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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75화 (275/277)

275화

‘이게 뭐지?’

내 입술은 훈련받은 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였다.

“무슨 짓이야?”

박정기는 본인 생각보다 자전거가 너무 먼 데까지 요란하게 굴러떨어지자 살짝 놀라더니, 버럭 소리쳤다.

“…그러게 왜 나 무시하냐고!”

“…그러게 왜 나 무시하냐고!”

내가 어떻게 박정기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한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진짜 신기가 생겼나?

오싹한 기분에 어깨를 살짝 떨었을 때였다.

벤치에 앉아 관망하던 오즈월드가 일어서더니 내 앞을 가로막았다.

박정기에게서 나를 분리하려 드는 행동이었다.

“후회할 짓 안 했으면 좋겠어, 정기야.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는 건 바보 같은 행동이잖아.”

박정기는 대번에 “뭔 개소리야!”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지우를 좋아하는데 너한테 관심 안 가져주니까 자꾸 괴롭히는 거잖아.”

“…말 다 했냐?”

오즈월드는 씩씩거리며 분노로 몸을 들썩거리는 박정기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어깨를 쥐었다.

“미움받기 싫으면 착하게 굴어. 좋아하는 여자애 괴롭히지 말고.”

박정기는 거의 울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더니 이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나는 차마 그들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다가 오즈월드에게 따지듯 물었다.

“꼭 그렇게 말해야 했어?”

오즈월드는 맛이 이상한 아이스크림을 먹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날 돌아보았다.

“난 쟤가 널 괴롭히는 게 싫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날 괴롭히는 게 싫어서 내쫓았다는데, 더 화를 내기도 어중간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오즈월드의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정기가 네 관심을 끌려고 자꾸만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서 괴롭히는 게 싫어, 지우야.”

그렇다고…… 나를 감싸려 드는 오즈월드와 굳이 대립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몹시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오즈월드의 손을 붙잡았다.

“알았어. 도와줘서 고마워.”

“……자전거 가지러 가자.”

“응.”

우리는 침묵한 채로 굴러떨어진 자전거를 되찾아왔다.

솔직히 말해서, 고맙지 않았다.

왜인지 아까부터 기분이 뒤숭숭했다.

오즈월드는 쓰러진 자전거를 일으켜 내 손에 핸들을 쥐여주었다.

“또 정기가 널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등교할 때도 같이 다니자.”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만 해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선선히 그러자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선뜻 그러자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우야. 응?”

그의 재촉에 결국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하는 바를 이룬 오즈월드는 더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내가 오즈월드와 같은 반이며 함께 등하교하기로 한 사실은 새아버지를 매우 기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홀튼 부부가 아들만 남겨두고 자주 출국해서 접점 만들기가 어려웠는데. 지우가 이렇게 도와주는구나.”

다만 이 소식이 우미에게는 커다란 불행이었다.

“뭐야! 그 오빠가 왜 그런 학교에 다녀? 당연히 우리 학교에 다닐 줄 알았는데!”

오즈월드의 집은 어떤 손님도 드나들지 않았고, 이웃들과 접점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철옹성 같았다.

우미는 엄마에게 오즈월드를 초대해달라거나 옆집으로 놀러 가고 싶다며 졸라대곤 했는데.

나 때문에 더 심하게 고집부리게 되었다.

엄마는 결국 우미의 성화에 못 이겨 날 들볶았다.

“오즈월드한테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고 말해봐. 넌 어떻게 된 애가 친하다면서 도통 친구를 집에 초대하질 않니?”

그야 여기는 내 집도 아니고 오즈월드와 친한 친구도 아니니까.

‘오히려 거리를 두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고 있어서 골치 아프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얌전히 “네.”라고 대답했다.

하나 오즈월드를 초대할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예정이었다.

우미와 엄마가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일을 제외하면 내 일상은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아. 달라진 게 있기는 했다.

자전거를 발로 찼던 사건 이후, 박정기는 묘하게 잠잠해졌다.

그러다 뜬금없이 전학을 떠났다.

“집이 망했대.”

믿을 만한 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흉흉한 이야기가 돌기까지 해서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왠지 나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에 속이 갑갑해졌고, 언제부터인가 희미한 두통이 떠나질 않았다.

“지우야.”

흠칫!

나를 부르는 오즈월드의 목소리에 어깨가 들썩일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를 경계하고 있음이 여실히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왜?”

뒤늦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오즈월드는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피식 웃었다.

“집에 가야지.”

“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원래 내가 부르면 바로 나갈 준비 했었잖아.”

“그냥 좀. 이것저것.”

나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며 습관처럼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또 머리 아파?”

그때 오즈월드가 내 이마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탁!

아, 실수했다.

이렇게 매정한 행동까진 할 생각이 없었는데, 무의식적으로 내게 뻗어오는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당황으로 얼굴은 더 딱딱하게 굳어졌고, 여유 없는 목소리가 조급하게 튀어나왔다.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즈월드는 거절당한 게 무안하지도 않은지 빨갛게 물든 손으로 굳이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네.”

그러고는 내 가방을 챙기며 다정하게 말했다.

“가자.”

“내가 들어도 되는데.”

“몸 안 좋잖아. 내가 들게.”

그의 다정한 강압이 불편했다.

자전거 보관소에 도착할 동안 우리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갑자기 변한 내 태도는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챌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자전거를 끌고 뒤로 물러나고 있을 때 오즈월드가 핸들 쪽을 붙잡아 세웠다.

깊은 바다 같은 푸른색 눈동자가 작살처럼 날 꿰뚫었다.

“요즘 왜 날 피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나는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으나 오즈월드는 봐주지 않았다.

“혹시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럼 말해줘. 고칠 테니까.”

잘못된 점을 고친다는 말은 흔히들 사용하는 표현이었다.

한데 오즈월드의 ‘고친다’라는 말은 이상하게 그 뜻으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자꾸 오즈월드에 한해서 신경이 곤두서는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너랑 붙어 다니는 걸 우미가 싫어해.”

“우미?”

“전에 우리 집에서 본 여자애.”

“아아. 그 애가 싫어하는 게 왜?”

“집안 분위기가 안 좋아져서. 엄마도 자꾸만…….”

널 집으로 데려와서 우미랑 놀게 만들라고 은근히 강요하는 게 너무 피곤해.

나는 그렇게는 말하지 못하고 그냥 말을 바꾸었다.

“너랑 놀고 싶어 하는 애들이 많잖아. 그런데 네가 자꾸 나하고만 붙어있으니까 불편해. 애들 눈치도 보이고.”

내 말이 이어질수록 오즈월드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럴수록 이상하게 쫓기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 초조해졌다.

생각이 핑글핑글 어지럽게 엉켜 입 밖으로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이제 따로 다니자.”

이 말까진 안 할 생각이었는데.

최대한 눌러 삼키려 했던 속마음을 토로해버렸다.

쿠구궁!

그 순간 요란한 천둥이 울렸다.

하늘은 순식간에 끄물끄물해져서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오늘 비 소식이 있었던가?

자전거가 있고,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낭패였다.

“그래.”

나도 모르게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어설프게 맞닿은 서늘한 눈빛에 절로 오금이 저렸다.

그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고, 표정이었다.

“네 말대로 그럴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 안에서 갑자기 내쫓겼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의 다정함을 누릴 수 없는 완전한 타인이 된 것이다.

‘…나 진짜 어이없는 애네.’

먼저 밀어낸 게 누군데, 왜 밀려난 기분을 느끼는 거야?

오즈월드가 날 계속 붙잡을 거라고 멋대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볼이 절로 뜨거워질 정도로 황당하고 자아도취적인 생각이었다.

쏴아아아아!

결국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던 하늘이 싸늘한 봄비를 내렸다.

기어이 연약한 벚꽃잎을 죄다 떨어뜨려 바닥에 짓이길 듯한 굵은 빗방울이 지면을 세게 강타했다.

세상이 냉기로 들어찼다.

오즈월드는 자전거를 버려둔 채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새까만 우산이 그의 두 눈을 가릴 정도로 내려앉았다.

차갑게 다물린 예쁜 입술에는 조소 한 자락조차 걸려있지 않았다.

그가 날 지나쳐갔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자전거를 끌고 비가 쏟아지는 지점까지 걸어갔다.

어느새 오즈월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야에는 비명을 지르며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변덕을 부린 날씨에 우산을 챙긴 건 오즈월드가 유일한 모양이었다.

“…잘 됐다.”

오즈월드가 영 꺼림칙했는데 드디어 그 애가 내 인생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행이야.”

새아버지가 좀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우미와 엄마에게 덜 시달릴 테니 나쁘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엄마한테 전화해볼까 고민했다.

하나 금방 관두었다.

어차피 데리러 오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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