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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31화 (232/277)

231화

* * *

데미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어지는 스콰이어 부녀를 응시했다.

“이상하네.”

라울의 반응을 보면 클라이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데, 또 리비의 반응을 보면 뭔가 아는 눈치였다.

자신이 클라이드를 언급한 사실에 대해 매우 경계하기까지 했고.

그건 다시 말해서 자신이 클라이드를 알고 있는 사실이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위화감을 한 번 느껴본 적 있다.

바로 던전에서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때와 비슷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테레제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데미안은 이번에도 테레제가 모든 걸 알고 있으리라는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갑자기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무엇 하나 쉽게 이해되는 게 없는데, 그 와중에 테레제가 클라이드와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에 미칠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황제와 던전에 들어갔다.

만일 자신과 함께 있었을 때처럼 그런 시간을 황제와 보낸다면…….

‘안 돼.’

그래서는 안 된다. 허락할 수 없었다.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뭘 용서하지 못하는 거지?

데미안의 머리가 애증과 살의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뭐부터처리해야하지?황제가절대적인권력을지니고있다고한들결국피와살로이루어진인간일뿐이잖아.죽여버리면그만인데.부인은나만의것이어야해.그런데부인은왜결혼했지?그것도클라이드랑했다고.그새끼는어디로사라진거지?대체이세계는어떻게돌아가고있는거야?이상해.부인을중심으로뭔가자꾸만벌어지고있어.내가인지하지못하는무언가가이세계에존재하는것같…… 잠깐만.

이러다가 부인을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릴 수도 있지 않나?

“…….”

그 순간 데미안과 오즈월드의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은 ‘묘하다’라는 표현이 이 순간만큼 절묘하게 딱 들어맞았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방금까지 병마처럼 시달리고 있던 온갖 생각이 오즈월드와 눈이 마주친 순간 뚝 멈췄다.

남은 것은 순수한 본능이었다. 그래서 하마터면 그를 죽일 뻔했다.

이곳이 황실 연회장이 아니어서 마법을 사용할 수만 있었다면, 반드시 그리했을 거라고 장담했다.

정말이지 묘했다.

한번 이런 경험이 있었던 것처럼 육신이 반응한 게 정말로 묘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저 낯짝이 꽤 눈에 익는다는 사실 역시도.

어디에서 본 걸까? 저 얼굴을.

잊기 어려울 정도로 인상적인 외모인데 왜 정작 기억에는 없을까?

“데미안 카펜터 영식이었죠.”

찰나가 흘렀다.

몇 초에 불과한 시간 동안 데미안은 생각으로 들끓었다가 찬물을 부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오즈월드 발렌시아 후작님. 아까는 여의치 못해 인사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군요.”

“아닙니다. 그럴 만한 상황이었잖습니까?”

오즈월드는 데미안 어깨 너머로 던전을 힐끗 보았다.

“난감한 일이네요. 하필 테레제 양이 폐하와 단둘이서 던전에 들어가다니.”

“……네.”

“혹시 세실리아 양의 바람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데미안은 모르겠다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 오즈월드를 쳐다보았다.

상대의 목소리에서 조롱이 느껴진 탓이었다.

“금실 좋은 부모님을 가지는 게 세실리아의 꿈이었습니다. 아마 던전도 그런 바람을 이루는 공간이 아닐까 싶군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왜 그렇게 소극적이죠? 그렇게 해서는 경쟁자들을 막을 수 없을 텐데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렵게 재회했잖습니까.”

그 말에 데미안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고 오즈월드는 조소했다.

“이런 게 뭐가 특별하다고 그렇게 아끼고 예뻐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즈월드는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리다 허공의 어딘가를 응시했다.

뭔가를 확인하는 눈짓에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그가 응시하는 지점을 훑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나 테레제가 종종 저렇게 행동했던 건 똑똑히 기억했다.

동시에 방금까지 완벽하게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던전에서 1월 31일에 진짜 테레제와 만나기 전, 그녀가 모르는 시간 속에서 저 남자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와 계약했다.

오즈월드는 테레제와 현실에서 재회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약속했다.

“저와 제대로 통성명하기 전까지 이 기억을 잊게 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테레제 양이 워낙 예민해서 뭔가 눈치챌지도 모르거든요.”

자신의 소유물처럼 테레제를 입에 담던 게 몹시도 거슬렸었단 사실도 함께 떠오르자,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제 기억났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그것도 부인의 파트너로.”

“아아. 저도 이 세계가 꽤 마음에 들어서 여기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테레제 양 때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오즈월드는 이딴 건 본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내내 산뜻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으나, 데미안은 몹시 거슬리는 예감을 느꼈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테레제에게 마음을 품는 순간, 굉장히 엿 같아지리라는 것을.

데미안은 가면 같은 표정을 걸치고서 오즈월드에게 물었다.

“혹시 제게 용건이 있어서 접근하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할 듯한데.”

“저도 이것으로 용무는 끝났습니다.”

오즈월드는 과장된 몸짓으로 데미안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데미안은 가볍게 예를 갖춘 뒤, 싸늘한 얼굴을 한 채 황궁의 으슥한 곳으로 숨어 들어갔다.

오즈월드는 이 세계가 마음에 든다고 했지만, 데미안은 아니었다.

카펜터 공작가를 분열시키며 순조롭게 가문의 주인이 될 상황까지 만들었건만. 그보다 더 골치 아픈 문제들이 깔려 있었다.

이상한 놈들이 하나 같이 테레제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

그들을 치우고 부인과 둘이 있으려면 쓰레기 청소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데미안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입을 열었다.

“대업을 시작해야겠다.”

그러자 흐릿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던 스티그마타 일원들이 쏜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 * *

유지스는 기질이 예민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순진해 빠졌던 어린 소년에서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착하고 정직한 청년으로 자랐던 시절도 분명 그의 기억에 존재했다.

어린 황제라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었다.

어머니께, 귀족들에게, 신관들에게, 궁정인들에게, 백성들에게, 그리고 성신께 인정받는 성군이 되고자, 자신을 깎아지른 시절이 정말로 존재했었다.

지금은 사라진 과거지만.

배신은 한 사람의 가치관, 신념, 성격, 취향 등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만큼 지독하게 뼈아팠다.

활활. 불이 번졌다. 사방이 불이었다.

검은 연기를 뿜는 주위가 두렵고 무서웠다.

살려주세요, 어머니! 여봐라! 거기 아무도 없느냐! 살려다오! 제발 살려줘!

목이 찢어지라 내지른 비명에도 태양궁은 고요했다.

누구도 오지 않는다.

누구도 살려주지 않는다.

유지스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도박하기로 했다.

그는 불길을 뚫고 유리창을 깼다.

전신이 불로 휩싸였다.

태양궁에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아무런 조치도 하지 못한 채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서서히 죽어갔다.

아…… 어머니가 보인다.

저 멀리서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그녀를 불렀다.

어마마마…….

하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꺼져가는 시야로 어머니 외의 다른 이들이 포진해 있음이 보였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자신의 숨을 살폈다.

죽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럴 리가. 아직 나는 살아있는데.

죽었을 리가 없다.

이렇게 저들이 선명하게 보이는데.

자신을 죽이려고 한 빌어먹을 것들이 버젓이 살아있는 채로 쓰러져 누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게 이렇게나 잘 보이는데.

짐이 죽었을 리 없지 않나?

“로드리고 공작님.”

여리고 유약한 음색이 오래된 과거를 갈기갈기 찢으며 귓속을 파고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자위가 욱신거려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식은땀이 흐른다. 목이 탔다.

술. 독한 술이 필요한데.

“괜찮으세요, 공작님?”

흐릿한 시야에 청초한 미모를 뽐내듯 순백의 옷차림을 한 여인이 보였다.

순간 머리채를 잡을 뻔했다.

유지스는 어금니를 까드득 물며 치솟는 폭력성을 애써 억눌렀다.

빌어먹을 꿈을 꾸고 난 직후에는 항상 방향 잃은 살의에 시달렸다.

그는 낮게 들끓는 소릴 흘리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여기는 던전이었지.’

생각의 물꼬를 틀자, 현재 상황이 차곡차곡 순서대로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청순함을 표방하면서도 풍만한 몸매를 과시하는 백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던전 주민인 조안나 민츠버그였다.

“꺄아아!”

테라스 난간 너머로 아이들의 들뜬 비명이 들려왔다. 세실리아와 아비가일의 것이었다.

그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거기 서라! 너희를 잡아다 정원에 심어버릴 것이다!”

“꺄아악! 살려줘! 꺄하하하!”

어처구니없는 내용에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테레제의 목소리를 들으니,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팽팽하던 신경이 누그러지니 그제야 기분 좋은 바람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바람에 서로 쓸리는 소리, 코끝에 스미는 풀과 흙냄새, 졸졸 흐르는 물소리.

이곳은 황궁이 아니라 로드리고 공작가의 후원 테라스였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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