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 * *
-good morning~!
나는 지긋지긋한 알람을 당장 꺼버린 뒤,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8살에 선택한 조그마한 방은 어느덧 10년이 흘러 18살이 되어서도 여전히 사용 중이었다.
그나마 바뀐 거라면 자라난 키에 맞춰 바꾼 침대와 책상, 의자 정도?
드르륵!
이 방의 좋은 점은 1층 구석에 처박혀 있어 창을 열면 적막한 아침을 만끽할 수 있다는 거였다.
숨을 들이마시자 겨울의 잔상이 남은 이른 봄의 정원이 뿜어내는 향이 폐부 깊숙하게 밀려들었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집구석에서 유일하게 고요한 순간이었다.
지잉!
진동 소리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대 위를 더듬어 핸드폰을 집었다.
세상은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렇게 많은 게 바뀔 동안 한가지 변하지 않은 점이 있다면 바로 성좌들의 존재였다.
[발신자: 제발 그만해]
[알람 소리 좀 바꿔 진짜 듣기 싫어ㅠ]
지잉!
[발신자: 나만 아니면 돼]
[스트레스받아서 눈 잘 떠지기는 하겠다]
“듣기 좋은 음악을 알람 소리로 설정했다가는 영원히 그 노래를 못 듣게 된다고. 그건 싫어.”
지잉!
[발신자: 프로훈수러]
[평소에 노래 즐겨 듣지도 않으면서; 그냥 설정하기 귀찮은 거잖아]
“어쨌든.”
나는 어느덧 익숙해진 미지의 존재들과 대화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칫솔을 입에 물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올 만큼 길게 자랐다.
회귀 전에는 감고 말리는 게 귀찮아서 늘 어깨선에서 잘라버렸던 것 같은데.
‘하지만 이제는 뭔가 긴 머리가 더 익숙한 느낌이야.’
더 안정감이 느껴진달까?
“그러고 보면 기억이랑 외모가 조금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원래도 바깥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서 흰 피부는 더욱 뽀얘졌다.
눈동자도 그냥 평범한 갈색이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수록 잿빛이 감돌더니 이제는 꽤나 선명한 회색빛이 되었다.
덕분에 컬러렌즈를 꼈냐는 오해를 숱하게 받아야 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지금보단 훨씬 수수한 인상이었던 것 같은데. 묘하게 화려한 느낌이 생겼단 말이야.
‘기분 탓이겠지.’
씻고, 젖은 머리를 말리고, 벽걸이에 걸어둔 짙은 회색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주방 쪽으로 향하자 이모님이 날 힐끗 보았다.
“빵 구워놨으니까 먹고 가.”
살갑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집에서 날 가장 살뜰하게 챙겨주시는 분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토스트 한 조각을 집어 드는데 2층에서 우미가 소란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머리 망했잖아아아!”
나와 이모님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또 시작이네.”
나는 대꾸 없이 피식 웃은 뒤 토스트를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가.
“아.”
되돌아가 토스트를 한 장 더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하나는 내 입에 쏙 집어넣은 뒤 자전거를 끌고 정문으로 나가자 담장 너머로 핀 목련을 가만히 쳐다보는 오즈월드가 보였다.
“어이.”
내 부름에 오즈월드가 고개를 돌렸다.
자전거 핸들을 쥐고서 회색 교복 차림을 한 오즈월드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붙어 지낸 지 9년째인데도 저 지독하게 화려한 외모는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아니, 날이 갈수록 새롭게 잘생겨져서 놀랍기만 했다.
“이거.”
나는 한 장 더 챙겨온 토스트를 그에게 내밀었다.
오즈월드는 손으로 받지 않고 굳이 입을 벌려 모서리를 콱 물었다.
“네 손으로 들고 먹어.”
“맛있다.”
“네가 들고 먹으라니까?”
그는 얄밉게 웃으며 고개 숙이더니 또 귀퉁이만 베어먹고 얌체처럼 허리를 폈다.
이 녀석은 내가 본인 하인인 줄 아는가 보다.
“입에 쑤셔 넣는다?”
협박 아닌 협박에 오즈월드는 그제야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한순간 내 손을 완전히 감싸는데, 괜히 의식되는 바람에 미간을 콱 찡그렸다.
“빨리 가자.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 입은 거 걸리기 전에 교문 통과해야 돼.”
“이제 그냥 차 타고 등교하자니까.”
“됐어. 너희 집 차 너무 튀어서 부담스러워.”
한창 의미 없는 수다를 떨고 있는데, 차고 문이 열리며 새까만 세단이 매끄럽게 등장하다가 우뚝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더니 우미가 과할 정도로 컬을 많이 넣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상반신을 쑥 내밀었다.
“오빠!”
우미는 오즈월드를 몹시 반기며 손을 흔들다가 곁에 선 날 보고는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오즈월드는 안장에 올라타 페달에 발을 올렸다.
“가자.”
우미의 존재는 인지하지도 못한 사람 같은 태도였다.
“인사하잖아.”
인사를 받아주라고 눈치를 주자, 오즈월드는 불만스럽게 미간을 좁혔다.
“난 쟤 싫어.”
싫다는 사람한테 억지로 인사를 시킬 순 없지만, 이러면 내가 들볶인다고.
‘하여간 얘랑 엮여서 편한 날이 없어.’
학교는 학교대로, 집은 집대로 오즈월드의 단짝이라는 이유로 사방에서 쪼아대니 나만 괴로운 관계였다.
“넌 진짜 밉상이야. 알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전거를 탔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얼른 도망치는 게 나았다.
‘우미가 사립고에 가서 다행이지.’
혹시 오즈월드를 쫓아 내가 다니는 학교까지 따라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회색 교복이 구리다는 이유로 우리 학교는 기각되었다.
본인 퍼스널 컬러에 맞지 않는다고 했었나.
오즈월드는 금방 날 따라잡아 나란히 자전거를 몰았다.
“이제는 적응했잖아.”
“그래도 본인이 밉상인 건 아는 모양이네?”
“네가 자꾸 날 구박하니까.”
구박하기는 누가 구박했다고.
상당히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저 성질머리 때문에 눈치 본 날이 자그마치 9년이었다.
얘랑 싸우면 온종일 재수가 없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재수 없는 일들이 마구 일어났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오즈월드와 싸우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하나 오즈월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넌 너무 까다로워서 맞추기 어려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황당하고 어이없는 푸념에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지금 누가 할 소리를 하는 거야? 진짜 까탈스러운 건 너거든? 난 무던한 쪽이야.”
“글쎄.”
우리는 일상이 된 사소한 말다툼을 이어 나가며 학교에 도착했다.
자전거를 나란히 세워두고 같은 반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오늘도 우리가 제일 먼저 반에 도착한 학생들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벌써 9년째 같은 반이잖아. 확률상 그럴 수가 없을 텐데 이상해. 그렇지 않아?”
“이것도 이상해?”
오즈월드는 맥락에 맞지 않는 묘한 대꾸를 하며 픽 웃었다.
“거봐. 넌 까다롭다니까.”
“갑자기 그게 왜 이렇게 이어져?”
가만 보면 오즈월드는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할 때는 꼭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처럼 눈빛이나 태도가 묘하게 거만해졌다.
정확하게는 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여긴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9년째 같은 반이었던 것처럼 자리도 항상 붙어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오즈월드가 한국에 연고가 없는 외국인이니까 가장 친한 친구인 나와 일부러 붙여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쭉 이어지는 건 확실히 이상한 게 맞지 않나?
‘설마 얘가 나랑 붙어있으려고 돈이라도 쓴 건가.’
홀튼가는 새아버지가 친해지고 싶어서 몹시 안달을 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벌이라고 했다.
“그런 집안에서 대체 왜 아들을 한국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네.”
새아버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날 힐끗 쳐다보았었다.
그러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는 듯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설마. 그럴 리 없지.”라고 혼잣말했다.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왠지 새아버지‘도’ 오즈월드가 나 때문에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한 듯했다.
실은, 나도 그렇게 의심 중이기 때문이다.
“너 진짜 한국에서 대학 갈 거야?”
오즈월드는 전교 1등을 놓쳐본 적 없었다. 모의고사에서도 항상 상위 1% 안에 들었다.
이렇게 머리가 좋으면서 대체 왜 한국에 머물러 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 데나 가지 뭐. 대학 같은 건 안 가도 상관없고.”
얘가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건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너 연예인 할 생각이야?”
오즈월드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전혀 아니야.”
내가 가자미눈으로 추궁하듯 주시하는데도 오즈월드는 “아니라니까.”라며 턱을 괸 자세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누군들 눈을 마주친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얼굴이 너무 가까워져서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러는 너는 어디 대학으로 진학하려고?”
그 말에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이대로 집안의 원조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최상위 대학에 원서를 넣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 회귀 전처럼 모든 게 틀어져서 그 집구석을 뛰쳐나오게 된다면. 전액 장학금을 받을 만한 학교로 가는 게 최선이리라.
‘회귀 전에는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하게 돼서 학비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으니까.’
하루에 과외만 여러 개를 뛰었다.
종종 고수익 단발성 아르바이트까지 겸하느라 코피가 흐르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몇 번 쓰러진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하니 몸이 축나는 건 당연지사였다.
“일단 올해 모의고사 성적 보고 천천히 생각해보려고.”
그런 적당한 대답으로 대충 넘어가는데, 교실 문이 열리며 박하민이 들어왔다.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던, 내 유일한 여자친구였다.
“하이. 오늘도 일찍 왔네? 나 매점 갈 건데 같이 갈 채지우 구함.”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민은 예의상 오즈월드에게도 물었다.
“너도 갈래?”
오즈월드는 미소조차 없는 얼굴로 고개 저었다. 하민이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팔을 잡아끌었다.
오즈월드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 지우야.”
쟤는 꼭 내가 다른 애들이랑 있을 때 말투가 유독 간지러워졌다.
나는 하민이랑 둘이서만 매점으로 향했다.
하민이는 눈을 샐쭉하게 떴다.
“너희는 참 질리지도 않고 붙어 다닌다? 진짜 사귀는 사이 아니야?”
이것도 매년 듣는 말이라 지긋지긋했다.
“소꿉친구라니까.”
“대체 어떤 소꿉친구가 그래? 너랑 이야기할 때마다 내가 오즈월드 눈치를 얼마나 보는 줄 알아?”
“왜?”
“왜기는 왜야! 걔는 네가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거 겁나 싫어하잖아.”
오즈월드는 언제부터인가 나 이외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오즈월드하고만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사실이 종종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기에, 오즈월드를 제외하고서 처음으로 생긴 친구인 박하민은 내게 소중한 존재였다.
>>계속...... *** ㅎㅁ * 쉼터 ** 14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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