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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68화 (268/277)

268화

알림이 뜨지 않았다.

낙원을 발견했다는 메시지도, 후원 알림도 전부.

사방이 깜깜했다.

황궁에서 낙원의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은 어둠이었다.

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얼른 문을 닫고 질감마저 느껴질 듯한 빽빽한 어둠 속에 잠겼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차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기다렸던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난번의 당신이죠?”

그가 멈춰 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고 알은체했다.

상대가 내 손바닥에 대답을 써주지 않는 이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시야가 차단되면 오감이 예민해진다던 말은 사실이었다.

기척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상대가 손에 닿을 거리 안으로 진입한 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고, 당장 잡아챘다.

‘클라이드, 너지?’

“에로스.”

나는 차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지난번 그가 에로스와 프시케를 들먹였던 일을 떠올리며 그렇게 불렀다.

상대가 내 손을 부드럽게 끌어가더니 역시나 저번처럼 글씨를 썼다.

-응, 내 프시케.

안도감과 동시에 벅차오르는 감정에 전신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한데 왜일까?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은데 어린아이로 돌아가 버린 것처럼 엉엉 우느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대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나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다독였다.

촉감이 부드러운 천이 눈물에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몇 번이나 훑어냈는지 몰랐다.

나는 눈물로 귀중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울음을 그치려 안간힘을 썼다.

“끄흡. 끅. 끄흐윽.”

내 서글픈 노력에 상대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왜 웃어요.”

-소리가 웃겨서.

“짜증 나…….”

가뜩이나 서러운데 헛소리하는 상대 때문에 또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그러자 남자가 황급히 나를 달랬다.

-미안. 장난이야. 울지마.

“안 울거든요?”

-알았어.

어느덧 흐느낌이 거의 멈추며 머쓱함이 밀려들었다.

이 기분을 떨치려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하는데, 한바탕 눈물을 터뜨린 뒤라 그런지 생각나는 적당한 말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스몰 토킹이 안 되는 타입이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 남자의 가면을 내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번뜩 떠올랐다.

“당신 가면, 제가 가지고 있어요.”

이 공간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아공간에 넣어둔 나비 가면을 꺼내지 못했다.

“혹시 중요한 건가요?”

사뭇 걱정스럽게 묻자 남자가 대답했다.

-엄청나게.

“…거짓말이죠?”

-응.

“아, 진짜.”

황당한 장난에 화를 내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이지만, 상대도 미소 짓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내 손을 가만히 쥐고 있다가 문득 루비 반지를 매만졌다.

곧 나직한 한숨 소리가 들리는데, 이상하게 찔끔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쥐어 짜낸 목소리로 물었다.

“…있잖아요.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떤 거?

“나 좀 데려가면 안 돼요?”

-…….

“이제 낙원의 문이 활성화되는 건 이번으로 끝이잖아요. 여기서 나가면 당신을 못 보잖아요.”

남자는 매정할 정도로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있는 곳으로 나 좀 데려가면 안 돼요?”

안다. 이게 얼마나 부질없는 투정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난 너무 지쳐있었다.

이 엿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가족, 친구, 남주들에 대한 애정을 점차 넘어서는 중이었다.

대체 난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거지?

“제가 이렇게 계속 이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게 맞는 거예요? 당신이 하는 일에 그러는 게 더 도움 되는 거죠?”

견딘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오리라는 기약 없는 미래만 바라보며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기에 나는 너무 닳아 있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려 학교를 나와 떠돌아다니는 짓도 이제는 점점 물렸다.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한데도 버틴 건 오늘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이 지나면 나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지?

‘더는 기다리기 싫어.’

그때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던 남자가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널 데려가는 일은 할 수 없어. 미안해.

이미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한 부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절당한 게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나를 위한 거야.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이야.

나는 이 남자가 분명 클라이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헷갈렸다.

‘클라이드가 이렇게 어른스러웠나?’

농담하고 장난치는 걸 보면 내가 아는 클라이드가 맞는 것 같은데, 묘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저기…….”

-저기라고 하지 말고 아까처럼 에로스라고 부르는 건 어때?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어떻게 에로스와 프시케를 알고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판테온에 있으면서 지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건가?’

사실 따지고 보면 클라이드가 세계관에서 사라진 지 고작 두 달 정도 흘렀을 뿐이다.

한데 어떻게 하디와 손을 잡았으며 지구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거지?

“판테온에서 얼마나 살았어요?”

-꽤 오래?

말도 안 되는 대답이었다.

“오래가 얼마나 오래인데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다정하게 내 손을 잡고 있더니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떠나려는 거야.’

나는 황급히 남자의 손을 붙잡았다.

“벌써 가요?”

다행히도 남자는 내 손을 떨쳐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질문에 대답은 해주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크게 안도했다.

아직 난 이 사람을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겠지.’

“우리 또 만날 수 있어요?”

남자가 이번에는 내 손바닥 위에 대답을 써주었다.

-곧.

곧?

그에게 무슨 뜻이냐고 되묻기도 전, 갑자기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한동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짹짹!

바깥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날이 밝고 있었다.

“……?”

‘내가 왜 침대에 누워있지?’

방금까지 낙원의 문 너머에 있었는데?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이고 자정 기다리다가 깜빡 잠들더니 이제 일어났네ㅜ]

‘내가 계속 잠들어있었다고? 설마 그게 꿈이었다고?’

그럴 리가 없었다.

아직 내 손에는 클라이드의 온기가 남아있는데 그게 다 꿈이었을 리가 없잖아.

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당장 책장을 치우고 낙원의 문을 열었다.

“…뭐야.”

뭔가 이상했다.

차원의 열쇠로 문을 열었는데 데미안이 장난감 인형을 만들 때 사용하던 작은 공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낙원을 한 번 찾았다가 진입을 포기한 후 다시 문을 열었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그 말은 내가 이 문을 열기는 열었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황궁에서 그를 만났을 때 성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 것처럼. 뭔가 조치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곧이라니. 우리가 곧 다시 만나게 된다는 뜻인가?’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10월 1일만 바라보며 견뎌왔는데 다시 기대할 것이 생겨났다.

나는 무척 개운한 기분으로 데미안의 장난감 공방에서 나와 책장을 도로 원위치시켰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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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보상은 없어?]

“네. 이번 보상은 장난감 구경이었어요.”

성좌들은 내가 둘러댄 대답에 맥 빠진다는 반응을 몇 번 보인 후 금방 관심사를 바꾸었다.

‘쉽게 넘어가서 다행이네.’

그때였다.

똑똑.

사람이 찾아올 리 없는 이곳에 누군가가 노크했다.

데미안의 집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누구지?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끌어올리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그러고는 경계하는 목소리로 방문자의 정체를 물었다.

대답은 순순히 돌아왔다.

“열어. 부수기 전에.”

“…폐하?”

이건 유지스의 목소리였다.

띠링!

[성좌 ‘우리 유신랑’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아악 유지스!!!!!!!! 연적의 집에 온 부인 찾으러 왔구나!!!!!!!]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얼른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이른 오전부터 말끔한 제복 차림의 유지스가 복도 난간에 삐딱하게 기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진짜네.”

“그럼 누군 줄 알고 문을 열어?”

유지스는 몹시 언짢아하는 표정으로 나를 밖으로 끌어당겼다.

“짐이 어제 너의 마지막 도착지를 보고받고서 얼마나 화가 난 줄 알기나 해?”

내 행보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에 황당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딱히 감시의 눈을 못 느꼈는데.

“인기척을 거의 못 느꼈는데 어떻게 찾으셨어요?”

“마법은 너만 쓸 수 있는 줄 아는 모양이지?”

“아아…….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세요?”

유지스는 이마를 짚었다.

“네가 데미안 그 자식의 집에 있는데 짐이 화가 안 나게 생겼어?”

“어차피 여기에 데미안은 없잖아요…?”

“돌겠군. 말이 안 통해.”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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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테레제 때문에 어지럽다…]

뭐야. 내가 더 답답한데 왜 본인이 저래?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유지스는 손을 휘휘 저었다.

“됐으니까 네가 잘하는 거나 해봐.”

“마법이요?”

띠링!

[성좌 ‘철벽왕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지스는 눈을 살벌하게 뜨며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생각 안 하고 말하면 그 입을 못살게 괴롭혀줄 테니까 다시 잘 생각해.”

나는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서 얼른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내내 사나운 분위기를 풀풀 풍기던 유지스가 입매를 누그러뜨리며 피식 웃었다.

“고작 이걸로 끝이야?”

“바깥이잖아요.”

내 시선은 슬며시 난간 아래로 향했다.

이곳은 2층이어서 건물 앞 공터에 옹기종기 서 있는 황실 기사들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유지스는 시시하다는 표정으로 내 턱을 당기더니 입술을 겹쳤다.

“폐하! 다 보인다고요!”

내가 버둥거리며 타박하자 유지스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짐이 이렇게 널 다 가리고 서 있는데 저기서 네가 보일 것 같아?”

“잘 보이지는 않더라도 뭘 하는지는 짐작하겠죠.”

“까다롭기는.”

유지스는 못마땅하게 날 흘겨보더니 방심한 틈을 타 짧게 입을 맞추고서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장은 이걸로 끝내지.”

만족감이 떠올라 있는 미소가 매우 얄미웠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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