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유지스는 테라스에 비치된 카우치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조안나가 손수건을 쥐고서 제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세상에, 식은땀 좀 봐. 악몽을 꾸셨나 봐요.”
“괜찮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매섭게 손을 쳐내버리고 싶었다.
하나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고개를 옆으로 트는 정도로 거부한 뒤 그녀 너머를 힐끗 곁눈질했다.
“테레제가 안 보이는데.”
앞에서 알짱거리며 시야를 방해하지 말고 꺼지란 소리에 조안나의 무구하던 표정이 뻣뻣해졌다.
그녀는 상심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옆자리로 물러났다.
“…로드리고 부인은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어요. 저는 볕을 쬐면 현기증이 심해져서 쉬고 있고요.”
유지스는 대꾸도 하지 않고 나른하게 테레제를 관찰했다.
조안나가 비켜준 덕분에 마침내 풀밭을 내달리는 테레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햇살에 익은 뺨이 잘 익은 과일 같았다.
깨물면 단물이 줄줄 흐를 것 같아서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땀에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는 동작이 평민처럼 본데없다.
허리끈을 풀어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는 건 또 어떻고.
황궁에서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칠 게 많은 여자였다.
그래도 봄에 보았을 때보다 예법이 는 걸 보면 학습 능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때 우연히 테레제와 눈이 마주쳤다.
“…….”
유지스는 잠깐 현실을 잊었다.
사방에 깔린 부정한 것들이 내뿜는 사악한 기운 속에 덩그러니 놓인 테레제는 던전 밖에 있을 때보다 외려 더 튀었다.
본질을 보는 그의 눈에 비친 테레제는 이상하고 신비했다.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뭐랄까…….
신을 마주한다면 저렇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망상마저 들 정도였다.
한창 테레제를 두고서 엉뚱한 생각에 잠겨있는데, 조안나가 말을 걸어왔다.
“부인을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하아. 정말이지 상대하기 귀찮았다.
하지만 테레제와 한 내기에서 졌으니 남편 된 도리를 다할 수밖에.
유지스는 손님을 응대하기에는 지나치게 방만했던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무심하게 툭 물었다.
“그렇게 보입니까?”
사랑이라니,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조안나는 어떻게든 저와 대화하고자 그나마 자신이 관심을 보이는 테레제를 걸고넘어진 것에 불과했다.
이딴 게 사랑일 리가.
유지스가 추궁하듯 눈을 빤히 마주치고 있으니, 조안나의 뺨이 점차 붉어졌다.
“로드리고 공작님은 워낙 다정하시니까요.”
저 여자는 제 껍데기에 단단히 홀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 저택에 들어온 날부터 계속 본인 딸은 내버려 두고 호시탐탐 제게 접근한 걸 테지.
“제가 다정했습니까?”
이번 물음에는 조안나가 약간 토라진 얼굴을 했다.
“네. 제게는 쌀쌀하시지만요.”
그녀는 괜히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저를 힐끔거렸다.
“저는 공작님과 친근하게 지내고 싶어요. 곧 가족이 될 사이잖아요, 저희.”
그러면서 배시시 웃는다.
본인의 외모가 타인의 눈에 얼마나 매력적으로 비치는지 잘 아는 사람의 태도였다.
유지스는 문득 짜증이 치솟았다.
이딴 미물조차 잘난 자존심도 접고서 추잡하게 접근해대는데, 테레제는 어떠한가?
자신과 잠깐 눈을 마주치고 있던 테레제는 ‘아, 이제 낮잠에서 깬 모양이네.’라는 표정으로 미련 없이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으레 짓는 미소조차 없었다.
“쯧.”
하여간. 아무것도 모른다는 맹한 얼굴로 돌아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테레제는 조안나처럼 무구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바보였다.
“왜 그러세요, 공작님?”
조안나는 유지스가 테레제를 보고 혀를 차는 모습에 화색이 감도는 얼굴로 관심을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민거리가 있다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사교계에 일이 생기면 다들 제게 상담하곤 하니까요.”
“그렇습니까.”
전혀 궁금하지 않은 내용에 심드렁하게 대꾸하는데도, 조안나는 꾸역꾸역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침실을 같이 쓰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혹시 그 문제인가요?”
은근히 이간질까지 하는 게 조금 웃기기도 했다.
“타인과 방을 함께 써본 적이 없어서 각자 침실을 따로 쓰고 있습니다만, 이게 문제가 됩니까?”
“아아…. 실은 저도 남편이랑 방을 따로 쓰고 있어요. 서로의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하잖아요.”
유지스는 이 영양가 없는 대화에 신물 났다.
이럴 시간에 시가나 한 대 피우고 싶었다.
그러나 테레제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흡연과 음주를 금지하는 바람에 모든 취미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래서 최근 새롭게 붙인 취미가 이 테라스에서 시간을 죽이며 아이들과 놀아주는 테레제를 구경하는 거였다.
이마저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을 때, 후원으로 화려한 제복 차림의 남자가 테레제에게 접근하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저건.”
툭 내뱉은 음성에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적개심이 그득했다.
그의 날 선 반응에 놀란 조안나도 고개를 돌려 후원을 확인했다.
그녀는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제 남편이네요. 일이 바쁘다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그러고 보니 민츠버그 공작은 사업 때문에 좀 늦게 저택으로 방문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하.”
유지스는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아무리 일찍이 초대했던 손님일지라도 민츠버그 공작이 자신보다 계급이 낮았다면. 제집 안방 드나들듯 후원에 들어올 순 없었을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서 로드리고 공작가보다 민츠버그 공작가의 권세가 더 막강하다는 뜻일 터.
지닌 권력 때문에 살해는 당해봤어도, 누군가보다 아래 서열로 취급된 적 없었는데.
상당히 신선하고 개 같은 경험이었다.
좋았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조안나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로드리고 부인이 제 남편을 이리로 데려올 테니,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글쎄요.”
둘이서 하하 호호 웃으며 대화하는 꼴을 언제까지 지켜보라고?
유지스는 성큼성큼 후원으로 나갔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민츠버그 공작의 호감 어린 표정이나 유쾌하게 떠들어대는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의 접근을 먼저 알아차린 쪽은 민츠버그 공작이었다.
“아! 혹시 로드리고 공작이십니까?”
민츠버그 공작의 말에 테레제도 그를 돌아보았다.
워낙 웃음이 끊이질 않고 있길래, 틀림없이 테레제도 민츠버그 공작과의 대화에 즐거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실상을 보니 테레제는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선 외향인에게 기가 쪽 빨려 마른오징어처럼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막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녀가 당연한 태도로 제게 손을 쭉 뻗어왔다.
유지스 역시 당연하게 그 손을 잡으려다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내기가 끝나고 며칠이 흐르는 동안 서로 만나기만 하면 손부터 잡았다. 그게 벌써 무의식에 박혀 습관이 되었다.
그녀에게도, 자신에게도.
“어떻게 딱 맞춰서…….”
테레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유지스가 충동적으로 그녀의 두 뺨을 감싸 쥐고서 이마에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떨어뜨리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테레제에게 대답했다.
“널 보고 있었다.”
그래. 자신은 계속 테레제만 보고 있었다.
스스로 이상함도 못 느낄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게.
그때 곁에서 “크흠.”하고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민츠버그 공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통성명을 시도했다.
“패트릭 민츠버그입니다. 기껏 저택에 초대해주셨는데, 일이 바빠서 이제야 방문하게 되었군요.”
유지스는 불청객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테레제의 손을 잡으며 인내했다.
그는 특유의 거만한 표정으로 패트릭과 악수했다.
“유지스 로드리고입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상당한 미남이시라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 엄청나시네요!”
그때 조안나가 아비가일의 손을 잡고서 다가왔다.
“기껏 로드리고 부인이 초대해줬는데 이제야 오면 어떡해요, 여보. 기다렸잖아요.”
“많이 기다렸어요? 새로운 사업이 조금 바빴네요.”
패트릭은 조안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키스했다.
조안나는 유지스의 눈치를 살피며 수줍은 척하는 얼굴로 패트릭을 나무랐다.
“아이참. 보는 눈도 있는데.”
테레제는 민츠버그 부부의 애정행각을 보더니, 움츠리고 있던 어깨에 힘을 풀었다.
유지스는 지금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맞힐 자신이 있었다.
‘부부 사이에 이 정도는 보통이구나.’
그런 맹해 빠진 생각이나 했겠지.
“아빠!”
서로 가벼운 통성명을 마치고 슬슬 그늘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세실리아가 우다다 달려왔다.
평소라면 대충 반응했을 유지스는 기꺼이 세실리아를 번쩍 안아 들어 팔에다 앉혔다.
반대편 팔은 테레제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자신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테레제가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비가일이 패트릭에게 졸랐다.
“아빠아, 나도 안아줘.”
“그래, 그래. 어이쿠! 우리 아가씨, 못 본 새 많이 컸나?”
테레제는 가뜩이나 아이들과 뛰어노느라 열이 오른 상태인데, 체온이 높은 유지스와 찰싹 달라붙어 있어 연신 손으로 부채질했다.
조안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대가 민망해할 만한 부분을 콕 집어 언급했다.
“세상에. 로드리고 부인이 땀을 엄청 흘리고 있었네요. 그런 사람을 이런 뙤약볕 아래에 세워놓고 있었다니. 제 불찰이에요.”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여기서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만 안으로 들어가죠.”
테레제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제가 땀을 흘려서요.”
“그래서?”
“손만 잡아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찝찝하잖아요.”
유지스는 민츠버그 부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쪽은 딸을 두 팔로 안아 드느라 아내를 안아줄 수가 없지. 나는 가능하지만.”
그 말에 테레제는 “오.”하고 감탄하더니 세실리아에게 들리지 않게 귓가에다 속삭였다.
“그렇네요. 저희가 더 앞서가고 있어요.”
유지스는 잠깐 숨을 참았다.
끔찍하게 달아빠진 향이 폐부 깊숙하게 파고들어 제멋대로 점령한 탓이었다.
그가 멈칫한 사이 테레제가 품에서 쏙 빠져나갔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손님을 응대할 순 없으니, 잠깐 제 방에 다녀올게요. 그동안 당신이 대신 공작을 상대해주세요. 아셨죠?”
테레제는 혹시라도 유지스가 거부하기 전에, 제 할 말만 속사포처럼 빠르게 쏟아내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부부 놀이에 가담하기로 했다지만, 제 윤허도 없이 상대가 멋대로 떠나버리는 경험은 익숙해지질 않았다.
게다가 감히 제게 일을 시키다니.
그때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아빠 왜 웃어?”
“…넌 저기 아비가일하고 놀아라.”
“웅!”
유지스는 무책임한 태도로 세실리아를 방생해버리고는 괜히 미간을 찡그린 채 입가를 매만졌다.
“왜 웃은 거야.”
웃긴 일도 없었는데.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