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나는 유지스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품에서 벗어났다.
“정말로 제가 여기에 있다고 해서 찾아오신 건 아니죠?”
“그 이유가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는 했지.”
유지스는 내게 둥글게 말아서 벌어지지 않도록 리본으로 묶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읽어 봐.”
그는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내용을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순순히 리본 끈을 당겨 말린 종이를 펼쳐보았다.
“이건…… 황실 법도 내용을 수정하는 서류잖아요?”
“그래. 몇 가지 항목을 바꾸었지.”
바뀐 내용은 대체로 예비 황후의 의무에 관한 것들이었다.
“전부 네게 유리하게 맞추었는데. 어때? 더 수정할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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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스 이 테친놈아ㅠ 아침 댓바람부터 청혼하러 찾아온 거냐고]
나는 난감한 감정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애꿎은 서류만 만지작거렸다.
“네게 이 서류를 주며 청혼하려고 짐이 그간 얼마나 바쁘게 지낸 줄 아느냐?”
유지스는 그런 내 상태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이 서류를 붙들고 있는 손을 겹쳐 쥐었다.
“약혼만 하자는 거다. 그래야 출신도 모를 놈이 꼬이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꼭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일찍이 말씀드린 적 있지만, 저는 누구와도 만날 생각이 없어요.”
“그래? 발렌시아 후작과도?”
오즈월드를 들먹이는 그의 목소리가 유독 날카로웠다.
발할라에서 오즈월드와 나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퍼진 걸 들은 건가?
“전혀요. 그 사람이랑 저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내가 강하게 부정하는데 유지스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왜 저 남자가 널 찾아왔지?”
“네?”
나는 의아하게 유지스가 응시하는 방향을 확인했다가 나직하게 신음했다.
대체 언제 나타난 건지, 오즈월드가 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근처에 서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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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또 도파민 삭 도네]
오즈월드는 빙긋 웃는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발렌시아 가문의 오즈월드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딱히 예법에 흠잡을 곳은 없었으나 눈에 거슬릴 정도로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였다.
나는 당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관두었다.
좋은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남자는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가늠하듯 시선을 부딪치고 있었다.
유지스는 기가 찬다는 투로 빈정거렸다.
“발렌시아 후작가라. 평생 듣도 보도 못한 가문인데.”
그는 계단 쪽을 가리키며 오즈월드에게 말했다.
“좀 꺼져주겠나? 보다시피 청혼하던 중이라서.”
오즈월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곤란할 듯합니다. 마침 제 용건도 비슷한지라.”
미친 새끼.
나는 속으로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앞으로 터질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마력을 끌어올렸다.
“감히 황명을 거역하겠다고?”
왜냐면 유지스가 돌아버린 눈으로 마력을 응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싸움으로 번지면 유지스는 죽는다. 그러니 둘이 맞붙는 상황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나는 유지스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서며 매섭게 경고했다.
“제가 분명 거절했을 텐데요, 교수님.”
우리 사이에 특별한 접점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일부러 교수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나 오즈월드는 이런 일로 무안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외려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유지스의 심기를 확 긁었다.
“거절당한 건 폐하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정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군.”
유지스는 기어이 오즈월드를 향해 마법을 사용했다.
이럴 거라고 짐작하고 이미 상쇄할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내가 마법을 없애버리자 유지스의 분노한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오즈월드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감히 짐을 기만한 죄인을 벌하려는데, 왜 막았지?”
“재판도 없이 직접 손을 쓰시면 안 됩니다. 여론이 나빠질 거예요.”
유지스는 내 말이 면피용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가 내 팔을 붙들며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추궁했다.
“여론이 나빠지는 걸 걱정해서가 아니잖아.”
이렇게 말다툼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이곳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황실 기사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즈월드는 촌극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언제 돌변해 공격해올지 몰랐다.
불안했다.
저 끔찍한 미치광이가 유지스를 해칠까 봐 두려웠다.
“제가 황궁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서 유지스를 데리고 이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내 조급한 태도가 외려 유지스의 호승심을 자극한 듯했다.
유지스는 실소하더니 나와 오즈월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짐이 모르는 뭔가가 더 있군.”
“폐하.”
“제국에 발렌시아 후작가라는 건 없다. 한데 이번 생에 갑자기 생겨났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말이지.”
“폐하, 제발 황궁으로…!”
“저거 인간이 아니잖아.”
그 말에 내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오즈월드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눈이 좋으시군요.”
유지스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못 알아차렸는데, 오늘은 그쪽이 이 차원과 섞이지 못하고 있단 사실이 잘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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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전개야…? 갑자기 오즈월드가 외부 차원의 존재라는 걸 눈치챈다고? 너무 불길한 깨달음이잖아]
유지스의 눈은 특별하지만, 상위 계급의 천사나 악마는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훨씬 상위 존재인 오즈월드의 이질감을 눈치챌 수 있는 거지?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당장 유지스를 붙잡았다.
이대로 이동 마법을 사용해 도망칠 생각이었다.
하나 오즈월드가 한발 빨랐다.
푹!
오즈월드는 눈 깜빡하는 사이에 유지스의 코앞에 나타나 육신을 꿰뚫었다.
체호프를 공격했던 그때와 똑같은 방식이었다.
나는 비명 지를 새도 없이 쓰러지는 유지스를 끌어안고서 절박하게 외쳤다.
“이동!”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이지?
오즈월드를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텐데.
머릿속 한구석으로는 냉정한 현실을 떠올리면서도 몇 번이나 반복해 장소를 이동했다.
그러나 그 짓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유지스가 고통스럽게 흘리는 신음에 정신이 번쩍 들며 얼른 그를 주변에 기대게 한 후, 상처를 살폈다.
새까맣게 탄 것처럼 그을린 옷자락 너머로 바싹 마른 지점토가 부서지듯이 무너지는 중인 육신이 보였다.
피는 흐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덜 잔혹해 보이지도 않았다.
차라리 일반적인 부상인 게 더 나았다.
이 상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어떤 포션도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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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월드 진짜 미친 거 아냐? 왜 유지스를 죽이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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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인 정체를 들켰는데 살려두겠어? 오즈월드도 엄연히 여기 남자주인공이잖아. 진행에 방해되는 경쟁자를 제거하는 건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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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ㅋㅋ 그러니까 애초에 오즈월드는 <신의 유희> 공식 등장인물도 아닌데 왜 나대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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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건 답이 없다; 방송인데 그러면 진짜 게임 시나리오 그대로 진행하겠냐? 원작을 방송에 맞게 각색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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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어디 사냐? 나 좀 보자 ㅋㅋ]
유지스는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로 내 무용한 짓을 멈추게 했다.
“됐어. 그만해. 어차피 회귀할 테니까.”
“포기하지 마세요. 제가 살릴 거니까, 무조건 방법이 있을 테니까.”
나는 어떻게든 유지스를 한 줌의 모래로 만들고 있는 이 끔찍한 힘의 정체를 파악해내려 애썼다.
구프엘이 내게 전해준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할 방법을 몰랐다.
“안 돼. 안 돼. 제발, 안 돼.”
유지스는 필사적인 날 쳐다보다가 뺨을 감싸 쥐었다.
그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희미하게 웃더니 가쁜 숨을 억누르며 느릿하게 말했다.
“나의 신께서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는 알겠군.”
나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말을…….”
당황으로 말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더듬거리자, 유지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렇게 보여서.”
“……그만 이야기해요. 더 빠르게 몸이 부서지니까.”
“대체 날 이렇게 고통스럽게 한 신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했는데. 예뻐서 화도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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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유지스 좀 살려줘ㅠㅠㅠ]
“그만 말하라고 했잖아요.”
나는 정신없이 마력을 퍼부으며 몸이 부서지는 속도를 간신히 멈춰두었다.
‘마력 소모가 너무 극심해.’
이대로라면 금방 마력이 고갈되어버릴 것이다.
이 틈에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지난번처럼 유지스의 회귀가 진행될 때 적당한 시간에 멈추는 게 가능할까?’
그래서 유지스가 멀쩡해졌을 때 도망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오즈월드가 회귀에 영향받지 않으면 어차피 진실을 깨달은 유지스를 살려두지 않을 거야.’
어떡하지? 대체 이 상황을 어떡하면 좋지?
파앗!
그때 내가 퍼붓고 있던 마력이 제멋대로 모양을 갖추며 스콰이어 나비가 소환되었다.
곧이어 스콰이어 나비는 새까만 덩어리로 변환되더니 누군가를 이 자리에 불러왔다.
“어? 언니?”
바로 리비였다.
“여기는 어디… 황제 폐하께서 다치셨어?”
리비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내 곁에 다가왔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리비가 이 상황을 해결할 열쇠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도와줘, 리비!”
리비는 의문도 없이 곧장 내 손을 겹쳐 쥐었다.
그러자 리비에게서 선녀의 날개옷을 닮은 신비로운 은백색 기운이 아스라이 피어나 허공을 수놓았다.
이어 내 손바닥 아래로 접시만 한 크기의 시계가 생성되었다.
던전에서 본 적 있는 보랏빛의 회귀 시계였다.
작아진 시계가 바늘을 되돌렸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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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아물고 있어! 유지스의 육신만 시간이 되감기고 있나 봐 ㅠㅠ]
“…하아.”
유지스의 복부에 난 상처가 전부 사라졌다.
리비는 안도하며 주저앉은 내게 심각한 낯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언니가 계속 학교에 오지 않았던 거랑 관련 있는 거지?”
얘가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가 빨라졌지?
“지금 설명하기 좀 어려워. 폐하와 함께 황궁으로 이동시켜 줄 테니까 주변을 경계하고 있어.”
“언니는?”
“난 괜찮아.”
채널 관리자인 오즈월드는 BJ인 나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니 괜찮겠지.’
나는 안심시키는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을 황궁으로 보냈다.
그렇게 나만 이 장소에 남아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오즈월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꾸 원작 설정에 없는 현상이 일어나는군요. 그것도 상당히 성가신 방향으로 말입니다.”
오즈월드는 느긋한 걸음으로 지척까지 다가왔다.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가락에 낀 루비 반지를 빼서 오즈월드에게 집어 던졌다.
“죽어버려. 이 개자식아.”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