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띠링!
[퀘스트: 1월 31일까지 루비 반지 빼지 않기 실패]
▸실패: 호감도 대폭 하락
오즈월드는 흙바닥에 처박힌 반지를 확인하더니 진심으로 의아해했다.
“이상하네요. 분명 제 나름대로 당신에게 잘 대해주었던 것 같은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몰라서 물어? 네가 처음부터 한 행동들을 생각해봐. 날 가지고 놀고, 우습고 천하게 여겼으면서 갑자기 연인 놀이라도 하고 싶어? 이 싸이코 새끼야!”
오즈월드는 피곤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첫 단추를 잘 못 끼웠단 말이군요. 고작 그런 이유로 저에 대한 평가를 정정하지 않는 겁니까?”
“고작? 고작이라고?”
“저와 다를 게 없었던 유지스는 용서했잖습니까.”
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하나 오즈월드는 자꾸만 날 자극하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제게 너무 큰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테레제 양?”
“편견? 기가 막혀서…….”
오즈월드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당신이 처음부터 멀쩡한 척했어도 뿌리부터 뒤틀린 인간이라 결국 난 당신을 혐오했을 거야. 틀림없이.”
내가 악에 받친 상태로 증오를 쏟아내자, 오즈월드는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으로 제안했다.
“그 말이 맞을지 시험해볼까요?”
“뭐?”
“솔직히 말해서 이 게임은 처음부터 제게 너무나 불리했습니다. 그러니 공평하게 저에 대한 편견이 없는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시험해보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말 그대로 당신이 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상태로 만나면 어떻게 될지 알아보자는 겁니다.”
오즈월드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마침 실험해볼 무대도 준비되었네요.”
띠링!
[악마 던전이 생성됩니다.]
던전은 악마 계약자가 있어야 생성된다.
하지만 오즈월드는 그런 규칙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며 어떠한 매개도 없이 허공에 던전을 생성해버렸다.
그런데 문의 형태가 몹시 이질적이었다.
판타지적인 요소가 전혀 없는, 현대의 지구에서나 볼 법한 생김새였다.
문이 열리기 직전, 오즈월드가 내 이마를 짚었다.
“그럼 ‘서울’에서 다시 만나죠.”
35. 제로베이스
“지우야, 일어나. 도착했어.”
흔들흔들. 누군가 내 어깨를 쥐고 흔들며 잠을 깨웠다.
나는 옆으로 비스듬히 떨구고 있던 고개를 바로 일으키며 몽롱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뜬 장소는 차 안이었다.
운전석에 있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그리로 돌리자 날 깨운 여자가 보였다.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미용실을 들러 예쁘게 말아 모양을 낸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 엄마였다.
그런데 엄마가 이렇게 젊었나?
엄마의 얼굴에는 주름 하나 없었다.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고상한 새색시 같았다.
누구도 8살짜리 딸을 낳은 여자라고 보지 않을 정도로 참 예뻤다.
나는 오래된 기억을 들추는 듯한 감각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오는 장소인데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은 차고였다.
“…여기가 어디야?”
“어디기는. 새아버지 집이자 이제 우리 집이지.”
엄마는 차에서 먼저 내리며 내게 신경질적인 잔소리를 내뱉었다.
“핸드폰 두고 내리지 말고 챙겨서 나와.”
“아, 응.”
내 은색 슬라이드 핸드폰은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놓아져 있었다.
이 핸드폰은 엄마가 쓰다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물려준 것이었다.
꽤 그리운 감각으로 슬라이드 핸드폰을 위로 밀어 올리자 문자가 막 도착했다.
“?”
워낙 무뚝뚝하고 사회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아직도 반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내게 문자를 할 사람은 없는데.
아. 하나 있기는 했다.
본인은 문자를 펑펑 쓸 수 있다며 집이 부자라는 사실을 항상 자랑하는 애가 있는데. 그 애가 종종 쓸데없이 문자를 보낸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 막상 문자를 확인해보니 그 친구가 보낸 게 아니었다.
문자 내용은 이러했다.
[던전 퀘스트: 제로베이스 서울]
당신의 기억은 현재 대부분 잠금 상태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 ‘서울’에서는 분명 노력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선택의 순간, 어느 한쪽을 고르면 다른 한쪽은 영원히 잃게 됩니다.
▸■■: ‘■■’로 살아간다.
▸■■: ‘■■■’로 살아간다.
※가려진 부분은 ‘청혼’ 이벤트 달성 시 해금됩니다.
‘이게 뭐지? 누가 잘못 보냈나?’
아니면 신종 행운의 편지 같은 걸지도 몰랐다.
‘이상하게 기분 나쁜 문자야.’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사이 엄마는 내가 미덥지 않은 듯 계속해서 경고했다.
“엄마가 계속 말했지만, 새아버지 말씀 잘 듣고 동생들이랑 잘 지내야 해. 지우는 8살이니까 동생들한테 양보 잘할 수 있지?”
“응. 그럴게.”
일단 대답하기는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이 일들을 오래전에 전부 똑같이 경험해본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단순히 기분 탓인 게 아니라 머릿속에 이 집에 대한 여러 장면이 떠올랐고, 실제로 내가 보는 것들과 일치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이 저택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속인이 이렇다던데.’
설마 신기가 내렸나 싶었다가도 그건 아닐 거라는 이성적인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8살이 하기에는 제법 어른스러운 사고였다.
곧 차고에서 집으로 이어진 문을 타고 넓게 펼쳐진 거실로 나가자 고용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꾸벅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모님.”
엄마는 점잖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에서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드러났다.
그때 깔끔한 비즈니스 정장 차림의 중년 여자가 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일찍 오셨네요, 사모님.”
“어머. 조 실장님 계셨네요? 앞에 마중을 안 나와계셔서 집에 없으신 줄 알았더니.”
엄마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아까보다는 기분이 조금 나빠 보였다.
그때 조 실장의 손을 잡고 있던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엄마에게 달려왔다.
“아줌마!”
“안녕, 우미야. 오늘부터 우리 같이 살게 됐네?”
“그럼 아줌마랑 맨날 인형 놀이할 수 있겠다!”
“이제 엄마라고 불러야지.”
여자애 쪽은 새엄마의 존재가 무척 반가운 듯했다.
하나 조 실장의 손을 잡고서 뚱한 얼굴을 한 남자애 쪽은 썩 반가운 기색은 없어 보였다.
‘여자애는 채우미, 남자애는 채보현이었지.’
쟤들이 저렇게 작았었나.
남매는 날 힐끗거리기는 했어도 먼저 알은체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엄마도 매달리는 우미에게 신경이 쏠려있느라 날 인사시키는 일을 깜박한 모양이다.
그때 갑자기 머릿속으로 내가 이대로 멍하니 있다가 조 실장이 엄마에게 눈치를 줬던 장면이 떠올랐다.
“넌 애가 왜 이렇게 살갑지 못하니?”
엄마는 조 실장에게 얕보였다며 몹시 화를 냈고, 불똥은 늘 그렇듯 내게 튀었었다.
나는 조 실장이 날 응시한 순간 먼저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지우라고 합니다.”
그제야 엄마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소개했다.
“조 실장님, 여긴 제 딸 지우예요. 지우야, 이제 신지우가 아니라 채지우라고 해야지.”
글쎄. 이 집에 계속 들러붙어 있어봤자 내가 채 씨 집안사람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몹시 경계하는 표정으로 날 주시하고 있던 우미가 약간 마음을 놓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면 채우미와 채보현은 처음부터 날 싫어했다.
단순히 자기 집에 낯선 애가 들어와서 싫어하는 느낌이라고 하기에는 좀 지나칠 정도로.
‘조 실장은 엄마를 싫어하니까 채우미랑 채보현한테 나에 대해서도 안 좋게 이야기해뒀겠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머리 아파.’
기억이 복잡하게 얽혀서 미약한 두통이 밀려들었을 때였다.
“대표님 오셨습니다.”
고용인의 말에 우리는 전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중년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 당신 벌써 왔어?”
새아버지였다.
* * *
새아버지와 엄마는 서로 아이까지 딸린 재혼이어서인지 결혼식은 과감하게 생략했다.
대신 한자리에 모여 식사하는 것으로 앞으로 우리가 가족이 되었음을 공표하기로 했다.
다이닝룸에는 유니폼을 입은 주방 이모님이 부지런하게 움직여 푸짐한 한 상을 차려내고 있었다.
테이블은 직사각형이라 서열에 따라 자리를 나눠 앉는 방식이었다.
드라마에서 재벌집 회장님이 꼭 앉는 자리에 새아버지가 앉았다.
수평적 구조를 추구하는 회사 대표가 정작 집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고 앉는 게 좀 웃겼다.
“지우가 몇 살이라고 했지?”
새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한 건 엄마였다.
“8살이에요.”
엄마는 혹시라도 내가 귀염성 없이 굴어서 새아버지의 눈총을 사게 될까 봐 항상 불안해했다.
하긴. 나는 유치원에서도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다만 엄마는 새아버지가 친자식과 양녀를 구분 짓지 않는, 깨어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새아버지가 나와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를 트려 한 시도가 불발되고 말았다.
새아버지는 다시 자상해 보이는 미소로 물었다.
“아저씨 몇 번 본 적 있지?”
“네.”
엄마가 한사코 나를 소개하려고 하지 않아서 스치듯 몇 번 본 게 전부였지만.
“앞으로 아저씨 집에서 살게 될 텐데, 괜찮겠니?”
“이제 제 새아버지잖아요.”
그러니 별수 없이 여기서 살아야지 뭐 어쩌겠어.
…라는 뜻으로 말한 건데.
새아버지는 내 말뜻을 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 듯, “그래. 이제 아저씨가 지우의 아버지야.”라고 말했다.
그는 엄마한테 시선을 돌려 물었다.
“지우한테 내가 무슨 일하는 사람인지는 말했어?”
“큰 회사 대표님이라고…….”
나는 새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난처하게 웃는 엄마의 말을 끊었다.
“알아요. GQ소프트. 불의 전설이 대표작이잖아요.”
새아버지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게임 회사 대표였다.
“아저씨들이 좋아하는 게임인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이기도 하니까요. 곧 새로운 게임도 출시되잖아요. 트레일러 영상 봤어요.”
“게임 좋아하니?”
“네. 만드는 일에도 관심 있어요.”
“오, 그래?”
8살짜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줄 몰랐는지, 새아버지는 가식적인 친절 대신 진짜로 내게 흥미를 보였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