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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35화 (236/277)
  • 235화

    *   *   *

    날이 밝았을 때 흐릿한 의식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실리아 아가씨는 저희가…”

    “그럼 외출 준비를…”

    사용인들의 목소리가 재잘재잘 귓가로 쏟아졌으나 잘 인지되지 않았다.

    이제 일어나야 하는 시간인가.

    하나 눈이 떠지질 않는다.

    힘들게 청한 잠은 깨어날 때도 말썽이었다.

    정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축 늘어져서 의식을 깨워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때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테레제는 좀 더 자게 둬.”

    반문을 허락하지 않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곧 하나의 기척만 내게 다가왔다.

    침대가 묵직한 체중에 푹 꺼진다.

    곧 머리가 살짝 들리며 폭신한 베개가 아닌 높고 딱딱한 것을 베고 눕게 되었다.

    나는 몸을 뒤척여 좀 더 편한 자세로 누웠다.

    좋은 향기가 난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바람이 이불을 덮지 않은 상체를 부드럽게 쓸었다.

    선명해지던 의식이 다시 차분하게 내려앉는데, 자꾸 귀찮게 만지작대는 손길이 잠을 방해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하지 마, 데미안…….”

    “…….”

    움직임이 뚝 멎었다.

    그 덕에 방해 없이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이었다.

    “아!”

    갑자기 입술을 물어뜯기는 최악의 방식으로 잠이 싹 달아났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황당함과 약간의 분노 상태로 눈을 떴을 때. 나보다 더 화가 난 듯한 유지스의 두 눈이 코앞에서 마주쳤다.

    그는 내게 눈빛으로 화내고 있었다.

    “…뭐예요, 갑자기?”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내가 미간을 찡그린 채 항의하자. 유지스는 픽 비웃음 짓더니 나를 뒤덮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가운을 여며두지 않아 드러난 가슴팍과 근육 위로 핏대 선 복부가 심히 당혹스러웠다.

    유지스는 멋대로 방의 서랍을 뒤적이더니, 열쇠를 꺼내 시가를 보관한 문을 땄다.

    “이건 어젯밤 봉사한 대가로 가져가지.”

    심술과 짜증이 잔뜩 어린 목소리였다.

    그는 열쇠를 침대에 툭 던지고는 몹시 쌀쌀맞게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졌다.

    좀처럼 황당함이 가시지 않았다.

    “아니, 진짜 왜 저러냐고.”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건 나도 쉴드 못 치겠다;]

    무슨 소리지? 뉘앙스만 보면 내가 잘못했다는 것 같은데.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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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쩝 아침부터 달달하니 좋았는데 왜 거기서 데미안이 튀어 나와ㅠ]

    띠링!

    [성좌 ‘데미안이 진짜 남주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데미안이 정실이라는 뜻이지]

    “……무슨 소리예요? 여기서 데미안이 왜 나와요?”

    띠링!

    [성좌 ‘테레제의 하수인’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잠결에 자꾸 만지작거리며 성가시게 구는 유지스에게 “하지 마, 데미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지스가 방금과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나는 경악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유지스더러 데미안이라고 불렀다고?’

    “미쳤나 봐.”

    나도 모르게 한 침대를 오랫동안 함께 쓴 데미안과 유지스를 착각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헷갈릴 만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붉은 하트 3개의 유지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리라.

    그제야 그의 분노가 이해되었다.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허겁지겁 방을 나갔다.

    “세상에, 마님! 잠옷 차림으로 어딜 가세요?!”

    “옷은 갈아입으셔야죠!”

    내 몸단장을 도우러 침실로 오던 사용인들이 깜짝 놀라며 나를 멈춰 세우려 했다.

    “잠깐 남편한테 다녀올게!”

    “네에? 마님, 잠깐…!”

    유지스의 개인 침실로 가는 길에 사용인 말고도 패트릭과 마주쳤다.

    그는 날 발견하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어, 아, 오늘 아내는 못 가겠다는 말을, 근데 왜 그런 차림으로…”

    “지금 급해서 나중에 들을게요. 미안해요.”

    나는 패트릭도 얼른 지나쳐 유지스의 개인 침실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폐…!”

    다급하게 튀어나온 호칭이 완성되기 전에 얼른 수습했다.

    “여보,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해요.”

    “…….”

    “여보?”

    똑똑똑. 노크도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로드리고 부인.”

    그때 어느새 뒤따라온 패트릭이 날 불렀다.

    그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어 손에 쥐고 있었다.

    “이거라도 입으십시오. 그런 차림은 좋지 않습니다.”

    “아…….”

    나는 시선을 내려 차림을 확인했다.

    얇은 슬립 원피스는 몸에 딱 달라붙어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다.

    어제 잠들기 전에는 분명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잠결에 더워서 벗어버린 듯했다.

    확실히 남에게 보일 차림은 아니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들어 패트릭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재킷을 받아들 때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다면 제게…….”

    벌컥!

    그때 침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유지스가 나왔다.

    그는 나를 방 안으로 끌어당기며 패트릭에게 말했다.

    “당장 꺼져.”

    “여보!”

    쾅!

    내가 왜 그러냐고 따지기도 전에 유지스는 몹시 무례하고 몰상식하게 문을 닫아버렸다.

    던전 주민을 함부로 대하는 건 좋지 않다.

    특히 민츠버그 공작가 사람들은 플레이어에게 직접적으로 공격을 가할 수 있는 특수한 위치였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둘만 남자마자 그의 손을 잡았다.

    “제가 실수했어요.”

    “무슨 실수?”

    “당신을 데미안이라고 부른 거요.”

    “그게 왜 실수지?”

    “사람을 착각했으니까요…?”

    “아아. 그러니까 내가 고작 데미안으로 착각 당해서 이렇게 미친놈처럼 굴고 있다고 말하는 건가?”

    ……아닌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유지스가 싸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이유 때문인 거 맞아.”

    “…….”

    “이상하게 화가 나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그의 호감도를 확인해보았다.

    [호감도: ♥♥♡♡♡]

    와…….

    띠링!

    [성좌 ‘개복치 황제 유지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닉값 지렸다]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으니, 유지스가 차갑게 말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

    특유의 고압적인 명령조였다.

    내가 머뭇거리며 문으로 한 발짝 옮겼을 때, 그가 짜증 가득한 한숨을 내쉬더니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내 몸을 감쌌다.

    “그리고 이딴 꼴로 한 번만 더 돌아다니면 방에 가둬놓을 줄 알아.”

    갑자기 억울해졌다. 기분도 나빴다.

    누구는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러 온 건데.

    상대 이름을 헷갈렸다는 거 외에 뭘 더 잘못했다고 이런 화풀이를 당해야 하지?

    “……제가 내기에서 이겼잖아요.”

    “뭐?”

    나는 눈을 홉떴다.

    “어떤 순간에든 남편답게 행동하는 게 내기 조건이었잖아요. 그런데 왜 지금 황제 폐하처럼 행동하세요?”

    “하.”

    유지스가 기가 막힌 듯 실소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저를 존중해서 대해주세요.”

    내 요구를 들은 그가 화를 꽉 억누른 목소리로 경고하듯 내게 쏘아붙였다.

    “아내가 전에 만나던 남자와 날 착각했는데. 이 정도면 남편답게 돌아버릴 사유로 충분하지 않나?”

    “……방에 가둬버린다는 말은 심했어요.”

    “겨우 그딴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이군. 그런데 진심이라서 취소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애초에 멀쩡한 대화를 시도한 내가 바보였지.

    이 사람과 나는 맞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

    미안했던 감정은 어느새 오기로 돌변해, 내 미성숙한 부분을 한껏 도드라지게 만들어 괜한 자존심을 부리게 했다.

    서로를 향한 분노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지금 당신이 화가 난 건 본인을 ‘유지스 아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이해해요. 다만 유지스는 당신을 진심으로 아내라 생각하게 된 것 같군요.]

    성좌의 설명에 갑자기 화가 탁 풀렸다.

    ‘…맞아.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유지스에게 사과하러 온 거였는데.’

    그러다 그의 폭력적인 행동들에 미안한 감정이 증발하고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이유를 생각해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나도 모르는 새 유지스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점차 생겨나고 있었던 거다.

    어제의 갑작스러운 키스가 당혹스럽기는 해도 불쾌하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였다.

    그래. 그래서였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분노한 유지스가 나를 거칠게 밀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서 뒤꿈치를 들었을 때.

    그가 들끓는 소리를 흘리며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말꼬리 잡기가 특기인 유지스에게 미안하다고 백 번, 천 번을 말해봤자 분위기만 더 험악해질 뿐이다.

    그에게는 그에게 맞는 방식을 사용해야 했다.

    말보다는 행동.

    그게 유지스의 분노를 푸는 열쇠였다.

    이를 잊을 만큼 나도 실망감에 휩싸여있었다.

    잠깐 입술을 떨어뜨린 유지스가 자존심을 구겼다는 표정으로 나를 매섭게 비난했다.

    “사내를 홀리는 데 도가 텄군.”

    “사내가 아니라 당신이겠죠.”

    “시끄러워.”

    유지스는 듣기 싫다는 듯 내가 더 말하지 못하도록 거칠게 입 맞췄다.

    그의 분노는 정오가 되어서야 완전히 풀렸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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