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유지스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거기 둬.”
어차피 볼 필요도 없는 종이들이었다.
“라울 스콰이어 공작이 입궁하겠다고 알려왔습니다. 알현하시겠습니까?”
“짐은 던전을 나온 후처리로 바쁘니 내일 보겠다고 말해. 테레제도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외부인과 접촉 금지이니 그리 알라고 전달하고.”
“반발이 거셀 텐데요.”
“궁에 머물 곳을 내어주고 거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돼. 아, 태양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궁으로 내어주도록.”
“알겠습니다.”
제프리는 던전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심경이 완전히 달라진 황제를 묘한 눈으로 힐긋 보았다.
유지스가 테레제를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진작 알았다.
다만 그게 황후 자리에 앉히겠다는 결심으로 뒤에서 계략을 부릴 정도의 마음은 분명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다가 영영 궁에 앉힐 생각이신 듯한데.’
유지스는 습관처럼 시가를 꺼내 물었다가 미간을 찡그리더니 도로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는 시가도, 한 잔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마뜩잖은 듯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진 유지스가 문득 떠올랐다는 투로 제프리에게 말했다.
“카펜터 공작부인이 던전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예. 아직 던전 문이 열리지 않았으니 사망하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닌 카펜터 공작부인이 살아나오기란 불가능하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잠정 사망 상태로 여기고 있었다.
“묘하군.”
카펜터 공작은 딸자식을 잘못 키운 죄로 황제를 사지에 내모는 위험에 빠뜨렸다.
그 사실은 온 제국민을 분노케 만들었고, 연일 카펜터 공작을 화형에 처하라는 과격한 시위가 잇따른다고 했다.
“우연이라기에는 참 절묘하지 않은가?”
이로써 카펜터 공작가는 갑자기 굴러들어온 혼외자식인 데미안이 물려받게 생겼다.
이 모든 게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면 데미안은 행운을 넘어 신의 편애를 받는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제프리는 황제가 던전에 있는 동안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데미안 카펜터 영식의 지난 행적을 조사했습니다. 뜻밖에도 신전과 연계되어 있더군요. 콘스탄틴 대신관이 운영하는 봉사단체에 몇 번 참여한 기록이 있었습니다.”
“대단히 건실하군.”
유지스는 비아냥거리며 지난 무도회에서 본 데미안을 떠올렸다.
테레제가 발렌시아 후작과 춤을 추고 있을 때였던가?
그들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표정은 상심을 넘어서 섬뜩했다.
결코 평범한 삶을 사는 청년이 보일 눈빛이 아니었다.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콘스탄틴 대신관이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실종 신고를 한 상태인데, 어디에서도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군요.”
“그 말은?”
“납치되었거나 살해당한 후에 시체가 은폐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상하게 왜 그 범인이 데미안 카펜터 같을까?
유지스는 데미안을 잘 알지는 못했으나 개인적으로 몹시 싫어했다.
“조사해봐. 그리고 데미안 카펜터와 연관 지어.”
“알겠습니다.”
진실은 아무래도 좋다.
그럴싸하게 연결 지을 요소들이 있으니 기꺼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테레제의 마음에 쓸데없는 파문을 일으키는 존재를 줄일 수만 있다면, 딱히 수고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유지스는 다음으로 궁금한 사실을 물었다.
“테레제가 머물 곳은 준비했나?”
“예. 가장 실력 좋은 타피시에를 불러 실내를 장식해두었습니다.”
그러자 내내 심드렁하거나 불쾌해하는 등 부정적인 표정만 짓고 있던 유지스의 얼굴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더 보고할 사안은?”
“없습니다.”
유지스는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었던 사람이 뭍으로 향하듯 내내 노려보고 있던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미소가 걸린 얼굴, 기대감이 실린 걸음걸이에서 제프리는 알 수 있었다.
황제는 사랑에 빠졌다.
그가 알기로 상당히 늦은 첫사랑이었다.
* * *
“아무래도 난독증이 온 것 같아요.”
황실 변호사는 내가 난독증을 호소하는데도 냉정하게 서명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읽으셨습니까? 동의하시면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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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줄 요약하라고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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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은 문과 아님? 이 정도면 그냥 공부가 싫은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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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요. 그리고 황실 법도에 글씨 크기 제한이라도 있는 건가요? 왜 작고 빽빽한 글씨로 일부러 가독성을 낮추셨죠?”
의도적으로 가독성을 떨어뜨려서 얼렁뚱땅 서명하게 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내 합리적 의심에 황실 변호사는 진상을 처리하는 베테랑 접객원처럼 응대했다.
“황실에서 사용하는 계약서 종이는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최고급품입니다. 해서 중요한 기록서도 최대한 작은 글씨로 작성해 종이를 아끼고 있습니다만. 혹시 국세를 낭비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공녀님?”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날 것 같은 글씨 크기에 불만을 토로했다가 피 같은 세금을 낭비하는 철부지가 되어버리다니.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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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사무용품 같은 소모품 비용이 운영비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긴 함]
“……돋보기 없어요?”
“다 읽으셨으면 서명하세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나는 어려운 단어가 깨알 같은 글씨로 줄줄이 적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계약서를 원수처럼 흘겨보았다.
‘애초에 황제가 던전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재발 방지 대책에 대해 왜 내 견해를 요구하냐고!’
서명만 서른 번쯤 했을 때, 응접실 문이 열리며 이 사태의 장본인인 유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실 변호사가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셨습니까, 폐하. 그렇지 않아도 공녀께서 막 던전 관리부 협조문에 서명을 완료하셨습니다.”
나 역시 떨떠름하게 일어나 꾸벅 예를 갖추었다.
“벌써 그만큼이나 했나? 테레제가 부지런하게 임한 모양이군. 그래도 밥은 먹이고 해야지.”
고도의 훈련을 받은 궁인들의 시중을 받은 유지스는 얼굴에서 반질반질 윤이 흘렀다.
거기다 섬세한 자수가 놓인 값비싼 옷감으로 지은 옷을 입으니, 제왕의 품위가 절로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는 여유가 느껴지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본인 옆자리에 앉히더니 황실 변호사에게 손짓했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이 미친 황제가 던전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방탕하게 굴자,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러자 유지스의 눈썹이 대번에 매서운 모양새로 들어 올려졌다.
“이리로 안 와?”
“네…? 왜요…?”
“왜요?”
“여기는 던전이 아니잖습니까, 폐하. 부디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체통이라 간곡히 돌려 말했지만, 그냥 정신 좀 차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유지스는 제정신이 들 예정이 없는 건지, 황실 변호사가 아직 나가지도 않았는데 헛소리를 연달아 지껄였다.
“그러니 더더욱 짐의 말을 따라야 하지 않겠나? 난 황제고 넌 내 신하니까.”
황실 변호사는 경악한 눈빛으로 우리를 힐끗힐끗 훔쳐보다 응접실을 나갔다.
황궁에 염문설을 확정 지을 새로운 소문이 퍼지겠구나.
이제 이 정도로는 울적하지도 않았다.
유지스는 괴물 같은 힘으로 내 허리를 당겨 순식간에 본인 허벅지 위에다 앉혔다.
“폐하.”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니,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한심한 소리를 했다.
“너 때문에 술을 못 마셨더니 머리가 아파.”
“왜 저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말씀이시네요. 마침 저도 머리가 아프던 참인데. 손도 아프고요.”
“손은 왜?”
유지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내 손을 살폈다.
계속 펜을 쥐고 있느라 마디가 붉어진 손을 발견한 그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한숨지었다.
“쉬엄쉬엄할 것이지.”
그는 아프지 않은 세기로 내내 펜을 쥐었던 손을 주물러주었다.
‘생각보다 마사지 솜씨가 나쁘지 않네.’
뻐근했던 손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이 꽤 마음에 들어서 나도 모르게 전신의 긴장이 풀렸다.
나는 나른하게 유지스에게 기댄 상태로 입을 열었다.
“서둘러서 해야죠. 가족들이 저를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얼른 얼굴도 비쳐야 하고요.”
황실에서 내 귀환 소식을 가문에 알렸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을 비춰 안심시키는 게 나을 듯했다.
계속해서 내게 험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통에 가족들이 점점 예민해지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얼마나 놀랐을까?
유지스는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아프게 마사지했다.
“아! 아파요, 폐하!”
“자꾸 떠날 생각만 하는 네가 괘씸해서 주는 벌이니 달게 받거라.”
“악! 진짜 아프다니까요?”
“아파하라고 하는 건데 안 아프면 쓰나.”
유지스는 코웃음 치면서도 어느새 빨개진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황후 자리를 탐내는 탐욕스러운 여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네.
“그런 여자였다면 제 목은 일찍이 달아났을걸요.”
내가 진심으로 황후 자리에 관심이 없었기에 유지스도 의심 없이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유지스는 묘한 기색을 머금은 얼굴로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예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짐에 대해 참 자세히도 알아. 꼭 평생을 지켜본 사람처럼.”
“…누구나 다 알걸요? 폐하께서는 워낙 솔직하신 분이잖아요.”
“짐이 솔직하다고? 난생처음 듣는 말이군. 가장 순진했던 첫 번째 생에서도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은 없는데.”
그는 쓸데없이 이런 부분에서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