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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54화 (255/277)
  • 254화

    나는 사고 치기 전에 얼른 용건이나 해치우고 그를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 날 찾아왔어?”

    “오해했군요. 제가 여기에 온 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연히 마주친 것뿐이죠.”

    내가 아니라 이곳에 다른 용건이 있다고?

    “여기에 온 이유는 뭔데?”

    “미확인 데이터가…….”

    오즈월드는 순순히 사실을 알려주다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궁금한 걸 꽤 뻔뻔하게 물어보시는군요.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있었네요.”

    “당신도 나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되잖아.”

    그게 퍽 동등한 거래라는 양 대꾸하자 오즈월드가 피식 웃었다.

    “갈수록 하는 짓이 귀엽네요.”

    그는 불쾌한 말을 지껄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주변을 한차례 휙 둘러보았다.

    “아무튼 제가 찾던 건 없는 듯하군요. 이만 판테온으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판테온을 언급하는 목소리에서 권태로움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본 오즈월드는 나를 이곳에 빙의시켰던 초반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이 남자가 더 거슬리는 건가.’

    모든 걸 손에 쥐어 더는 새로울 게 없는 사람에게서 느껴질 법한 교만한 권태로움.

    압도적이고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저 눈빛.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살갗이 저릿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내가 아무리 강해져봤자 그에게는 여전히 나약한 피식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아니, 외려 더 강해졌기에 그 사실을 훨씬 객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언제고 터질 준비가 된 도화선이었다.

    겉으로 보면 점잖은 듯하지만, 선을 까딱 잘못 밟았다간 가차 없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게 되리라는 위험한 확신을 주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권태로운 시선이 내 손에 닿았다 떨어졌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물어볼 게 있어서. 혹시 찾으러 온 게 데미안이야?”

    데미안이 있었던 게 분명한 이 장소로 오즈월드가 찾아와 무언가를 확인하려 들었다.

    나는 그게 데미안과 관련된 일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비단 그것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던전에서 사라졌어야 할 데미안이 현실에 나타나게 만든 게 오즈월드라는 생각이 떨쳐 지지 않았다.

    “여기에 온 건 데미안 때문이야? 미확인 데이터라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데? 던전의 데미안을 현실로 끄집어낸 것도 당신이지?”

    “질문이 너무 많군요.”

    오즈월드는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옷자락을 붙든 손을 떨어뜨렸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다면 제가 그럴 마음이 들도록 거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뭘 원하는데?”

    “제가 뭘 원할 것 같습니까?”

    그는 따분하다는 표정을 대놓고 드러냈다.

    너 따위가 뭘 줄 수 있느냐는 듯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눈빛에 속이 끓어올랐다.

    나는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려 황제 폐하셨고, 판테온에서 가장 잘나가는 채널 관리자인 그의 안목에 차는 무언가가 있을 리 없잖아.

    그러니 오즈월드가 내뱉은 질문의 의도는 하나였다.

    주제를 알아.

    예전에 내가 성좌들의 장난감임을 상기시켜주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똑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오즈월드는 귀여운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듯 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역시 말귀를 잘 알아듣네요.”

    그래서 마음에 든다며 날 보는 눈빛에 흡족함이 감돌았다.

    완벽하게 그의 애완동물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은 점차 다른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 남자를 엿 먹이고 싶다.

    사실 전혀 새롭지 않은, 습관처럼 항상 하는 생각이었다.

    한데 오늘은 그 생각이 질병처럼 날 덮쳤다.

    오즈월드는 이제 떠나려는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는 내 턱을 쥐고 또 멋대로 뺨에 입을 맞췄다.

    “그럼 이만.”

    이별을 고하는 입술이 내게서 멀어지는 순간.

    “…!”

    오즈월드의 뒤통수를 내 쪽으로 당겨 불한당처럼 입술을 겹쳤다.

    그의 두 눈이 커지며 어두운 바다 같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래봤자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했는데도 나는 오싹한 전율을 느꼈다.

    처음으로 오즈월드가 내 행동에 얼어붙었다. 처음으로 내가 감정적 우위를 점했다.

    그 사실에 흥분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나는 오즈월드가 도망칠 수 없게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고개를 비틀었다.

    서로의 콧등이 질척하게 비벼졌다.

    빗물에 흠뻑 젖은 내 얼굴이 그의 흠결 없이 아름다운 얼굴에 물자국을 냈다.

    천박하게 흐르는 숨으로 그를 덮었다.

    주제도 모르고 장난감이 입술을 비벼대며 저지르는 난장을 고결하디 고결하신 이 남자가 감내할 수 있을까?

    부디 불쾌하기를 바랐다.

    나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기를 바랐다. 진심으로.

    오즈월드가 내 남자주인공을 자처했을 때,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목적이 뭘까?

    나를 괴롭히고 망가뜨리는 게 목적인 거라면, 함께 밑바닥까지 엉망이 되는 일 정도는 같이 할 의향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 남자에게 먼저 키스한 걸 보면 내 정신은 단단히 망가져 버린 게 틀림없으니까.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아, 이제 질문에 답… 음….”

    나는 멋대로 이 키스를 대가로 제안하려 했으나 말을 맺지 못했다.

    뒤로 물러난 만큼 오즈월드가 따라붙어 본격적으로 내 입술을 벌리며 깊숙이 침범한 탓이었다.

    내가 달려들었을 때는 뻣뻣하게 얼어붙은 듯했던 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는 우산 아래에서 내 젖은 몸을 한 손으로 끌어안고 숨결을 탐하는 데 온 집중을 쏟았다.

    질퍽거리는 진흙을 두드리는 빗물 소리보다 더 끈적한 소리가 우리 사이에 흘렀다.

    그러나 나는 도망가지 않았다.

    외려 더 적극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깊이 안겼다.

    오즈월드의 값비싼 슈트가 나로 인해 젖어갔다.

    꽤나 깔끔 떠는 성격인 듯했던 그는 키 차이 때문에 불편한 건지, 나를 안아 들어 두 다리로 본인 허리를 감게 했다.

    차림이 흐트러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곧 등에 나무 기둥이 닿았다.

    우산은 어느새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키스에 열중하는 그가 우스웠다.

    내 뜻대로 휘둘리는 오즈월드에게 저열한 승리감을 느꼈다.

    내가 끌어안고, 만지고, 쓰다듬는 손길에 일일이 반응하는 그가 내 장난감으로 전락한 것 같다는 멍청한 착각이 들었다.

    희열이 끓어올랐다.

    이깟 키스에 상대가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게 너무 머저리 같아서 웃어버리고 싶었다.

    당신이 매번 확인하던 회중시계가 지금 진흙투성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건지.

    오즈월드의 거친 손길에 땋은 머리칼이 느슨하게 풀렸다.

    나는 그의 조급함이 너무나 기꺼워서, 대단히 중요한 경기에서 이긴 사람처럼 도취 되었다.

    혹시라도 이 기분에 중독되지 않을까 두려워질 정도로 황홀해졌다.

    그래서일까? 원래 성격대로라면 일찍이 그쳤을 키스에 길게 응했다.

    우린 꼭 뜨거운 연인처럼 부둥켜안고 서로를 쓸어 만졌다.

    하면 할수록 내 정신이 망가지는 듯한 키스는 이대로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끝날 줄 몰랐다.

    그러다 입술이 떨어졌다.

    키스를 먼저 그만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오즈월드였다.

    그는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내 뒤통수를 감싸 안은 채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나 역시 가슴팍을 빠르게 오르내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오즈월드는 비에 젖어 아래로 살짝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훤히 드러난 냉랭한 얼굴 위로, 변수로 인한 짜증과 가시지 않은 탐욕이 느껴졌다.

    관자놀이 쪽에 불거진 핏줄이 그가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를 여과 없이 드러내 주고 있었다.

    나는 낯부끄러운 꼴로 밀착한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이제 충분히 대가가 된 것 같은데.”

    오즈월드는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자가 꽤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테레제 양.”

    “덕분에.”

    그러자 오즈월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신경질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좋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설명하죠.”

    오즈월드는 나를 바닥에 내려주더니 손바닥을 아래로 펼쳤다.

    그러자 진흙에 처박힌 회중시계가 깔끔한 모습으로 그의 손바닥 안에 쏙 들어갔다.

    “던전에서 데미안은 저와 현실로 나갈 수 있는 계약을 했습니다. 이 세계관의 룰을 따라, 악마 계약자가 된 것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다만 악마 계약자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처럼 BJ가 받는 페널티가 부여되겠죠.”

    가장 끔찍한 지옥에 떨어지는 벌을 데미안이 받게 된다는 뜻.

    “데미안은 그 사실에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계약을 진행했죠.”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애써 수긍한 후 다음 질문을 했다.

    “그러면 여기에 온 이유는 뭔데?”

    “말씀드렸듯 미확인 데이터가 발견돼서입니다. 데미안과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모르죠.”

    우리는 방금까지 사방이 막힌 침실에서나 할 뜨거운 입맞춤을 나눴던 사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사무적인 태도로 대화했다.

    그러나 공기가 따끔따끔하다.

    키스하기 전까진 없었던 묘한 기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를 살짝만 건드려도 다시 빈틈없이 몸을 붙이고 입술을 파고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오즈월드는 다시 회중시계를 확인하더니 나직한 숨을 뱉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여기까지만 하죠.”

    그는 습관적으로 허리를 숙였다가 다시 물러났다. 내 뺨에 입을 맞추려다 관둔 모양이었다.

    대신 내 머리칼을 건드렸다.

    “황실 마법사들에게 가기 전에 머리를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딱!

    그는 황당한 말을 남긴 후 손가락을 튕겨 사라졌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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