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 * *
데미안은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살인의 흔적이 덜 남아서 뒤처리가 편하니까 좋았다.
그런 이유가 전부였다.
사실 좋아한다고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었다.
굳이 따진다면 ‘선호하는 날씨’ 정도일까?
그러다 이제는 확실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이 비를 좋아하니까.
함께 비 오는 날에 창밖을 보며 자신은 따뜻한 차를, 그녀는 차가운 커피라는 괴이한 음료를 마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비는 테레제였다.
별도, 달도, 구름이 예쁜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유성이 떨어지는 날도, 바람이 유독 상쾌한 날도 전부 테레제였다.
세상을 이루는 모든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건 제 육신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몸은 이미 테레제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그녀가 더 선명해졌다.
제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책을 읽을 때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기쁘게 웃는 미소는 어떠했는지.
깊이 잠들었을 때 몰래 파고든 품에서 느껴지던 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얼마나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달빛 아래에서 종종 세상과 하나가 된 듯한 분위기를 풍기던 그녀가 혹시 자신을 떠나갈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문득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그때의 두려움은 괜한 신경증 같은 게 아니었다.
자신은 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테레제를 빼앗길 것 같은 초조감에 시달렸었다.
당시에는 테레제와의 예정된 이별 때문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던전 밖으로 나와보니 알 수 있었다.
제게서 부인을 빼앗아 가려는 것의 정체는 이 세상이었다고.
‘아. 실제로 빼앗겨버렸나?’
아니지. 그게 아니지, 멍청한 새끼야.
가진 적이 없는데 어떻게 빼앗길 수 있겠어.
‘그냥 나만 버려진 거지.’
선명한 기억이 있는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이룬 모든 게 그녀인데, 버려졌다.
이제 별도, 달도, 구름이 예쁜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유성이 떨어지는 날도, 바람이 유독 상쾌한 날도 전부 특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비가 좋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싫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앞으로 영원히 싫어지게 될 것이다.
“로드.”
빗방울이 내려오지 못할 정도로 무성한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데미안에게 스티그마타 일원이 다가왔다.
“예상대로 황실 마법사들이 미끼를 물고 이리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다 죽여버리든가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마침 테레제 스콰이어도 함께 왔더군요. 과연 로드의 예상대로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데미안은 싸늘하게 식어있던 몸에 열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사실 확률은 반반이었다.
어쩌면 이런 쪽으로 유달리 감이 좋은 테레제라, 직접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무한한 동정심이, 기이할 정도로 만물을 사랑하는 그 빌어먹을 관용과 자애 때문에 기꺼이 함정으로 발을 들이지 않을까 했었다.
그리고 테레제는 이곳으로 왔다.
데미안은 그 사실에 전율하면서도 절망스러웠다.
테레제에게서 이 세계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사람이 될 자신이 없어서.
기어이 이런 방식으로 그 사실을 완벽히 확인받게 되어서.
마치 이 세계를 창조한 것처럼 구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설령 창조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이해하기 싫었다.
데미안이 원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이었다.
그녀가 제게서 기쁨을 얻길 원했다. 저만을 바라보고, 자신만 사랑하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서로를 아껴주며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녀보다 긴 생을 살아서 마지막 가는 길이 무섭지 않게 다정히 배웅한 뒤, 곧장 뒤따라 죽고 싶었다.
같은 무덤 속에서 싸늘하게 식은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우리는 참 행복했었노라고 과거를 회상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데미안의 바람은 단지 그게 전부였는데, 그녀는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적이 되었다.
“테레제는 어디에 있지?”
“덫의 입구에 막 진입했습니다. 곧 벌레 무덤에 도착할 겁니다. 보름간 쥐새끼처럼 태양궁에 숨어서 이동 마법으로 던전을 없애고 다니더니, 드디어 죽일 수 있겠군요.”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던 신세계 프로젝트에 치명적인 방해꾼이 된 테레제가 증오스러운 듯, 사내의 목소리에 살기가 실렸다.
“정예만 보내 즉시 처리하겠-”
사내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데미안이 스티그마타 일원들의 심장에 심은 작은 마력 폭탄을 터뜨려 즉사한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는지, 데미안은 새까만 구둣발로 죽은 자의 머리를 으깼다.
“오물보다 못한 새끼가 감히 부인을 함부로 입에 담아?”
평소였다면 주제도 모르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런 인간은, 깔끔하게 죽인 후 깔끔하게 치워버리는 것으로 끝맺었을 것이다.
하나 지금의 데미안은 몹시 불안정했고 예민했다.
그는 분노를 견디지 못했다.
화풀이에 이용당해 곤죽이 된 시체는 흙바닥이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완벽하게 흔적을 없애주었다.
“테레제…….”
데미안의 관심사는 괘씸한 사내에게서 테레제로 옮겨갔다.
그간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
그의 비상한 천재성과 천성적인 악독함이 결합 되자, 세상에 존재한 적 없던 온갖 기괴한 것들이 탄생했다.
가령 이 장소처럼.
빗속으로 스며든 데미안은 침입자들이 기어들어 오는 중인 장소로 쉼 없이 이동했다.
테레제가 이리로 오고 있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태양궁에서 지내는 중인 그녀가.
모든 손님을 전부 황궁에서 받고 있다는 그녀가.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가 된 그녀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정신없이 테레제를 찾던 데미안은 침입자들이 파악할 수 없는 위치에 우뚝 멈춰 섰다.
아아……. 저기 보인다.
짙은 색 전투복을 입고 머리칼을 단단하게 땋아 내린 모습은 처음 보았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에 젖어있어도 초라하기는커녕 지나치게 매혹적이었다.
테레제를 보니 얼어붙은 줄 알았던 가슴이 속절없이 뛰었다.
그녀는 여전히 사랑스럽고 예쁜데, 한편으로는 그만큼 증오스럽고 화가 났다.
스스스스슥.
그때 데미안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벌레 마수들이 기척도 없이 목표물들을 향해 다가갔다.
이곳에 안개처럼 엷게 깔린 백마력 때문에 특히나 알아차리기 어려운 벌레들은 더더욱 인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거대한 동물형 마수 떼가 나타날 예정이었다.
저들이 동물형 마수에 정신 팔려있을 때, 벌레 마수가 악몽처럼 침입자들을 뒤덮어 갉아먹어 치울 것이다.
언제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테레제가 과연 이번에도 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때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던 테레제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더니 흙을 만졌다.
“아주 희미하지만, 흙에서 백마력이 느껴지네요.”
황실 마법사들은 테레제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단 태도로 심각하게 물었다.
“저희에게는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혹시 문제가 되는 겁니까?”
“이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지만, 덫을 위한 장치인 것 같아요.”
과연 그녀는 이 장소가 덫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직접 온 거였다.
아마 저 황실 마법사들만 보냈다가는 전멸하리라는 걸 알고서 일부러 함께 온 거겠지.
“저기 마수들이 보입니다. 생김새를 보니 정화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그 마수들이 분명합니다.”
“이 악랄한 것들……. 죄 없는 마법 동물들에게 이런 끔찍한 저주를 걸었단 말이오?”
“마수들도 우리를 경계하고 있소. 다들 새롭게 개조한 정화 마법 술식으로 준비하시오.”
황실 마법사들은 즉시 마수들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마력이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그게 벌레들을 끌어모을 기폭제가 될 줄도 모르고서.
“잠깐.”
이상한 낌새를 먼저 눈치챈 건 역시나 테레제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동물형 마수들에게 뜯어먹힐 테니까.
“사악하고 부정한 기운으로 물든 것들이여, 정화되어라!”
마법이 발현된 순간, 벌레들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마법사들을 덮쳤다.
“막아라! 전부 막아!”
“버, 벌레들이 마력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보호막이 뚫려요!”
당황한 마법사들이 벌레 마수를 향해 마법을 퍼부어댔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그들의 마법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벌레와 곤충들이 달려들고 있었으니까.
데미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테레제를 주시했다.
테레제는 어마어마한 마력을 사용해서 두꺼운 방어막을 넓게 펼쳤다.
하나 데미안은 이미 그 경우까지 예상하고서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끔찍한 재해 수준의 벌레 마수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랬기에 역시나 테레제의 방어막도 속절없이 뚫리기 시작했다.
테레제는 벌레 마수를 막기 위해 그 자리에서 즉시 놀라운 속도로 새로운 마법들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새로운 방어막으로 교체될 때마다 뚫리는 속도가 줄어드는 건 대단했지만, 그래도 벌레의 수가 너무 압도적이었다.
기어이 테레제의 흰 뺨 위로 마수에게 긁힌 상처가 났다.
사실상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황실 마법사들을 지켜주려고, 그들을 덮친 벌레들까지 상대하다 보니 상처는 점점 늘기만 했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점점 미간을 좁혔다.
테레제는 분명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당장 도망치면 그만인데 어째서 그러지 않고 미련하게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파악한 그녀의 능력상 현재 함께 들어온 다섯 명의 황실 마법사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 설마.’
데미안은 부릅뜬 눈으로 동물형 마수를 확인했다.
벌레 마수들은 마력에 반응한다.
그러니 본래 마법 동물이었던 동물형 마수에게도 당연히 같은 반응을 보였고, 그것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테레제가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마수 때문이었다.
가여워서. 살려주고 싶어서. 자신만 희생하면 전부 지켜내는 게 가능할 것 같아서.
이미 자신도 그녀에게서 받아본 것들이라 너무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황실 마법사들은 초반에 다친 상처만 제외하면 지금은 멀쩡한 상태였다.
‘대체 왜…….’
저런 하찮은 것들이 뭐라고 당신이 희생하지?
이 모든 게 다 뭐라고, 대체 왜!
데미안은 고군분투하는 테레제를 증오스럽게 노려보다가 흙바닥을 짚었다.
우우우우웅―!
그러자 일대에 깔아둔 백마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방출되었다.
마치 빗방울이 땅에서 하늘로 역행하는 듯한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벌레 마수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곧 그것들은 까만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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