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 * *
유지스를 데미안으로 착각해 말실수한 일은 확실히 우리 사이의 분기점이 되었다.
나는 던전을 나가는 데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또한 좀 더 아내답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문제는 아내답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그래서 일단 거만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어 앉은 유지스의 목에 크라바트를 매주고 있기는 했다.
남편의 넥타이를 매주는 아내의 모습을 매체에서 본 것 같아서였다.
“대충 해.”
유지스는 기어이 외출 준비를 시키는 내가 못마땅한지,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크라바트를 매줄 동안 나를 본인 무릎에 앉혀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건 마음에 들어 했다.
“나가면 민츠버그 공작에게 꼭 사과하시고요.”
“헐벗은 아내를 음탕하게 쳐다본 그 새끼를 죽이지 않은 것으로 내 관용은 다 했어.”
“상대가 민망해하는 거랑 음탕한 눈빛을 좀 구분해주시겠어요?”
그러자 유지스가 대놓고 날 멍청이 취급했다.
“네가 뭘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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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뭘 알아]
어이가 없었다.
유지스는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또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하… 짜증 나.”
“그래도 참아요. 민츠버그 공작을 죽이면 저희도 무사하지 못해요.”
“대체 세실리아는 왜 이렇게 복잡한 상황을 만든 거지? 공녀보다 황녀가 되는 쪽이 더 좋지 않나?”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부모를 원했을 테니까요.”
그러자 유지스가 돌연 조용해졌다.
‘아차.’
나는 실수했다는 생각에 황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유지스는 내 기색을 알아차린 듯 피식 웃었다.
“왜. 또 내가 가엾어졌나?”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지스가 시선을 마주쳤다.
“이제 내 기분 풀어주는 방법 알잖아.”
그 말에 고개를 살짝 숙여 쪽 소리 나도록 입술에다 키스했다.
유지스는 만족한 얼굴로 웃었다.
“좋은데, 이거. 역시 공놀이 구경보다는 나와 침대에서 노는 게 더 낫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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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감해… 이불 밖은 위험하니까 나가지 말자]
나는 그의 무릎에서 냉큼 내려와 준비한 재킷을 내밀었다.
“이제 재킷 입으세요.”
유지스는 불만스러운 한숨을 내쉬며 재킷에 팔을 꿰다가 질 나쁜 생각을 떠올린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내가 부인의 몸단장을 도우면 되겠군.”
“이미 늦었어요. 경기 전반전 중에라도 도착하려면 사용인들한테 몸단장을 맡겨야 해요.”
시간이 빠듯한 걸 알면서도 유지스의 기분을 풀어주느라 직접 외출 준비를 도왔던 거였다.
그는 결국 마뜩잖게 내 말에 수긍했다.
간신히 유지스의 품을 벗어나 바쁘게 몸단장을 마쳤다.
그동안 유지스는 패트릭과 잘 이야기가 됐는지, 마차에 타기 전에는 꽤 괜찮은 분위기가 흘렀다.
“아까는 정말 놀랐었습니다. 하하! 조금 늦기는 했어도 이렇게 다 같이 경기장에 가니 좋군요.”
패트릭은 호탕하게 웃으며 곱게 차려입은 조안나를 끌어안았다.
몸이 좋지 않아 오늘 불참하겠다던 조안나는 정오가 지나자, 완벽하게 꾸민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민츠버그 부부와 같이 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경기장은 관람객으로 사람이 붐벼서 괜히 마차 여러 대를 타고 가는 것보다는 한 대로 같이 이동하는 게 낫다기에 그러기로 했다.
나는 조안나에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로드리고 부인.”
조안나는 대화가 이어질 여지 없이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고서 더는 말 걸지 말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겼다.
뭐, 당연한가? 유지스의 아내인 내가 미워 보이겠지.
패트릭은 분위기도 모르고서 본인이 응원하는 ‘스팅’이라는 팀이 얼마나 대단한지, 경기장으로 가는 내내 열정적으로 떠들어댔다.
급기야 자신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늘 제복 안에다 스팅 유니폼을 받쳐 입는다고 고백까지 했다.
조안나는 못 말린다는 듯이 패트릭을 보며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아이 같다니까요?”
패트릭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조안나의 뺨에 쪽쪽 키스했다.
우욱……. 가까이서 이런 걸 보니 속이 좋지 않았다.
조안나는 유지스에게 항의하듯 보란 듯이 패트릭과의 애정을 과시했다.
“어머, 여보. 잠깐만요.”
그녀는 괜히 패트릭의 크라바트를 반듯하게 고쳐주거나 그의 뺨을 쓸어 만졌다.
애석하게도 그 모든 행동은 유지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유지스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역시 마차를 따로 타야 했는데.”
그는 동승객이 있는 것도 모자라 사방이 탁 트인 지붕 없는 마차가 영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포기하라는 뜻으로 햇빛을 가리려 쓰고 있던 양산을 그에게 기울여주었다.
“볕이 뜨거워요.”
그런데 유지스가 갑자기 양산을 아래로 당기더니 내게 키스했다.
다행히 양산에 우리 모습이 가려서 민츠버그 부부에게 이 민망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저들이 바보도 아니고, 갑자기 시야를 가리는 양산 아래에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미쳤어요?!”
나는 기겁하며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소리쳤다.
유지스는 뻔뻔스럽게 아래로 당기고 있던 양산을 놓았고. 우리의 모습이 다시금 민츠버그 부부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더 따지기도 민망한 상황이라 입술을 꾹 다무는데, 유지스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왜 같은 마차에 타는 걸 허락했어.”
둘이서만 마차에 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요.
내가 눈을 흘기자 유지스는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날 놀리는 게 재밌나?’
하여간 인성 하나는 최고로 개차반이었다.
우리가 양산 아래에서 키스한 후부터 조안나는 속상한 기분을 도저히 숨길 수 없는지, 경기장에 도착할 때까지 길거리만 쳐다보았다.
패트릭은 아내가 우리 때문에 기분 상한 건 알아도, 구체적인 이유는 몰라서 머쓱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게 불편한 기류 속 마차가 경기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극진하게 대우받으며 VIP석으로 가서 앉았다.
나는 직원을 불렀다.
“여기 맥주 두 잔이랑 간단한 안줏거리 좀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유지스는 내가 술을 주문한 게 뜻밖이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맥주 마시려고? 칵테일이 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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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 칵테일 같은 소리 하네. 누가 경기장에서 그런 걸 마셔? 맥주가 근본인 거 몰라?!]
나와 철학이 비슷하군.
“맥주가 좋아서요. 당신도 마셔봐요.”
유지스는 독한 술만 입에 댔기에 맥주는 딱히 즐기지 않았다.
늦게 취하는 데다가 쓸데없이 배부르기 때문이다.
곧 직원이 스낵류와 함께 시원한 맥주를 가져다주었다.
하. 이게 얼마만의 술이야?
유지스 때문에 나까지 괜히 금주하게 되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맥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는데 정말이었군.”
유지스는 진귀한 걸 보는 사람처럼 흥미롭게 구경하더니, 나를 따라 맥주를 마셔보았다.
“나쁘지 않네.”
그 정도면 극찬이었다.
잠시 뒤, 스포츠 도박사가 이곳으로 찾아왔다.
“무조건 스팅에 배팅하시죠. 지금도 스팅이 1:0으로 앞서고 있잖습니까!”
패트릭은 본인이 응원하는 팀에 최대 배팅액까지 걸었다.
나는 스포츠 도박에 흥미를 보이는 유지스에게 조언했다.
“스팅 말고 울프 팀에 최대로 배팅하세요.”
유지스는 흔쾌히 내 조언을 따라 울프 팀에 최대 배팅액을 걸었다.
결과는 당연히 우리 팀이 설계한 대로 스팅이 지고 울프가 이겼다.
날씨는 화창했고 경기장은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했다.
내 손에는 맥주가 들려 있었고, 우승팀을 맞추어 짭짤한 수익도 올렸다.
이 돈은 던전을 클리어해도 고스란히 내 인벤토리에 보관될 예정이었다.
“아내 말을 듣길 잘했군.”
유지스도 도박에서 큰돈을 딴 게 재밌었는지, 웃음을 터뜨리며 내 뺨을 감싸 쥐고 키스했다.
여기저기서 울프 팀의 우승을 바란 커플들이 기쁜 순간을 만끽하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키스하고 있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본격적인 것 같은데…….
나는 민츠버그 부부를 의식해서 유지스를 떨어뜨리려 했으나, 그는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그때 귓가에 들리는 함성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이 느껴졌다.
“불이야! 불이 났다!”
“아악!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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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이 났다는 말에 우리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상황을 확인했다.
“…누가 작정하고 불을 지른 모양입니다!”
패트릭의 탄식에 나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하드 모드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스팅이 진 사실에 분노한 팬이 작정하고 방화하는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만일 다른 남자주인공이면 어떤 대피로로 갈 것인지 선택하는 퍼즐 게임으로 넘어가지만. 상대가 유지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유지스와 함께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 방화가 일어나면, 무조건 게임 오버였다.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번지는 불이 바로 아래까지 다가와 있었다.
패트릭과 조안나는 이미 우리를 버리고 도망쳤다.
“헉…!”
그 사이 유지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폐하! 정신 차려요, 제발. 제가 살려줄게요. 무조건 살릴 테니까 정신 차리라고!”
나는 유지스의 뺨을 붙들고서 필사적으로 빌었다.
불은 문제가 아니었다.
이 던전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지만, 내게는 해당하지 않았으니까.
진짜 문제는 유지스 그 자체였다.
“유지스!”
내 비명 같은 외침에도 유지스는 기어이 트라우마에 잡아먹혔다.
시야가 뒤바뀐다.
이곳은 더 이상 축구 경기장의 VIP석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려놓은 그림의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엉망으로 휘저어버린 것처럼 세상이 얼룩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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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데 이거? 왜 갑자기 시공간이 뒤틀리고 있는 건데?!]
왜기는 왜야!
“시간이 되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렇죠!”
유지스는 ‘회귀자’였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