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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45화 (246/277)
  • 245화

    알현실에 도착한 유지스는 붉은 카펫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데미안을 쳐다보지도 않고 황좌에 앉았다.

    “카펜터 가문의 데미안이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데미안의 예법은 수준급이었다.

    공작가 영식이 된 만큼 평민으로 살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좋은 옷을 입고, 반듯하게 꾸며놓으니 확실히 태가 남달랐다.

    발할라에서 저 미모 하나로 가장 유명한 학생이라고 했었지.

    유지스는 테레제의 발칙한 짓에 좋았던 기분이 다시금 가라앉는 걸 느꼈다.

    테레제가 저 미모에 반해 데미안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다는 소문이 떠오른 탓이었다.

    역시 저건 예정대로 없애야겠다.

    그래야 속이 편할 듯했다.

    “일어나라.”

    느지막하게 허락이 떨어지자 데미안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유지스가 물었다.

    “카펜터 공작부인이 사망했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그리 대답하는 데미안의 표정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낯빛은 창백했고, 전신을 감싼 우울감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불안하며 초조해 보였다.

    남들은 공작부인이 죽어서 저러는 거라고 착각할 것이다.

    하나 유지스는 착각하지 않았다.

    저 반응은 분명 테레제 때문이다.

    그의 날카로운 직감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곁에 있던 베인 시종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카펜터 영식이 찾아온 이유는 카펜터 공작부인의 장례를 치를 권한을 정식으로 허락받기 위함입니다.”

    “데미안 카펜터가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이니 마땅히 그리해야지.”

    며칠이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후계자로 정식 승인하고 가문 계승 절차도 진행하도록 해. 신전의 공인을 받으면 정식으로 작위 계승식을 열도록 하지.”

    사안이 중대한 것에 비해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유지스는 자신이 말한 내용을 친서로 작성하여 쟁반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이토록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는 것은 의도가 명백했다.

    상대를 무시한다는 뜻이었다.

    베인은 쟁반을 들고 데미안의 앞으로 다가가는 동안 저도 모르게 한숨을 삼켰다.

    무시는 사실 견제이다.

    상대가 신경 쓰이니 일부러 권력을 앞세워 무시하는 거였다.

    데미안은 눈부신 젊음이 있었고 장래를 촉망받는 재능을 가졌다.

    틀림없이 위협적일 것이다.

    연적으로서.

    베인이 쟁반을 내밀자 데미안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친서를 집어 들었다.

    이제 적당한 시기에 이 자리를 마무리하는 말을 서로 건넴으로써 알현을 마칠 순간이 다가왔다.

    그리고 데미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구하지만, 폐하. 혹시 부인은 괜찮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유지스의 입꼬리가 느린 속도로 끌어올려졌다.

    반면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상태였다.

    “부인?”

    질문이라기보다 추궁에 가까운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그제야 데미안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표정으로 덧붙였다.

    “아. 테레제 스콰이어 공녀를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늘 부인이라 부르다 보니…… 죄송합니다.”

    가증스럽다. 처연하게 내리깐 눈이며 초조함이 묻어나는 표정에서 저열한 속셈이 읽혔다.

    이는 실수가 아니라 도발이었다.

    유치하고 수준 낮아서 상대하는 쪽이 외려 더 우스워질 그런 도발.

    그 사실을 잘 아는데, 왜 지고 싶지 않을까?

    유지스는 상대가 걸어온 시비에 똑같은 수준으로 대응했다.

    “테레제는 짐의 침실에서 푹 쉬고 있다. 던전에서 짐의 아내로서 한 일이 많아 고단했을 테지.”

    데미안의 가면에 점점 금이 갔다.

    “아, 테레제가 영식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잠깐 얼굴을 보자더군. 마침 테레제의 개인 응접실 정비가 끝난 참이니 거기서 대화를 나누면 되겠군.”

    치기 어린 20대처럼 낯부끄러운 소리를 늘어놓는데, 몹시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나이를 먹는다고 철드는 게 아니다.

    상대의 기분을 잡친 표정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해졌다.

    하나 데미안은 강적이었다.

    “그렇군요. 폐하께서 그녀를 이리도 극진히 보살펴주시니, 제가 다 황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자격도 없이 지껄이는 주제넘은 감사 인사에 유지스의 미소가 비뚜름해졌다.

    반대로 데미안의 미소는 여름 햇살이 쏟아지는 숲속처럼 싱그러웠다.

    “그럼 지금 당장 테레제를 만나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개인 응접실에서, 단둘이서만요.”

    *   *   *

    나는 미간을 좁힌 채 개인 응접실을 확인했다.

    이곳은 누가 봐도 여자 귀족이 사용하기 좋게 꾸며진 장소였다.

    게다가 침실도 딸려 있었는데, 궁인의 말로는 내가 사용할 곳이라 했다.

    “이런 걸 언제 준비한 거야?”

    태양궁에 이런 공간이 존재했을 리는 없었을 테고, 필시 나 때문에 새로 꾸며둔 곳이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날 집에 보내줄 생각이 없었나 보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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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가 이제 네 집인 걸:D]

    “사양할게요. 가주도 싫은데 황후라니. 저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냥 혼자서 좋아하는 거나 평생 하며 사는 게 훨씬 즐겁다고.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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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요즘 것들은 툭 하면 본인 편한 것만 찾지. 공동체 의식이 없어!]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책임지는 거 싫어하는 사람치고 테레제는 이 세계를 위해 너무 희생하지 않나^^;; 난 좀 이기적인 테레제를 보고 싶은데]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어쩐지 낯설었다.

    ‘내가 그랬었나? 자신이 벌려놓은 불행한 이야기 속에 떨어진다면, 누구든 이 정도 책임감은 가질 거 같은데.’

    난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충분히 날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했었다.

    집이 불편해서 기숙사로 들어갔고, 이 세계에서 도망치려고 때마다 낙원의 문을 열었다.

    이만하면 충분히 회피한 셈 아닌가?

    오늘도 사실 수많은 합의서에 서명하면서 황궁을 벗어나기는 글렀다고 짐작했었다.

    그렇다면 겸사겸사 이곳에 머무르며 내 용건을 처리할 계획이었다.

    ‘8월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 활성화되어 있을 황실에 있는 낙원의 문을 열어봐야지.’

    나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낙원이라…….’

    이제 낙원의 문을 연다는 건 때가 되어서 하는, 약간 관성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삶이 지옥 같아서. 사랑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숨 막혀서. 도망치고 싶어서.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서.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당하기 버거워서.

    그래서 낙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이 세계가 여전히 내게 지옥 같은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신지우로 살던 서울 한복판의 넓고, 깨끗하고, 마당까지 있었던 부잣집 저택이 지옥이지, 악마가 튀어나오고, 던전에 끌려 들어가는 이곳은 외려 천국에 가까웠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는 확실히 신지우와는 다른 인격을 지닌 새로운 개체였다.

    <신의 유희>에서의 나는 더 이상 시선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었다.

    타인이 내게 끼칠 영향이 두렵지 않았고,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나를 내던지는 희생이 기꺼웠다.

    이 상태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랑.’

    그래.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하고 있었다.

    이제는 여기가 나의 세계였고, 내 집이 있는 장소였다.

    떠나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확신이 내 안에 완벽히 자리 잡았다.

    ‘그래도 낙원의 문은 열어봐야지.’

    꽝일 때 나오는 보너스를 놓치는 건 아까우니까.

    달칵.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리고 데미안이 나타났다.

    데미안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꽉 부둥켜안았다.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요, 부인. 제발… 앞으로는 제발 던전에 들어가지 마세요.”

    “난 괜찮아. 별일 없었어.”

    “……거짓말.”

    내게 고개를 파묻고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음울했다.

    “부인은 거짓말쟁이예요.”

    나를 껴안은 힘이 점점 거세졌다.

    “황제를 사랑해요?”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남자는 당신을 사랑하던걸요.”

    죽여버리고 싶어. 분명 데미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데미안의 인물정보를 확인했다.

    [데미안 웨스트]

    나이: 22세

    키: 187㎝

    생일: 1월 31일

    좋아하는 것: 장난감, 요리, 스포츠 경기

    싫어하는 것: 귀족

    호감도: ♥♥♥♥♡

    변한 건 없었다.

    내가 알던 데미안의 정보 그대로였다.

    ‘그래서 이상해.’

    던전의 데미안과 현실의 데미안은 분명 많은 공통점을 공유하는 사이지만, 차이가 있었다.

    ‘장난감과 스포츠 경기를 좋아한다는 특성은 현실의 데미안에게만 해당하는 건데.’

    나는 인물 정보창을 끈 뒤 집착적으로 나를 끌어안고 있는 데미안을 억지로 떨어뜨렸다.

    “데미안, 물어볼 게 있어.”

    어두운 감정으로 얼룩진 표정을 한 데미안이 대답 없이 날 물끄러미 응시했다.

    “혹시 네가 스티그마타의 수장이니?”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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