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주피는 내 심드렁한 반응에 까르르 웃었다.
“테레제 님은 채널 관리자 쪽이 더 적성에 맞을 거예요. BJ로서의 커리어에 전혀 관심 없으시죠? 순위 확인을 그렇게 안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다가 또 궁금한 게 생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채널 관리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우선 판테온에서 서류 절차부터 진행한 후, 소원권을 사용해 채널 관리자로 격이 상승될 거예요. 더 높은 차원의 존재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 ‘더 높은 차원의 존재’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가 사실 썩 와닿지 않았다.
“더 강해진다는 뜻인가요?”
“단순하게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에요. 코어로 이루어진 진화된 종족이 되는 거거든요.”
코어. 예전에 오즈월드가 체호프를 공격했을 때 들은 적 있었다.
어쨌든 엄청 궁금한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시스템 창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판테온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죠?”
내가 계속 관심을 보이자 주피가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네! 채관위로 가서 확인해보실 수 있어요. 채널 관리자에 흥미가 생기신 모양이네요?”
“그런 것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사실인지 확인은 해보고 싶어서요.”
“꼼꼼하시네요. 물론 소중한 소원권이 걸린 일이니까 당연한 거겠죠!”
“아무래도요.”
“정확하게 확인하고 싶으시면 제가 오즈월드 컴퍼니 쪽과 이야기해서 정식으로 일정을 잡아볼게요. 방송을 쉬면 타격이 커서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기는 한데…….”
판테온으로 가려면 오즈월드에게 꼭 알려야 하는구나.
“일정 조율되면 판테온으로 데려가 주세요. 오즈월드는 빼놓고요.”
“오… 방송 콘셉트가 아니라 진짜로 오즈월드를 싫어하나 봐요?”
“제가 그 남자를 좋아할 수가 있을까요?”
주피는 몹시 흥미로워하는 눈빛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오즈월드 씨가 원래 좀 재수 없는 캐릭터기는 해도 이상하게 테레제 님한테 유독 더 재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다 방송 콘셉트인 줄 알았어요!”
“전혀. 진짜로 싫어해요.”
“그래서 더 재밌나 봐요. 원래 진짜는 반응부터 다른 법이잖아요.”
주피는 방송 비하인드를 듣는 팬처럼 발까지 동동 구르며 좋아하다가 미간을 찡그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광고가 너무 길어진다고 이제 나오래요. 아아,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주피는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일단 가볍게 제안만 하러 온 거예요. 아직 시간 있으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그럴게요.”
가볍게 악수를 마치자마자 주피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방송이 재개된 건지 잠잠하던 후원 알림이 떴다.
띠링!
[성좌 ‘성적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캬~ 인기 BJ 인증서라는 주피 명함 받았구나~]
띠링!
[성좌 ‘미식가’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 확실히 테레제가 채널 관리자 되면 재밌겠다]
그런가? 난 사실 이 제안이 내심 웃긴다고 생각했다.
‘BJ로 보낸 세월이 길어서 인간성이 마모되면 모를까. 지금은 이런 제안을 하는 것 자체가 기이하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누군가를 강제로 험악한 환경에 집어넣고 실험하는 이딴 일을 하고 싶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명함을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 * *
오즈월드가 나타나지 않아 조용히 주말을 보낸 뒤 맞이한 월요일 오전.
나는 연구실이 아니라 이사장실에 와 있었다.
“저를 조기 졸업시켜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요?”
이사장은 주말 사이에 학생들에게서 항의 아닌 항의가 빗발쳤다고 설명했다.
“요청 내용이 근거 없지는 않네.”
내가 학생으로 머물러있기에는 지나치게 출중한 능력자라, 재능 낭비가 극심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 근거로 마법학회까지 끌어들여 그간 내 이름으로 제출된 수많은 논문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너무 극심한 수준 차이가 있어서 학생들의 사기를 저하한다는 주장도 있었네.”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한창 기세가 오르는 자의 날개를 억지로 꺾는 대신 아예 더 높은 곳으로 날려 보내려는 속셈이라. 수법이 제법 교묘하군요.]
“제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조기 졸업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이사장은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 쉬듯 말했다.
“문제는 자네를 조기 졸업시키지 않으면 자퇴하겠다고 한 학생들이 있다는 거지.”
상상을 초월하는 극단적인 이야기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자네가 얼마나 황당할지 이해하네. 다만 이 문제가 가문 간의 기세 싸움으로 번져버렸어.”
스콰이어 공작가를 견제하려는 이들이 뭉쳤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 일에 가장 앞장서야 할 가문은 윌로우였다.
하나 이사장은 어딘가 달라졌다.
“이제 가문에 내 입김은 그리 세지 않네, 테레제 양. 이 늙은이가 더는 무의미한 대척은 그만두라고 해도, 대대로 내려온 증오는 쉽게 거둬지지 않지.”
이제는 그만하자는 말로 불화를 종식하려 들기에는 두 가문의 앙금이 너무나 뿌리 깊었다.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이해합니다, 이사장님. …솔직히 제 편을 들어주실 줄 몰랐어요.”
“허허.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떠날 때가 다 되어가 보니, 나 역시 참 혈기 왕성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네.”
이사장은 현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왜 그리 가시를 세우고 살았을까 의아할 정도야.”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클라이드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느라 항상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악마를 감시하며 하루하루 투견처럼 지내 온 나날이 하루아침에 없었던 일이 되어버렸다.
이사장으로서는 사실상 중년에서 노년까지 이어진 22년을 깡그리 잃어버린 셈이었다.
“이 일은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해도 괜찮을까요?”
“영지전만 일으키지 않는다면야.”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는데 이사장은 진지했다.
“자네 아비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일세.”
으음.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띠링!
[성좌 ‘스콰이어 절대 지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쯤 되니 라울의 젊은 시절이 궁금할 지경이야]
아무튼.
문제의 당사자를 만나기 위해 나는 본관 로비에 서서 들어오는 학생들을 빤히 주시했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읽은 듯한 학생들이 멈춰 서서 가볍게 웅성거리기도 했다.
나는 생선을 사냥하는 곰처럼 밀려드는 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새하얀 여자애를 포착했다.
“이자벨.”
이자벨 브론테. 세실리아의 친구이자 리비를 적대하는 메인 악역 중 하나.
그 애를 밖으로 불러냈다.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이자벨은 순순히 나를 따라 버려진 별채 쪽으로 향했다.
우리는 사람의 시선이 없는 곳까지 이동한 뒤에야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무슨 일이세요?”
이자벨은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도도하게 물었다.
“내 조기 졸업 요청, 네가 주도한 거지?”
“그렇다면요?”
“내가 학교에서 나간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거야?”
“선배님이 지금 당장이라도 여기에 없었으면 해서요.”
“그러니까 그게 이해가 안 돼. 내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발렌시아 교수와 연인 사이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띠링!
[성좌 ‘팩트도 폭력이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진짜 직설적으로 아픈 곳을 때려 버리네 ㅋㅋ]
이자벨의 냉랭한 표정에 서서히 분노가 깃들었다.
“오만하시네요.”
나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 오만하다고 말하는 것도 역시 이해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자벨은 사납게 치뜬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교수님이 선배를 조수로 두고 있다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됐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 별로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도 않은데.”
내 진심 어린 말을 들은 이자벨이 노성을 터뜨렸다.
“어쩜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렇게 수준 낮은 도발을 하시나요!”
“뭐? 내가 언제 그랬어.”
억울한 오해에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띠링!
[성좌 ‘미운 22살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테레제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서 더 열받는 듯 ㅋㅋ]
이자벨은 분노로 미세하게 몸을 떨며 내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분과 저는 집안끼리 혼담이 오간 사이예요.”
혼담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버렸다.
그러자 이자벨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까보다는 조금 여유를 찾은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약혼하기도 전에 괜한 구설에 오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선배님이 이곳을 떠나주세요. 어차피 당신 수준이 학생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게 사실이기는 하잖아요.”
이자벨은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남을 무시하고 깔보며 타인을 조종해서 여론을 조성하는 쪽이었다.
한데 지금은 사랑에 눈이 멀어, 혹시라도 오즈월드를 제 손에 넣지 못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대체 발렌시아 교수를 왜 좋아하는 거야?”
“이상한 질문이네요. 그분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어요?”
많지. 너무나 많지.
하지만 이자벨에게는 없었다.
나처럼 특수한 관계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도 왜 그 남자를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건데?’
잘생겨서? 친절한 성격이라서? 능력이 좋아서?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객관적으로 봤을 때 싫어하기가 더 어려워 보이기는 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처럼 관리자와 BJ 관계가 아니었다고 해도 난 오즈월드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뭐. 너무 뿌리 깊은 증오로 판단력이 흐려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걸 수도 있지만.
이자벨은 내게 최후의 통첩처럼 경고했다.
“선배님이 황후 폐하가 되신다면 저는 존경하며 따를 거예요. 하지만 이런 지저분한 분란을 계속 이어가신다면 좀 곤란할 것 같네요.”
문득 이런 시답잖은 일로 말싸움을 하는 것 자체에 환멸이 났다.
이자벨이 오즈월드에게 푹 빠져서 이러고 있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친한 사이였다면 등짝을 때려서라도 정신 차리라고 뜯어말렸을 것이다.
정신적인 피로감을 느껴서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내가 어떤 지저분한 분란을 일으킨 건지 좀 알 수 있을까? 내 기억에는 그런 소리를 들을 행동을 한 적이 없어서.”
본인이 공격받았다고 생각한 이자벨이 싸늘한 분노를 표출했다.
“당신이 오즈월드 님의 곁에 있는 거 자체가 분란이에요.”
대꾸하기도 지치는 말이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는데 대답이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저는 분란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그랬군요.”
오즈월드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