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 * *
<신의 유희>는 크게 세 파트로 나뉜다.
각각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세계관을 학습하는 단계인 1학기.
모든 남자주인공과 이벤트를 진행하며 호감도를 대폭 쌓을 수 있는 여름방학.
남자주인공들의 ‘트라우마’를 본격적으로 공략하는 2학기.
그렇게 일련의 과정을 지나 겨울방학에 접어들면, 가장 호감도가 높은 남자주인공과 알콩달콩한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한데 나는 이미 남주들의 배드엔딩 요소인 트라우마를 전부 여름방학 내에 경험해버렸다.
특히 원래대로라면 2학기에 진행되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벤트인 ‘천계’ 에피소드도 벌써 소모되어버린 상태.
상황이 이렇다 보니 2학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나조차 예상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변수는 하나 더 있지.’
[후원금: 779,256,000코인]
이번에 큼직한 퀘스트를 두 개나 완료하며 후원금이 어마어마하게 쌓였다.
10억 코인까지 머지않은 상황이었다.
띠링!
[성좌 ‘성적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와 코인 쌓이는 속도 뭐냐 ㄷㄷ 10억 코인도 역대 최단 기록 세우겠네]
띠링!
[성좌 ‘남의 눈치 안 봐요’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러다 메인 콘텐츠 다 끝나기도 전에 10억 모아서 방종 하는 거 아님? ㅋㅋ]
띠링!
[성좌 ‘오사장한테 충성하는 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사장님~ 저 헛소리하는 XX 차단 좀 부탁드릴게요^^]
나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 학기에는 남자주인공들이 없어서 과연 전처럼 코인이 빠르게 쌓일지 모르겠네.’
코인이 한 번에 확 오르는 순간은 아무래도 남자주인공들과 엮일 때라서, 2학기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저희 가볼게요.”
나와 리비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기숙사로 향했다.
“언니는 무슨 수업을 들을 거야?”
“으음, 글쎄.”
1학기 때 수석까지 차지한 나는 이제 학점 때문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였다.
‘전공 하나에 다른 수업 한두 개 정도만 들으면 되려나?’
일리야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새로운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우선 <마법의 생명체>랑 <연금술>을 들을까 생각 중이야. 난 마법 농원을 운영하고 있으니까 도움 될 것 같아서.”
“하아아. 나는 시간표를 빽빽하게 채워야 하는데. 언니는 겨우 수업 두 개만 듣는 거야?”
“1학기 때 내 시간표가 너보다 더 빽빽했을걸?”
우리는 재잘재잘 떠들어대며 기숙사에 다다랐다.
리비의 기숙사는 내 기숙사에서 꽤 떨어진 곳에 배정되었다.
아무래도 1학년과 4학년이 머무는 장소가 분리되어 있어 그런 듯했다.
그래서 내 기숙사에 먼저 도착하게 되었는데, 문 앞에 의외의 손님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자카리 경?”
자카리는 밀랍 인형처럼 무뚝뚝한 모습으로 서 있다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오늘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테레제 님.”
리비는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당황하고 있다가, 자카리가 내게 말을 걸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두 사람 친했어요?”
“아니.”
“아닙니다.”
“…??”
자카리는 혼란스러워하는 리비에게 친절한 설명 하나 없이 오직 나만 바라보며 말했다.
“이사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제가 모실 테니 함께 가시죠.”
곁에 있던 리비가 멋쩍은 미소를 띠며 서운한 마음을 감추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끄응. 남의 연애사에 그다지 끼고 싶지는 않은데, 이대로 넘어가기에는 마음이 찝찝했다.
“그러고 보니 자카리 경, 리비랑 같이 무도회에 간 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거겠네요?”
“아닙니다.”
……응?
“리비 님을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카리의 무뚝뚝한 대답에 당혹감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리비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리비는 언제 마주쳤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띠링!
[성좌 ‘조용한 관종’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자카리 얘도 볼수록 캐릭터가 참 희한한 것 같아]
자카리는 더 설명하지 않고 나를 재촉했다.
“어서 가시죠.”
리비는 알아서 기숙사로 잘 찾아갈 수 있으니 어서 가보라고 내 등을 떠밀었다.
길치인 리비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대로 큰길을 계속 따라가면 바로 나오는 기숙사였으니 괜찮겠지.
“혹시 헷갈리면 나한테 나비든 뭐든 보내. 알았지?”
“알았어. 기숙사 번호 보고 잘 찾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나는 자카리와 함께 발할라 본관으로 향했다.
‘이 길을 걷는 건 꽤 오랜만이네.’
그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혹시 일리야 님이 천계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띠링!
[성좌 ‘예비 사위 일리야’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뭐?! 일서방 왜 천계에 가 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요? 타락 천사는 천계에 들어갈 수 없을 텐데.”
“타락한 사실이 없어졌습니다. 그분의 날개는 순백색이었죠.”
설마 클라이드가 삭제되며 일리야가 타락한 사실도 없었던 일로 되돌아간 건가?
“그분은 클라이드라는 자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라졌죠. 흔적이 발견된 마지막 장소는 빛의 제단이었습니다.”
기억의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리야가 전후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천계에 간 모양이었다.
“사라졌다는 말은 일리야 님이 지금 천계에 없다는 뜻인가요?”
“예. 현재로서는 그렇게 추정 중입니다.”
일리야가 도로 대천사가 되었다는 건, 클라이드의 희생으로 되살린 천계에 다시 위기가 닥쳤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물었다.
“천계는 요즘 어떤가요?”
“곧 마계가 될 겁니다.”
띠링!
[성좌 ‘과몰입오타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ㅁㅊ]
자카리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지나치게 덤덤한 태도로 전해왔다.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자카리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쏴아아, 바람이 나뭇잎을 쓸어내는 소리가 적막을 더 도드라지게 했다.
원래도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인데. 오늘은 나와 리비를 제외한 누구도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더욱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자카리가 한쪽 무릎을 굽혔다.
그가 내 손끝을 쥐고 이마를 대었다.
이게 무슨 뜻을 담은 행위인지 모른다. 설정에 없는 행동이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신을 저버린 천사들에게 당연한 최후이니.”
하나 최상급 천사인 자카리가 이토록 공손해져야 할 존재라면 뻔하지 않겠는가.
신. 그런 위대한 존재에게나 바칠 충정을 내게 보이고 있었다.
“우연히 제가 만든 세계에 들어오기는 했어도 저는 그저 인간이에요. 그러니 일어나세요.”
“당신이 단지 인간에 불과하다면 제 아버지 사무엘이 받은 형벌을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나도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서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자카리는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그려냈다.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천사 사무엘은 죄악의 대가를 받는 것이니. 저는 그저 기쁠 뿐입니다. 드디어 저의 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존재 이유를 찾은 기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신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카리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제가 신은 아니지만, 이 세계에 대해서는 잘 알아요. 제 감정이 이곳의 신과 같다면 당신을 의무를 저버린 천사라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자카리는 감정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뚝뚝했다.
그러나 클라이드를 위해 목숨도 내던질 수 있을 정도로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뜻한 천사였다.
또한 신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강력한 의지를 지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숭고한 정신을 지닌 천사라고 생각해요.”
그 순간 갑자기 자카리가 아름다운 금빛에 휩싸이며 등 뒤로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그리고 곧 날개의 가장 아래쪽에 새로운 날개가 한 쌍 돋아났다.
“…!”
또한 자카리의 이마에 낯익은 인장이 희미한 빛을 뿜어내며 나타났다.
‘또 나비 인장이야.’
리비에 이어 벌써 두 번째였다.
자카리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본인 몸을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격이 상승했습니다.”
최상급 천사였던 그는 대천사가 되었고, 누가 봐도 이 변화를 일으킨 건 나였다.
나는 심각하게 물었다.
“…왜일까요?”
띠링!
[성좌 ‘하하버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늘도 이 거대한 테레제 유니버스가 한층 더 견고해졌습니다]
“제 생각에는 신의 종으로 인정받아서인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대체 왜 신의 종으로 인정받게 되었느냐고요.
‘내가 정말 신인가? ……신인데 이렇게 약하다고?’
자카리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다 보인다는 투로 말했다.
“당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자라난 당신은 성신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계를 창조한 근원적인 인물이기에 당신만이 지닌 특별한 힘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힘…….”
“그러니 제가 대천사가 된 게 아니겠습니까.”
너무 엄청난 일이 막 벌어졌는데, 사안에 비해 자카리가 비현실적으로 초연한 탓일까?
나조차 점점 ‘그럴 수도 있지, 뭐.’하고 태평한 생각이 들었다.
자카리의 이마에 나타난 나비 인장은 역시나 리비와 마찬가지로 곧 흐릿하게 사라졌다.
“당신 이마에 나비 인장이 생겼었어요. 그 인장은 리비에게도 나타났었죠. 혹시 뭔가 특이한 변화가 느껴지시나요?”
“마력에 불순물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군요. 이런 수준의 마력은 일리야 님을 제외한 어떤 천사에게서도 본 적 없습니다.”
“아무튼 좋은 거겠죠?”
“당신의 종이 강력해지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입니다.”
이쯤 되니 나는 신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대신 대충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 현상에 대해 달리 설명할 방법도 없는 데다, 내가 신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냐 싶어졌다.
어차피 중요한 사실은 나는 당장 이사장실로 가야 하는 발할라 4학년생이라는 거였으니까.
“이제 어쩔 셈인가요?”
내가 묻자 자카리가 대답했다.
“우선 일리야 님의 행방을 더 찾아보겠습니다. 테레제 님도 그걸 원하실 것 같군요.”
“맞아요. 일리야 님이 뭘 하느라 계속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지 걱정이에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알게 된 사실이 생기면 곧장 찾아뵙겠습니다.”
자카리는 나를 이사장실로 데려다준 후 홀연히 떠났다.
이사장은 잔잔한 미소를 걸친 얼굴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게. 이리로 앉지.”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