹은 것이 마지막이라 허기지긴 하는데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 주는 거라 망설여졌다.
이미 그런 거 따지기엔 멀리 와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니야, 그래도…… 아, 배고파서 토할 것 같다.
결국 수저를 들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하지 않던가.
“우웁!”
수저를 입으로 옮기자마자 나는 해일처럼 몰려드는 맛에 입을 틀어막았다.
짠맛, 단맛, 쓴맛, 신맛. 이 네 가지가 동시에 느껴지는 혁명적인 맛이었다.
대체 죽에 무슨 짓을 한 거지? 전복죽 ‘같은’ 거 먹냐고 묻더니, 정말 죽이 아니라 ‘죽과 유사한 형상을 한 무언가’를 먹겠느냐고 물어본 건가?
내가 싱크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하자 주연우가 살짝 눈썹을 늘어뜨렸다.
“맛없었어요?”
“……뭐, 뭐 넣었어요.”
구역질까지 한 마당에 괜찮다는 예의상의 빈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러 차례 입을 헹군 뒤 진지하게 묻자, 주연우가 재료를 되새겼다.
“우선 엘릭서-.”
“잠깐.”
처음부터 모르는 재료가 나왔다.
헤르만 제국에서 엘릭서는 과장 섞어 불로불사약을 만들 수 있다고 전해지는 고급 재료였다.
여긴 또 다른가 고민하고 있으니 그가 덧붙이듯 말했다.
“체력에 좋아요.”
대수롭지 않게 한약 재료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소개하는 재료들도 하나같이 처음 들어 보는 재료인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조용히 경청하다 말고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왜…… 소금이 없죠?”
조미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일반적인 전복죽에 들어갈 법한 재료는 오직 전복과 쌀이 전부였다.
그가 서둘러 변명했다.
“건강하게 만들려고 그랬어요. 소금은 짜니까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제가 넣은 게 다 몸에 좋은 거긴 하거든요. 너무 마르신 것 같아서 걱정되어서 넣은 건데 설마 맛이 없을 줄은 몰랐어요. 좋은 거에 좋은 거를 더하면 당연히 맛있을 줄 알고.”
“요리 중에 맛 안 봤어요?”
“봐야 하는 건가요?”
“당연히 봐야죠. 혹시 요리 처음 해 보세요?”
“네. 누구에게 해 줄 일도 없고, 집에서 해 먹지도 않아서요. 그래도 다음에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저 몸으로 하는 건 빨리 배우거든요.”
저런 걸 또 먹으라고? 고문인가…….
그 전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날 일도 없을 텐데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그가 다음을 기약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황당한 마음에 지그시 쳐다보니 그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못 드시겠으면 이리 주세요. 버릴게요.”
“아니, 멀쩡……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먹는 건데 음식을 왜 버려요? 혹시 사탕이나 초콜릿 있으면 그거나 주세요.”
보니까 힘들게 만든 것 같은데 버린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요리해 준 게 오랜만이기도 하고, 더구나 한약 재료 같은 거면 나름 고급 식자재들을 사용한 게 아닌가?
다행히 내 몫은 작은 그릇에 담긴 게 전부였다. 나는 그것들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다 말고 의심이 들어 재차 물었다.
“이거 진짜 먹을 수 있는 거로 만든 거 맞죠?”
“……네.”
대답이 늦다. 힐끗 눈을 굴리니 주연우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