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250화 (251/277)
  • 250화

    * * *

    스티그마타는 쉽게 말해서 바이러스였다.

    그것도 이미 이 세계에 깊이 뿌리 내린 바이러스.

    바이러스를 박멸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치료법으로 그들을 몰아붙여 단번에 진압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인류 종말이라는 끔찍한 배드엔딩을 막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을 전부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리야의 협력만 구할 수 있다면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일리야는 인간계에 없는 건지, 그에게 보내려던 종이비행기가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아쉬움을 담은 눈으로 오늘 오전에 새로 뜬 퀘스트를 열어 확인했다.

    [퀘스트: 수도에 발생한 던전 수 20개 미만으로 줄이기]

    ▸보상: +50,000,000코인

    ▸실패: 인간계 멸망

    ※생성된 던전 수: 152개

    던전 개수 200개 달성 시 지옥문이 열립니다.

    …낙심할 여유가 없다.

    검은 하트의 데미안은 절대로 내 사정을 봐주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해서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의 나라면 이 퀘스트가 틀림없이 버거웠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글쎄.

    전략만 좀 잘 짜면 되는 일이었다.

    ‘전에는 목적지를 알고 있어도 이동 수단이 내 두 다리밖에 없어 엄두가 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스포츠카가 생긴 격이지.’

    그때 라울의 염려 가득한 목소리가 상념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말로 여기에 남아있어도 되겠느냐?”

    나는 뒤늦게 그를 배웅하던 중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활짝 미소 지었다.

    “아까 응접실에서 다 말씀드렸잖아요. 여기가 작전 본부라니까요.”

    “그런 험한 일을 왜 네가…… 하아. 되었다. 누굴 닮아 이리도 고집이 센지.”

    라울은 혀를 끌끌 차더니 손에 쥐고 있던 모자를 고쳐 썼다.

    맞은편에서 스콰이어 가문 인장이 양각된 마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말한 방식대로 스티그마타의 집결지를 파악해 상대하마.”

    “감사해요, 아버지.”

    “조심해라. 부디 다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상관없으니 참지 말고 꼭 연락하거라.”

    나는 문득 마음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라울은 내게 보상을 바라지 않는 애정을 쏟아주었다.

    받은 만큼 되돌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는 애정이라는 건 체감부터가 달라서,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막 마차에 올라타려던 라울의 품에 쏙 안겼다.

    “다치지 마세요. 아버지도요.”

    라울은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줄 몰랐다는 듯 움찔 놀라더니, 곧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그래. 그러마.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테레제.”

    “헤헤.”

    “웃기는. 그래도 위험한 일에 자꾸 나서는 건 좋지 않은 행동이야. 걱정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려무나.”

    “네. 조심할게요.”

    띠링!

    [성좌 ‘스콰이어 절대 지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난 정말 이 가족이 너무 좋아]

    그 인사를 끝으로 라울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나는 떠나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스콰이어 나비를 소환하여 경호로 붙였다.

    그렇게 배웅을 끝낸 뒤에는 서둘러 내 개인 응접실로 돌아왔다.

    아직 할 일이 산더미였다.

    맞이할 손님도 남아있었고.

    “다들 잘 왔어.”

    다음 손님은 바로 리비, 레이니, 미모사였다.

    이들은 어제 내가 종이비행기를 보낸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리비는 날 보자마자 마구 흔들어대며 추궁했다.

    “언니! 왜 집으로 안 오고 여기에 있어? 뭔가 문제라도 있는 거야? 방금까지 아버지도 계셨다면서? 아버지는 어디로 가셨어? 왜 언니랑 같이 있지 않은 거야? 응?”

    “자, 잠깐만……. 우욱.”

    띠링!

    [성좌 ‘언니 바보 리비’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네 언니 토하려고 한다; 손을 먼저 놔봐;]

    어찌나 힘이 센지 종이 인형처럼 팔랑팔랑 흔들리느라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미모사는 새침한 얼굴로 내부를 훑어본 뒤 날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잘해주시나 봐? 막 던전을 다녀온 사람치고 얼굴이 반질반질 윤이 흐르네. 지내고 있는 공간도 좋아 보인다? 곧 황후라도 되는 거니?”

    “그런 거 아니야.”

    이미 라울에게 “그래서 황후가 될 거냐?”라는 질문만 귀따갑도록 들은 후여서 이제 황후 소리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다.

    이 와중에 레이니는 맹수의 아가리에 들어온 가엾은 햄스터처럼 벌벌 떨었다.

    “제, 제가 감히 여, 여, 여, 여기에, 와 있어도 되는 거, 걸까요…?”

    나라를 구하는 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평민은 평생 발붙일 일 없는 황궁에 초대받은 사실에 패닉이 온 것 같았다.

    “괜찮아. 폐하께 허락받았어.”

    “폐, 폐, 폐하요?!”

    안심시키려고 한 말인데 레이니는 아예 졸도하려고 했다.

    이러다 유지스가 불쑥 들어오기라도 하면 진짜로 기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모사는 소파에 거만하게 앉아 다리를 척 꼬았다.

    “그래서 우리를 부른 이유가 구체적으로 뭐야? 던전 때문이라는 게 무슨 뜻인데?”

    그 말에 리비와 레이니도 동시에 날 응시했다.

    나는 세 사람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앞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러 다닐 거야. 안으로 진입하지 않고 외부에서 없앨 방법이 있어.”

    그러자 미모사가 펄쩍 뛰었다.

    “뭐?! 그걸 왜 네 멋대로 정해!”

    “그야 네가 가장 감이 좋으니까.”

    내 말에 미모사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무슨 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나랑 리비는 혈통 때문에 특히나 마기에 둔해. 하지만 미모사 넌 본능적으로 악마 계약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감이 뛰어나잖아.”

    “그건 그렇지.”

    마음 인형의 위치를 파악했다고 해서 귀족의 집에 무턱대고 쳐들어갈 수 없다.

    그랬다가는 다급해진 악마 계약자가 던전을 열어버릴 테니까.

    그러니 다른 핑계를 대서 접근한 뒤, 마음 인형을 제거해야 했다.

    “이미 악마와 계약한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음 인형을 멀리하면 던전을 열고자 하는 충동성이 훨씬 줄어들어. 그러니 반드시 해야 할 작업이지.”

    툭.

    나는 내가 제작한 마도구인 크리스털 추를 미모사에게 내밀었다.

    “이건 근처에 스티그마타 표식이 있는 마음 인형이 있을 때 진동할 거야.”

    미모사는 마뜩잖은 눈으로 크리스털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뚱하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내가 해? 일부러 나한테 제일 성가신 임무를 준 거지?”

    “폐하께서는 네가 이 일의 적임자라고 생각하시거든.”

    그런 사실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유지스를 팔아먹었다.

    “폐하께서……? 크흠. 물론 난 처음부터 할 생각이었어.”

    악마보다 유지스를 더 무서워하는 미모사에게 폐하를 들먹이자 바로 효과가 드러났다.

    “폐하께서 오해하시지 않게 똑똑히 말씀드려. 이 미모사 브루니는 황족으로서 당연히 이번 임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말이야.”

    “당연하지. 네 용맹함은 반드시 모두에게 알릴게.”

    그제야 미모사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 가볼까?

    내 시선은 약간 긴장한 듯한 리비에게로 향했다.

    “이 일의 핵심은 리비의 백마력이야. 지금으로서는 외부에서 던전을 없애는 건 리비만 가능하거든.”

    시간이 많이 있었다면 연구를 통해 일반 마법사도 외부에서 던전을 없앨 방법을 찾겠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 내가?”

    리비는 예상치 못하게 본인이 주요 전력이 되자 당황하기는 했어도 금세 침착함을 찾았다.

    “어떻게 하면 돼?”

    과연 이 세계의 주인공다운 기개였다.

    세상을 구할 잠재력이 부여된 캐릭터이니 당연한 걸까?

    ‘다만 지금은 그 잠재력이 개화하지 못했어.’

    아직 게임 시나리오의 중반부에 불과한 시점이다.

    리비가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 시나리오 후반에서나 터질 ‘스티그마타 멸살’ 에피소드를 감당할 능력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리비의 잠재된 능력을 일찍 깨워줄 생각이었다.

    나는 리비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날 믿고 손바닥을 대봐.”

    리비는 뭘 하려는 거냐고 묻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맞댔다.

    그 믿음이 고마움과 동시에 리비를 원래 설정보다 오버 스펙으로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해보자.’

    우리가 맞대고 있는 손바닥을 기점으로 작은 원이 그려졌다.

    그 원이 복잡한 도형과 룬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거대한 마법진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와…….”

    옆에 있던 레이니가 압도된 듯이 나직하게 탄성을 흘렸다.

    미모사도 가뜩이나 커다란 눈망울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띠링!

    [성좌 ‘스겜하자’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와 각성 이벤트를 강제로 진행해버리네 ㄷㄷ]

    나와 리비는 마법진의 영향으로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서로를 응시했다.

    “감각을 기억해.”

    “응.”

    리비의 순도 높은 마력이 마법진으로 흘러들어왔다.

    오직 내 마력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황금빛을 내뿜고 있던 마법진이 점차 은백색으로 물들었다.

    그때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하얀 나비가 튀어나왔다.

    리비도 하얀 나비를 발견하더니 그리로 시선을 빼앗겼다.

    “어?”

    그리고 마법진이 하얀 나비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어, 언니.”

    리비가 당황하며 날 불렀다.

    “괜찮아, 계속해.”

    직감적으로 이게 리비의 능력치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킬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곧 하얀 나비의 날개에 금빛 문양이 생겨났다.

    이윽고 마법진을 모조리 빨아들인 나비가 금빛 가루를 휘날리며 날갯짓하더니 리비의 이마에 흡수되었다.

    띠링!

    [성좌 ‘조용한 관종’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오 치유력 가진 나비가 아예 리비한테 흡수됐네? 버프 효과 있을 느낌 ㅋㅋ]

    미모사와 레이니는 나비를 보지 못하기에 지금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뭐야, 벌써 끝난 거야?”

    “와, 방금 엄청난 마력을 느꼈어요. 리비 후배의 마력인가 봐요!”

    나는 리비의 이마에 생긴 금색 나비 인장을 주시했다.

    ‘대체 저 나비는 뭐지?’

    인장은 선명하게 발광하다가 점차 피부에 흡수되듯 사라졌다.

    BJ악역영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