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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49화 (250/277)

249화

32. 태양궁에 사는 책략가

라울은 정신 나간 황제가 딸을 쉽게 만나게 해주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랬기에 제프리가 마중 나와 안내할 때까지만 해도 태양궁 앞에서 몇 시간이고 무릎 꿇을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그 생각은 제프리가 입에 담은 장소로 인해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증발하고 말았다.

“내일이면 테레제 양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작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오늘은 달맞이 궁에서 머무르시지요.”

“지금 달맞이 궁이라고 했소?”

황후의 손님을 접객하는 별궁을 내주겠다고?

너무나도 노골적인 메시지라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제프리가 말했다.

“눈치채셨겠지만 폐하께서 테레제 양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다. 또한 황후로 맞이하고 싶어 하십니다.”

라울은 잠깐 고민했다.

뻔뻔스러운 개소리를 주절거리는 제프리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갈기면 딸을 만나기도 전에 황실 감옥에 갇히게 될까?

그는 불쑥 치솟는 충동을 애써 점잖게 다스리며 질문했다.

“내가 이딴 개소리를 듣고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오?”

비록 말은 무엄하기 짝이 없게 나와 버렸지만.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공작님.”

제프리는 오랜 시간 황제를 보필하며 수많은 진상을 상대한 경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라울 스콰이어는 특별히 손꼽히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제프리가 라울의 젊은 시절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은밀히 ‘미친개’라 불리던 시절을 말이다.

덕분에 처음부터 라울에 대한 기대치는 현저히 낮았고, 오히려 지금의 점잖은 반응이 놀랍기까지 했다.

제프리는 비록 황제의 장인이 될 남자가 미친개인 건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테레제를 생각하면 감수할만하다 여겼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라울에게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테레제 양이 황궁에서 며칠간 머무르겠다고 직접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입니다.”

라울에게는 끔찍한 비보였다.

“지금 뭐라고 했소? 궁에 남겠다고? 스스로? 폐하께 협박을 받은 게 아니라?”

“생각으로 남겼어야 할 말까지 입 밖으로 내셨습니다, 공작님.”

제프리는 국혼을 치르기도 전에 신부와 함께 웨딩 로드를 걸어야 할 폐하의 장인이 감옥에 갇히지 않도록 지적했다.

하나 그딴 말이 라울의 귀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당장 테레제를 만나야겠소.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할 것이오!”

“그건 곤란합니다. 테레제 양은 현재 황제 폐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라서 말입니다.”

라울은 탄식하며 이마를 짚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라면 치를 떨었으면서.

몇 번이나 절대로 황후가 될 생각이 없다고 부정하더니.

‘설마 던전에서 눈이 맞은 건 아니겠지?’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가정이었다.

반면 제프리는 자신이 모실 미래의 황후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더러운 성격으로는 어디서도 지지 않을 황제를 길들인 공녀를 낳아준 라울에게 더없이 정중한 인사를 올렸다.

“그럼 내일 태양궁에 있는 테레제 양의 개인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속앓이로 하루를 보낸 뒤, 다음날.

라울은 테레제가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태양궁으로 부리나케 찾아갔다.

벌컥!

그는 기분 나쁠 정도로 좋은 방에 마련된 딸의 개인 공간으로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테레제!”

그런데 자신이 애타게 찾는 딸이 보이지 않았다.

이 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아직도 침실에 있나? 황제는 어디에 있고? 설마 둘이 계속 같이 있지는 않았겠지?

그때 긴 소파 뒤에서 딸의 말간 얼굴이 쏙 튀어나왔다.

“아, 벌써 오셨어요?”

소파에 앉은 것도 아니고, 등받이 뒤쪽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테레제의 꼴을 보자,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거기서 뭘 하는 게냐?”

가까이서 보니 테레제는 카펫 위에 놓인 커다란 판자에 앉아 뭉툭한 흑연으로 뭔가를 빠르게 그리고 있었다.

“다중 마법 회로를 그릴 수 있을 만큼 큰 종이가 없어서요.”

이상한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휙! 휙휙휙!

활짝 열어둔 응접실 창문으로 화살촉 형태로 접은 종이가 전서구처럼 쉼 없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건 다 무엇이냐?”

“던전 대책 안건들이요. 오늘 회의가 있어서요.”

“그걸 왜 네가… 아니, 그보다 어떻게 태양궁에서 마법을 쓰고 있는 것이냐?”

역시 테레제가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연회장에서 마법을 사용했던 게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닌 모양이다.

라울은 방금까지 뭘 걱정하며 이곳을 찾아왔는지, 잠깐 잊었다가 화들짝 정신 차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다, 테레제. 어서 나가자꾸나. 이러다 꼼짝없이 황후가 되게 생겼어.”

“그건 괜찮아요. 저도 필요해서 여기에 있는 거라서요. 참. 아버지도 한동안 계속 여기로 오셔야 할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세상에 닥쳐올 종말을 막지 못했거든요.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대응해야 해요.”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딸이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때 라울의 옆에 있는 소파에 뭔가가 툭 떨어졌다.

뭔가 싶어서 확인해 보니 웬 마법서였다.

테레제가 설명했다.

“완독하면 지능을 한 단계 상승시켜주는 책이에요. 리비와 주세페도 꼭 읽으라고 전해주세요.”

툭!

다음으로는 조그마한 상자 하나가 책 위로 떨어졌다.

“그건 제 아공간의 일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마도구예요. 안에 포션이 들어있어요. 병마다 무슨 포션인지, 복용 시 주의 사항도 다 적혀있으니까 확인하세요.”

거기까지 설명을 마친 테레제는 다중 마법 회로를 완성했는지 흑연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오시기 전에 완성해두려고 했는데 좀 늦었어요.”

테레제는 왜 늦어졌는지 설명하지 않고 멋쩍은 미소만 지었다.

라울은 한숨을 푹 내쉰 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됐으니 이리로 와서 무슨 상황인지나 설명해다오. 그래야 아비가 널 폐하라 불러야 할지 말지 정할 수 있을 테니까.”

똑똑.

“공녀님, 베인입니다.”

“들어오세요.”

때마침 베인이 직접 다과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울을 향해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어제 태양궁 일이 바빠 미처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스콰이어 공작님.”

“시종장이 손님을 맞이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쁠 일이 무엇일지 궁금하군.”

라울은 그렇게 조소하며 테레제의 개인 응접실을 훑어보았다.

테레제는 별생각 없는 듯했지만, 라울은 이 안을 채운 것들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장 테레제가 깔고 앉은 카펫만 해도 명마 값과 비슷할 테니.’

그런 카펫에 흑연 가루가 휘날리고 있었다.

주인을 찾아도 단단히 잘못 찾은 카펫이 가엾을 지경이었다.

그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장식장에 놓인 조각상은 황실의 보물 중 하나가 분명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방에 황실의 보물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이 말이었다.

‘황후의 방도 이 정도로 사치스럽게 꾸미진 않을 텐데.’

그동안 베인은 테이블에 차와 다과를 예쁘게 차리고서 테레제에게 얼른 드셔보시라 권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손녀딸을 보는 할아버지 같아서 더욱 심기가 뒤틀렸다.

“이리로 와서 다과 좀 드세요, 아버지. 라즈베리 케이크가 특히 맛있더라고요. 이 초콜릿 무스도요.”

라울은 이런 대우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 딸이 케이크 타령이나 하자, 문득 울화통이 치밀었다.

“너나 많이 먹거라.”

“…? 네.”

테레제는 케이크를 냠냠 맛있게도 먹어 치웠다.

그래도 딸이 모처럼 잘 먹는 모습을 보자 짜증이 가라앉은 라울은 목 막히지 말라고 차도 따라주었다.

“천천히 먹거라. 그러다 체할라.”

“네.”

라울은 손수건으로 초콜릿이 묻은 딸의 입술을 벅벅 닦아주고 나서야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저는 스티그마타를 일망타진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여긴 대책본부죠.”

그는 황제가 청혼했는지, 그걸 받아주었는지 들으러 왔다가 난데없이 스티그마타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가능하겠느냐?”

“네. 가능해요. 반드시 해야만 하기도 하고요.”

테레제는 방금까지 그렸던 다중 마법 회로를 가리켰다.

“저건 마음 인형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마법이에요. 장신구처럼 보이는 크리스털에 새겨서 마도구로 만들려고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냐!”

저 다중 마법 회로가 그런 엄청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니.

심지어 테레제는 그걸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만들어낸 듯했다.

일찍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아이였다.

한데 이건…….

‘대체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눈에 테레제는 인간 세상에 마법을 가져다준 마신처럼 보였다.

정말이지 말이 되지 않는데도 그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스티그마타는 현재 은신처도 들킬 각오로 던전을 엄청나게 생성하고 있어요.”

테레제의 말에 라울은 놀라움을 잠시 뒤로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굳이 수를 세보지 않아도 체감될 정도로 엄청나게 늘고 있더구나. 그 덕에 벌써 스티그마타 놈들을 셋이나 잡아들이기도 했지.”

“지금까지 파악된 던전 수만 100개가 넘어요.”

이래서는 조만간 인간계가 마계에 흡수되어버릴 것이다.

어제까지도 스콰이어 가문의 관할 지역들에서 예사롭지 않은 징조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던전이에요. 아니, 던전이라는 꿈의 세상을 갖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이 문제죠.”

소원을 가진 인간이 존재하는 한 던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단기간에 던전을 빠르게 없앨 방법이 필요해요.”

“방법은 있느냐?”

테레제는 온갖 진귀한 보물로 가득한 방에 태연히 흑연 가루를 날리며 더럽히던 것처럼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던전을 없애려고요. 외부에서요.”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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