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34. 마지막 학기
마침내 길었던 여름방학이 끝났다.
나는 흑마가 이끄는 지붕 없는 검은 마차를 타고서 수많은 인파가 깔린 도심을 가로질러 공작저로 돌아갔다.
이는 우리가 악마로부터 승리했음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퍼레이드 같은 거였다.
‘사실 악마에게서 승리한 것까지는 아닌데.’
어쨌든 던전에 대한 두려움이 현저히 줄었다는 건, 엄청난 일이기는 했다.
도시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인간의 승리.
그 사실에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만으로 진이 빠져서, 손을 흔들어주거나 자애로운 미소를 걸치는 팬서비스까지는 하지 못했다.
‘내가 어쩌다가…….’
황실에서 이 퍼레이드를 기획했을 때 나는 극렬히 반대했다.
알려진 사실과 달리 인간이 악마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았고, 던전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인간은 여전히 침공당하는 중이었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나는 이 세계의 위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영웅 취급을 받는 게 몹시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나를 향한 환호와 감사에 어색한 반응만 보이게 되었다.
해서 이런 부담스러운 영웅 놀이는 관두고 싶었지만. 유지스는 암운이 드리웠던 제국에 모처럼 모두가 기뻐할 일이 생겼으니 장단을 맞추라고 요구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 화려한 귀환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와아아아! 스콰이어 자매다!”
“리비 님! 여기 좀 봐주세요, 리비 님!”
내 뒤에는 백마가 이끄는 하얀 마차를 타고 환한 미소를 띤 얼굴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리비가 있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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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흑과 백으로 극명하게 대비되니까 훨씬 멋지다 ㅠㅠ]
외부에서 던전을 없애는 방법을 알아내고 스티그마타를 전멸시키는 일에 가장 큰 공헌자는 나였지만, 제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리비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백마법을 발현하는 리비의 모습은 정말이지 신성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어느새 허리까지 자란 머리칼과 마법사 제복을 휘날리며 유백색 마력을 사용하는 리비에게는 금방 천사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던전을 없앨 때마다 둘이 함께 다니다 보니 ‘스콰이어 자매’의 인지도는 나날이 높아졌고, 전국구 단위의 팬이 생겨났다.
우리는 문이 활짝 열린 스콰이어 공작저로 화려하게 진입했다.
가족들은 나와 리비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다.
“수고 많았다.”
그날 우리는 가문에 일어난 수많은 기쁜 일들을 축하하며 축배를 들었다.
그간 많은 성장을 이룬 건 나와 리비뿐만이 아니었다.
“주세페는 단계를 모두 건너뛰고 내년부터 발할라에 입학하기로 했다.”
주세페의 능력치는 또래를 아득히 상회했다.
그래서 현재 다니는 마법 아카데미는 수준이 맞지 않아 발할라 최연소 입학자로 내정되었다.
“그 마법서를 읽으니까 이론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마법들을 전부 사용할 수 있게 됐어.”
“대단한데?”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주세페는 기분이 좋아져 우쭐하면서도 특유의 뚱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나도 스콰이어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지.”
스콰이어는 원래 마법 명가였다.
그리고 이번에 나와 리비의 활약으로 그 사실을 전국에 단단히 각인시키게 되었다.
그때 라울이 미간을 찡그리며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테레제 네가 준 마법서는 우리 세 사람이 다 읽자마자 갑자기 불에 타 사라졌다. 가문의 기사들에게도 전부 읽힐 생각이었는데.”
‘으음. 그런 사기 아이템이 횟수 제한조차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하지.’
“아쉽기는 하지만, 그게 나을지도 몰라요. 그런 마법서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골치 아파질 거예요.”
“그것도 그렇구나.”
화제는 자연스럽게 학교로 넘어갔다.
로잔이 곁에 앉은 리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로 기숙사 생활을 할 수 있겠니? 널 도와줄 시녀가 따라갈 테지만, 집에서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는 없을 텐데.”
이번에는 리비도 기숙사를 신청했다.
집에서 통학하려니 현재 사람들의 관심이 지나치게 쏠려 있는 상태라, 많은 인파가 따라붙을 걸 염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괜찮아요. 언니도 기숙사에서 잘 지내잖아요.”
그 말에 로잔은 날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테레제의 생활력으로도 잘 지내는 걸 보면 리비는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겠구나.”
나는 약간 황당해졌다.
“제 생활력이요? 저 혼자서 잘 지내요.”
내 자취 경력이 얼만데.
“그러니? 자주 밤도 새고, 끼니도 아무 때나 챙겨 먹거나 아예 거르고, 늦은 밤에 램프 켜놓고 마법서를 읽다가 날이 쌀쌀한데 창문도 닫지 않고 잔다던데. 아, 술은 예전보다 많이 줄였다고 듣기는 했단다. 비록 독주 열댓 병에서 한 자릿수로 줄어든 거지만.”
“……조심할게요.”
“꼭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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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자취하는 자식은 거의 야만인으로 보이나 봄]
‘조금 자유롭게 사는 것뿐인데 야만인이라니.’
로잔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나와 리비의 손을 감싸 쥐었다.
“너희 둘 다 기숙사로 가면 허전하겠구나.”
그러자 리비는 애교스럽게 로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작 3개월인걸요.”
라울은 술을 쭉 들이켜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난 차라리 둘 다 기숙사에 가 있는 편이 나은 것 같소. 그래도 학교에서는 외부인을 통제해주니까 그편이 훨씬 안전하겠지.”
리비가 집에 있으면 아무리 사람을 가려 받는다고 해도 손님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리비가 없더라도 스콰이어 저택에 방문하려는 이들은 넘쳐났다.
“다들 테레제가 황후가 되리라 짐작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줄을 대려고 하겠지.”
라울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샐쭉하게 뜨고서 날 쳐다보았다.
“정말로 황후가 될 생각이 없는 게냐?”
“그럴 생각 없다니까요.”
그러나 라울은 내 말을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로잔도 나와 유지스의 사이가 궁금한지 넌지시 운을 뗐다.
“무도회에서 보니 폐하께서 널 많이 아끼시던데. 너도 영 마음이 없는 건 아닌 것 같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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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스랑 잘 어울리는데 그냥 결혼해 ㅠㅠ]
나는 겸연쩍게 미소 지었다.
“폐하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게 연인이 되고 싶은 거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좀 복잡해요.”
내가 유지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분명 특별하고 애틋했다.
하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상대가 유지스 하나만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나는 벌써 네 명의 남자주인공과 전부 감정을 교류했다.
비단 감정만 교류한 게 아니다.
사실상 가장 짧은 시간 동안 제일 산뜻한 사이로 존재했던 클라이드를 제외한 남주들과 너무 깊이 얽혀버렸다.
그래서 마음이 더 복잡했다.
이게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른 것 같은데, 성애와 헷갈릴 정도로 유사한 감정이라서.
던전 안에서 긴 날들을 보냈다지만. 사실 내 삶을 전체로 놓고 보면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발생한 관계들이었다.
내게는 이런 감정에 대한 데이터가 너무나 부족했다.
어쩔 수 없잖아.
살면서 이런 관계가 되어본 건 네 명의 남자주인공이 전부인걸.
로잔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논문들에서 본 내용인데, 던전은 현실과 다를 게 없어서, 클리어하고 나서도 그 안에서 부여된 역할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더구나.”
“논문을 보셨어요?”
“그럼. 난 마법사가 아닐 뿐이지, 마법과 던전에 관련된 논문은 이해할 수 있으니까. 자꾸 던전을 들어가는 딸이 있으니 관심이 가기도 하고?”
농담처럼 덧붙인 마지막 말에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로잔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내게 차분히 말했다.
“죽을지도 모를 사지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두 사람이 실제 감정에 영향받지 않을 수 있을까? 정이란 게 참 무섭단다. 부대끼고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들게 되어있거든.”
그건 생각해본 적 없는 관점이었다.
나는 이게 게임 속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던전이 어떤 콘텐츠인지 잘 알았다.
또한 나와 함께 던전에 들어간 상대들은 내가 만든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드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내가 던전 역할에 영향받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서로 깊게 얽혔다가 던전을 나온 순간 갑자기 짠! 하고 다시 남남이 될 리가 없잖니.”
“……맞아요.”
로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그럴 때는 문제들에서 한 걸음 물러나 객관적으로 네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단다. 그러면 진정으로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일지 알 수 있을 거야.”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로잔이 지금 테레제한테 가장 필요한 조언을 해주네…]
나는 쑥스러운 감정은 뒤로 미루고 로잔을 꼭 끌어안았다.
“어머니 말대로 잘 생각해볼게요.”
로잔도 나를 꼭 안아주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러자 곁에 있던 리비도 헤헤 웃으며 우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굴이 빨간 걸 보니 그새 취한 듯했다.
주세페는 오렌지 주스를 홀짝거리다가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술에 취해서 주정 부리는 어른을 한심하게 쳐다보는 사춘기 소년의 눈빛이었다.
하나 그런 주세페도 곧 라울의 손에 이끌려 우리와 동글동글 공처럼 서로 끌어안게 되었다.
“아, 술 냄새나!”
말로는 술 냄새가 난다며 버럭 성질내고 있었지만, 두 팔은 가족들을 꼭 껴안는 게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한 주세페다웠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복잡했던 마음을 잠시 날려버렸다.
학교에 가면 클라이드도, 데미안도, 일리야도 없을 것이다.
남자주인공이 모두 사라진 학교라.
어쩌면 로잔의 말처럼 모두에게서 떨어진 상태로 찬찬히 나를 돌아볼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학기가 시작되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