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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71화 (271/277)
  • 271화

    “아빠! 왜 저 언니하고만 이야기해!”

    계속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있던 우미가 빽 소리 질렀다.

    부모의 관심을 빼앗겼다는 생각에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채우미. 누가 식탁에서 소리 지르랬어.”

    새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혼내자 우미는 삐친 얼굴로 뒤에 서 있던 조 실장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나 놀이방 갈래.”

    새아버지는 차라리 우미가 빠져주는 게 낫다고 여긴 건지 손을 휘휘 저었다.

    엄마는 불편한 얼굴로 멀어지는 조 실장와 우미를 힐끗거렸다.

    “제가 따라갈까요?”

    “됐어. 지우 학교 문제도 이야기해야지. 내일부터 출장이라 오늘 아니면 이런 이야기할 시간도 없어.”

    나는 잠시 밥을 떠먹던 손을 멈추었다.

    “지우는 여기서 멀지 않은 사립 초등학교에 보낼까 하는데. 어차피 우미랑 보현이도 거기 보낼 생각이고.”

    “어머, 그러면 좋죠.”

    나는 이미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곳에 특별한 친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새아버지가 보내려는 사립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으로 전학 가면 고생할 거라는 예감이 들어.’

    그 사립 학교는 내로라하는 부잣집 애들은 다 다니는 곳이었다.

    거기서도 우미와 보현은 손꼽히는 부자라 입김이 셀 테니, 나 같은 건 얼마든지 손쉽게 괴롭힘당할 수 있었다.

    두 남매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일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저는 원래 다니는 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어요.”

    “어째서 그러지? 전학 갈 사립 학교에는 수영장도 있고 승마도 배울 수 있는데. 사립 학교가 훨씬 좋을 거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 저었다.

    “그 학교는 부모님이 자주 나와서 참석해야 하는 행사가 많다고 들었어요.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는데, 그런 학교에 다니면 큰 폐가 될 것 같아요.”

    새아버지는 아직 초등학생 자녀가 없었기에 그런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그리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어서 지금 다니는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어요. 선생님들도 좋고요.”

    “으음. 벌써 2학기도 다 끝나갈 무렵이라 새로 적응하려면 어렵겠지. 친구도 다시 사귀어야 하고.”

    엄마는 내가 사립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운 듯했지만. 두 남매에 나까지 케어할 자신은 없는 모양인지 수긍하는 눈치였다.

    다행히도 내 의견은 받아들여졌다.

    “지우가 나이보다 의젓하고 아주 똘똘한데?”

    엄마는 내 칭찬에 마음이 놓여 기분 좋아졌는지, 은근하게 자랑도 했다.

    “지우가 아직 1학년이기는 해도, 반에서 1등을 놓쳐본 적 없어요. 수학은 벌써 4학년 과정 선행학습도 하는걸요.”

    “그래? 지우가 커서 내 회사에 들어와서 일해도 좋겠는데?”

    “얘는 의대 보낼 거예요. 집안에 의사 하나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다고요. 보현이는 피아니스트가 될 테니까 손 건강을 신경 써야 하는데, 누나가 케어해 주면 더 좋잖아요.”

    “벌써 거기까지 생각했어? 당신도 참 못 말려.”

    두 사람은 멋대로 내 미래를 두고서 화기애애하게 청사진을 그렸다.

    뭐. 분위기가 좋으니 그걸로 됐나?

    나는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 편안한 마음으로 마저 식사했다.

    부잣집이라 그런지 밥은 맛있었다.

    *   *   *

    식사 이후에 할 일은 내가 쓸 방을 정하는 거였다.

    보현은 당연히 그런 일에 따라올 애가 아니었기에 거실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를 뚱땅뚱땅 두들겼다.

    그 무관심함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나는 두 남매와 최대한 마주칠 일 없는 곳을 골랐다.

    1층 구석에 처박힌 방은 크기가 작아서 사실상 다용도실에 적합했지만. 초등학교 1학년에 불과한 내가 사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여긴 너무 외지지 않니?”

    새아버지의 우려에 얼른 대답했다.

    “이 방이 거실 피아노 소리가 덜 들려서 좋아요.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방이 필요해서요.”

    내 합리적이고 모범적인 대답은 새아버지의 마음에 쏙 든 듯했다.

    “우미도 지우처럼 공부를 좋아하면 좋겠는데….”

    안타깝지만 새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그 애는 평생 공부를 싫어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오늘따라 계속해서 구체적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게 낯설었는지 희한하다는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래도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지내겠다는 내 말이 마음에 든 건지 얼른 거들어주었다.

    “지우는 독립적인 성격이라 혼자 있는 거 좋아해요.”

    “으음. 그래도…….”

    새아버지는 양녀를 차별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신경 쓰이는 듯했다.

    “저는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동생들도 저랑 같이 지내는 일에 천천히 적응해나가는 게 나을 것 같고요.”

    동생들을 들먹이자 새아버지는 식사 자리에서 우미가 했던 행동을 떠올렸는지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래. 일단 여길 쓰고 나중에 더 좋은 방으로 옮겨주마.”

    “네.”

    그럴 일은 없을 예정이었다.

    *   *   *

    구석진 방을 선택한 건 정말이지 잘한 일이었다.

    새로운 가족 구성원에 나라는 존재는 사실상 혹에 불과했기에 다들 금방 적응을 마치고 일상을 영위했다.

    특히 엄마의 만족도가 제일 커 보였다.

    엄마는 자식을 버릴 만큼 매정하진 못했으나 딱 그 직전만큼은 모질었다.

    자식을 버렸다는 죄책감은 안고 싶지 않지만, 나를 책임질 마음은 없었기에 항상 이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 감정적 문제는 점점 나에 대한 원망으로 자라났다.

    그렇다고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건 교양 없다고 느낀 걸까?

    엄마는 이 집안에서 내 존재감을 최대한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건 내게 엄청난 불안감을 주는 행동이었다.

    어렸던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어떻게든 눈에 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엄마의 바람과 완벽히 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엄마는 엄마대로 괴로워했고 나 역시 매일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을 보내야 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 행동한다면 지금도 똑같았겠지.’

    나는 현재의 삶에 꽤 만족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으니 이토록 쾌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어야만 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난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 것 같아.”

    띠링!

    [발신자: 마음으로 낳은 지우]

    [이럴 때는 회귀했다고 해야 하지 않아?]

    “그럼 나 회귀한 것 같아.”

    띠링!

    [발신자: 지우에 인생 베팅]

    [진짜 귀엽다……]

    번호가 뜨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이 내게 문자를 보냈다.

    더 이상한 건, 나는 이들에게 문자를 보낼 수 없는 대신 그냥 허공에 대고 말하면 이들이 대답해준다는 사실이었다.

    아. 문자를 보내는 존재는 ‘성좌’라고 불렀다.

    성좌가 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분명 26살까지 살았던 기억이 있어. 그런데 갑자기 8살이 되었지. ……왜일까?”

    성좌들은 꼭 이런 유의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꼭 무언가에 차단당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성좌들의 문자를 보다가 던전 퀘스트 문자를 다시금 확인해보았다.

    “청혼 이벤트라는 건 뭐지?”

    청혼은 결혼해달라는 뜻이잖아.

    내가 누군가에게 결혼해달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다는 뜻인가? 누가 그런다는 거지?

    생각할수록 알쏭달쏭하기만 해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문밖으로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고용인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고용인은 “지우야, 대표님 오셨어.”라며 날 불렀다.

    “나갈게요.”

    새아버지가 일찍 퇴근하는 날에는 반드시 온 가족이 모여 식사해야 했다.

    그린 듯이 화목한 가정을 원하는 것 같은데, 나로서는 전혀 관심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은 전부 다이닝 룸으로 모여들었다.

    채보현의 반찬 투정에 잠깐 실랑이가 오간 뒤, 새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옆집에 사람이 들어오는 모양이야.”

    이 저택 바로 옆에는 더 큰 규모의 집이 있었는데, 계속 빈집인 상태였다.

    소유주가 있기는 하지만 해외에 나가서 사느라 집을 비워두고 있다고 했던가?

    엄마도 새로운 부자가 등장한다는 소식에 흥미가 생긴 표정으로 물었다.

    “그 집 계속 비어있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알고 보니 소유주가 외국인이래. 이번에 잠깐 한국에 들어온다고 들었어.”

    “뭐 하는 사람들이래요?”

    “투자회사 오너인 것 같아. 보안이 철저한 걸 보면 상당한 거물인 것 같은데. 자식도 있다니까 당신이 잘 접근해서 집에 초대해봐.”

    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엿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그런 이웃이 있었던가?’

    내 기억상 옆집은 딱히 존재감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같이 바비큐 파티를 하기는 했었다.

    ‘분명 다 한국인이었는데.’

    언제 외국인 투자자가 옆집을 사들인 거지?

    어쩐지 호기심이 동했다.

    ‘외국인이 이런 부촌에 왜 저택을 사뒀을까?’

    정체가 궁금하던 이웃을 맞닥뜨리게 된 건 겨울 방학이 되어서였다.

    이웃은 무려 이사 떡을 들고 상당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 집에 인사를 왔다.

    “안녕하세요.”

    아시아 혼혈로 보이는 남자는 금발의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새아버지는 먼저 인사 온 이웃 사람들을 몹시 반기며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적당한 때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으나 어설프게 발이 묶여 응접실에 둘러앉게 되었다.

    “아, 어쩐지 한국말이 유창하시더라니. 한국계 미국인이셨군요!”

    “아내는 프랑스인입니다. 아주 간단한 한국어 외에는 잘 모르죠.”

    ‘흐음. 그럼 저 남자애는 미국인인 거야, 프랑스인인 거야?’

    우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금발의 소년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그의 곁으로 쪼르르 다가갔다.

    첫눈에 홀딱 반한 눈치였다.

    사실 시력에 이상 없는 영장류라면 저 남자애를 좋아하지 않는 쪽이 이상한 거긴 했다.

    세상에 주인공이 있다면 저런 존재일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Hi. Nice to meet you. My name is 우미 채. What’s your name?”

    내 기억으론 우미의 영어 실력은 영어 유치원을 갓 졸업한 지금이 최고였다.

    “오즈월드 홀튼.”

    이름이 오즈월드구나.

    묘하게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은근슬쩍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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