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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76화 (276/277)
  • 276화

    터덜터덜.

    빗길에 자전거를 타는 위험한 행동 대신 그냥 내리는 비를 죄다 맞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걸어서 20분이나 걸리는 거리였지만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CCTV로 날 확인한 고용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어머. 전화하지, 지우야.”

    고용인 아주머니가 놀란 눈으로 수건을 가져와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젖은 몸을 대충 닦으며 라운지를 가로지르는데 날카로운 고함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가 안 그랬다니까?!”

    고개를 돌려 확인해보니 우미와 보현이 싸우고 있었다.

    둘은 원래 사이좋은 남매가 아니었다.

    저렇게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는 게 낯선 장면이 아니었던지라 그냥 지나치려는데, 우미가 갑자기 날 가리켰다.

    “내가 아니라 쟤가 그랬어, 이 멍청아! 생사람 잡고 난리야.”

    그 말에 보현이 잔뜩 화가 난 눈으로 날 휙 노려보았다.

    “너야? 네가 메트로놈 부쉈어?”

    “아니.”

    비를 흠뻑 맞으며 자전거를 끌고 와서인지 심신이 지쳐 의도보다 더 냉정하게 대답해버렸다.

    우미는 보현이 피아노에 관련해서는 미친개처럼 발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얼른 소리 질렀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고장 내는 거 봤는데!”

    “언제?”

    “어, 어젯밤에!”

    “증거는 있고?”

    회귀 전에는 착하고 다정한 언니처럼 행동하려고 어색하게 뚝딱뚝딱 굴었었다.

    그럴수록 저 애들에게 더 우스워 보인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사실 나는 무표정한 얼굴이 익숙했다.

    감정하나 싣지 않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대화하는 게 편했다.

    “우미, 너 보현이가 없을 때마다 거실 피아노치고 놀잖아.”

    “내가 언제 그랬어?!”

    자기 피아노를 건드리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보현의 눈이 뒤집혔다.

    “야, 채우미. 미쳤냐?”

    “나 아니라고 했지! 죽을래?”

    보현은 손에 든 망가진 메트로놈을 우미에게 집어 던졌다.

    “악!”

    나무로 된 메트로놈에 맞은 우미가 집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렸다.

    때마침 외출을 다녀온 엄마가 놀란 눈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니? 우미야, 왜 울어? 누가 그랬어?”

    “내가, 내가 메트로놈 안 부쉈는데 채보현이, 흐어어엉!”

    보현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전히 씨근거리며 당장 우미를 향해 달려들 듯이 말했다.

    “채우미가 내 메트로놈 부쉈어! 나 이거 없으면 연습 못 한다고!”

    엄마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우미를 달래며 보현에게 당장 여분의 메트로놈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 보현은 그 정도로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우미에게 사과하라며 사납게 몰아세웠다.

    “우미야, 보현이한테 미안하다고 해야지.”

    “내가 안 부쉈어! 내가 안 부쉈다고! 저 언니가 부쉈는데 왜 내가 사과해야 돼?!”

    채우미는 항상 자기 잘못을 내게 뒤집어씌우는 버릇이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흐릿했는데 이제 알겠다.

    처음부터였구나.

    엄마는 대번에 눈을 뾰족하게 뜨며 날 노려보았다.

    “지우야, 네가 그랬니?”

    “아니요.”

    “사실대로 대답해. 네가 그랬니? 솔직하게 말하면 용서할 거야. 그런데 거짓말하면 더 크게 혼나.”

    아……. 생각해보니 이런 일이 회귀 전에도 있었다.

    그때도 엄마는 저렇게 말했다.

    나는 억울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명하다가 꼴도 보기 싫다는 엄마의 말에 그대로 방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때는 우미의 말만 믿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엄마도 제가 아니라 우미가 그런 거 알고 있죠?”

    “……뭐?”

    이제는 엄마가 왜 저러는지 이해되었다.

    엄마는 우미와 보현이에게 잘 보여야 했다.

    그래서 날 샌드백으로 삼으려는 거였다.

    그래도 괜찮은 애니까.

    내 보호자라고는 엄마밖에 없었으니까.

    “제 잘못으로 뒤집어씌워서 편하게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거잖아요.”

    “채지우!”

    엄마는 버럭 소리 지르며 우미도 팽개치고 날 향해 성큼성큼 다가와 팔뚝을 때렸다.

    “누가 그따위로 말하래! 너 엄마가 우습니? 어디서 못된 물이 들어서 함부로 지껄여!”

    나는 그대로 질질 끌려가 고용인들이 다니는 뒷문으로 내쫓겼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와중에도 새아버지나 동네 사람들이 볼까 봐 으슥한 곳으로 내쫓은 게 정말이지 엄마다웠다.

    엄마는 날 원수처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반성할 때까지 들어올 생각하지 마.”

    쿵!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냥 엄마가 원하는 대로 내 잘못이오, 라고 말하고 넘어갔어야 했나?

    아니. 그러면 이후가 더 피곤해질 것이다.

    우미는 거리낌 없이 뭐든 내게 뒤집어씌울 것이고, 보현은 뒤늦게 내 짓이 아님을 깨달아도 결국 해오던 대로 내게 화풀이할 테지.

    이미 다 겪어본 일이었다.

    그러니 잘한 거다.

    이 또한 잘 선택한 것이다.

    “비만 안 왔어도 괜찮았는데….”

    한숨 섞인 목소리가 하얀 입김을 동반해 튀어나왔다.

    유달리 날씨가 싸늘했다.

    머리 위로 튀어나온 문틀 덕에 비를 완전히 뒤집어쓰지는 않지만, 바람에 휩쓸린 빗물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추위에 특히나 약한 나로서는 쥐약 같은 하루였다.

    그냥 기절이라도 하지. 그러면 지나가던 사람이 날 보고 신고라도 해줄 텐데.

    나는 괜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뒤적였다.

    그래도 내게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잉!

    [발신자: 과몰입오타쿠]

    [아… 진짜 돌아버리겠는데? 여기에는 왜 지우 편이 아무도 없어?]

    지잉!

    [발신자: 방송은 방송으로만 보자]

    [차라리 대본이라고 해줘 XX]

    지잉!

    [발신자: 마음으로 낳은 지우]

    [지우야, 지금은 운이 조금 없는 것뿐이야. 우리는 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애인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지닌 애인지 다 알아. 절대로 기죽지 마.]

    뭐야. 난 괜찮은데 다들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럴 거 알고 대든 거였는데. 사실 이거 아무것도 아닌데.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데…….

    “아.”

    하필이면 간당간당하던 핸드폰 배터리가 다 닳아 화면이 꺼졌다.

    나는 황급히 전원 버튼을 눌렀으나 먹통이었다.

    방금까진 성냥을 켠 소녀처럼 따스한 기분이 들어 가슴에 틀어박힌 얼음 조각이 녹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성냥불이 꺼지고 싸늘한 겨울을 뒤집어쓴 듯한 공허한 상실감이 나를 잠식했다.

    새삼스럽게 서러워졌을 때였다.

    “…….”

    “…….”

    하필이면 이런 초라한 순간을 오즈월드에게 들켰다.

    오즈월드는 반듯하고 고운 모습으로 우산을 쓴 채 날 보고 있었다.

    수치스러움에 뺨이 따끔거렸다.

    제발 날 못 본 척하고 가버렸으면 좋겠는데, 오즈월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나를 특별히 동정하지 않는 담담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들어올래?”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기 직전이었음에도 나는 괜한 자존심을 세웠다.

    “아니.”

    오즈월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련 없이 뒤돌았다.

    그토록 살갑고 친절했던 게 다 거짓이었던 것처럼 냉담한 태도였다.

    더 참담해진 기분으로 멍하니 아스팔트 바닥을 새까맣게 적시는 빗물만 쳐다보는데, 단정한 운동화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즈월드가 새빨간 우산 하나를 손에 챙겨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 애는 내 거절이 듣기 싫다는 듯 멋대로 우산을 펼쳐 내 어깨에 걸쳤다.

    더없이 필요했던 다정한 강압이었다.

    “…괜찮으니까 우산 가져가.”

    울컥하고 목이 메었다.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바보처럼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나 혼자 있게 해줄래?”

    혹시라도 엄마가 마음이 약해져서 날 데리러 왔다가 우산을 쓴 모습을 발견한다면 괘씸하게 여길 수도 있었다.

    오즈월드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필요 없으면 버려.”

    그 말을 끝으로 오즈월드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고, 나는 마침내 바라던 대로 혼자가 되었다.

    이상해.

    오늘 내가 원하는 대로 전부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조리 자충수라는 양 마음이 개운해지질 않았다.

    우울감만 더 깊어질 뿐이었다.

    해가 졌다.

    오늘따라 차도 다니지 않아서 평소보다 으스스한 길목이 캄캄해져 갔다.

    그런데도 엄마가 나타나지 않았다.

    “추워…….”

    나는 고집스럽게 옆으로 치워뒀다가 결국 오즈월드가 준 우산을 다시 펼쳤다.

    비바람이라도 막을 생각이었다.

    그냥 처음부터 그 애를 따라서 저 집에 들어갈걸.

    막심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자존심은 추위와 고독 앞에서 나약하게 부서졌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내가 사라져도 엄마는 찾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그걸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지우야.”

    나는 화들짝 놀라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오즈월드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들어올래?”

    검은 우산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이 제안을 수락해선 안 된다는 이성적인 생각이 뇌리에 흐릿하게 떠올랐다가 금방 사그라들었다.

    추웠다.

    비참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불쌍하고 초라한 애로 남아있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오즈월드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제야 그의 천사 같은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오즈월드는 언제 싸늘했었냐는 듯 다정한 얼굴로 나를 끌어당겼다.

    얼른 날 데려가고 싶었다는 듯이 조급함마저 느껴지는 태도에 무참히 짓이겨졌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적어도 이 애만큼은 나를 원했다.

    “가자.”

    나는 손을 단단히 맞잡고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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