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내 단호한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방금 가벼운 설전을 벌였던 것치고 우리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썩 전투적이지는 않았다.
‘유지스는 내기 결과를 힘이나 권력으로 뒤엎을 성격은 아니야.’
그러니 좀 더 확실한 결정타를 날리면 순순히 결과에 승복하리라.
나는 지난 며칠간 야심만만하게 준비해둔 대비책을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유지스는 그런 날 빤히 응시하더니, 돌연 코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덩치 탓에 압박감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뭐야. 설마 무력 행사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내가 긴장으로 입술을 감쳐물자, 유지스가 피식 웃었다. 패배자답지 않은 여유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뭘 그리 경계해.”
패배자는 우울하게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손해 본 기분이 들게 하는 태도라서 조금 언짢아졌다.
유지스는 내 옆의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짚으며 허리 숙였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 그가 말했다.
“패배를 인정하지.”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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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벌칙으로 키스하기~]
태도가 의미심장하길래 판을 뒤집을 비장의 카드라도 있나 싶었는데, 뜻밖에도 패배 선언을 들었다.
‘아직 세실리아를 통해 결정타를 날리기도 전인데, 벌써 승패가 날 줄이야.’
“내기가 끝나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인정이 빠르시네요?”
유지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목숨을 건 내기도 아닌데, 질척거릴 필요 없지.”
저는 목숨 건 내기였는데요.
빈축을 사야 마땅한 공감 능력 부족한 발언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울컥울컥 치솟는데, 유지스는 태연하게 내기 조건을 확인했다.
“앞으로 황제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 널 부인이라고 부를 것, 마지막으로 손을 잡는 것이었나?”
나는 잘못된 부분을 정정해주었다.
“황제처럼 행동하지 않는 게 아니라, 로드리고 공작이자 제 남편답게 행동하셔야 해요.”
“이거나 그거나.”
이건 절대로 ‘이거나 그거나’로 퉁 칠 사안이 아니다.
‘계약서에서 단어 하나로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데, 어딜 본인 편할 대로 재해석하려고 들어?’
“…아무튼 패배를 인정하셨으니 오늘부터 당장 벌칙을 실행해주세요.”
“그러지.”
유지스는 선뜻 대답한 뒤 내 손을 덥석 쥐었다.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잡는지, 개구리를 발견한 뱀인 줄 알았다.
나는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손은 세실리아의 앞에서만 잡으시면 되는데요…?”
“던전에 있는 동안 어떤 순간에든 남편답게 행동하라면서. 한데 세실리아의 앞에서만 다정하게 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아…?”
순간 말문이 막혀 멍한 표정만 짓고 있는데, 유지스는 내 손을 멋대로 코앞까지 가져가 유심히 살폈다.
“손이 이렇게 작았었나?”
“그럴 리가요. 제 손은 큰 편이에요.”
“하긴. 키도 작은데 당연하겠지.”
내 말을 전혀 안 듣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겠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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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없을 때는 보이지 않던 점들이 막 새롭게 다가오고 그러지? 손 크기 재는 척하면서 깍지 끼고 뽀뽀도 해 봐 ㅎ]
성좌들도 저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다는 것도 잘 알겠고.
그때 유지스가 문득 생각난 게 있는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부부침실을 써야 하나?”
나는 즉각 부정했다.
“아뇨, 굳이……. 그건 나중에 결정적인 요소가 필요할 때까지 미뤄도 될 것 같아요.”
개 같은 직장 상사와 한방을 쓰고 싶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내게 유지스가 그랬다.
‘평점도 차곡차곡 오르고 있고.’
{화목한 우리 집 평가지}
▸육아: ★★★★☆
▸금실: ☆☆☆☆☆
▸평판: ★★★☆☆
보다시피 금실을 제외한 두 항목의 평점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괜찮은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만들려고 지난 며칠간 밤잠 줄여가며 저택 서브 퀘스트들을 얼마나 깨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유지스의 순순한 항복이 유독 억울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뭐,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이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에피소드는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우선 같이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어요. 함께 산책하는 것도 좋고요. 목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거니까요. 그리고 손님이 오면 반겨주시면 되겠네요.”
마지막 말에 유지스가 반응했다.
“손님?”
“네. 손님이요.”
나는 환한 햇살이 드는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저기 오네요.”
정문으로 번쩍번쩍한 마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 * *
백마가 끄는 백색의 마차가 저택 입구에 멈춰 섰다.
마차에 흙탕물이 튀어도 상관없다는 듯 과감한 순백의 마차는 동화 속 공주님이나 탈 것 같은 형태였다.
그곳에서 장식이 절제되어 있어 청순해 보이나, 빼곡하게 자수가 놓인 초고가 원단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내렸다.
육감적인 몸매의 민츠버그 부인이 다소곳한 미소를 띠며 날 향해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로드리고 부인!”
“어서 오세요, 민츠버그 부인.”
나는 기사에게 달랑 안겨 내려온 아비가일 민츠버그에게 인사했다.
“안녕, 아비가일. 오늘 또 보네.”
“네, 부인! 세실리아는 어디에 있어요?”
“세실리아는 낮잠 중이야. 곧 일어날 테니까 같이 들어가자.”
우리가 짧은 인사를 나눌 동안 마차는 몇 대나 줄줄이 더 들어왔다.
전부 민츠버그 공작가의 짐마차였다.
민츠버그 부인이 소녀처럼 까르르 웃으며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아비가일이랑 여름휴가를 어떻게 보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세실이랑 함께 놀면 되겠어요.”
나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오늘부터 민츠버그 부인과 딸인 아비가일이 로드리고 저택에서 며칠간 묵을 예정이다.
이는 세실리아와 아비가일이 서로서로 누가 더 행복한 딸인지 경쟁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했다.
민츠버그 부인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로드리고 공작님은 보이지 않네요? 일이 바쁘신가요?”
“아… 곧 나올 거예요.”
유지스는 한껏 풀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손님을 맞이할 꽃단장을 시켜놓은 참이었다.
‘그것도 다 평판에 해당한다고.’
민츠버그 부인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말없이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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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쎄하네 ㅋㅋ 걱정하는 척하면서 ‘저런, 남편한테 사랑 못 받는 모양이네요?’하고 묻는 표정임]
성좌의 분석은 정확했다.
젊은 나이에 공작부인이 되어 사교계를 휘어잡은 조안나 민츠버그는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질투가 심해서 꼭 남보다 더 잘나야 직성이 풀렸다.
‘이런 캐릭터를 상대로 내가 계속 이겨야 세실리아의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지.’
여러모로 피곤한 에피소드가 될 예정이었다.
‘유지스라도 협조적으로 행동해줘야 할 텐데.’
근심을 안고 민츠버그 모녀의 방을 안내하기 위해 본관으로 들어섰을 때,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유지스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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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비쥬얼 폭력적인 거 봐라]
작정하고 광낸 유지스는 확실히 다른 남자 주인공들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일리야가 곧고 우아하다면 유지스는 화려하고 야성적이었다.
밀림의 왕처럼 어슬렁거리는 몸짓은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민츠버그 부인 역시도 유지스에게 완전히 시선을 빼앗긴 채, 무의식적으로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어머나…….”
백금색 머리카락을 화려하게 손질하고, 위협적인 몸에 딱 달라붙는 슈트를 빼입은 그가 지척까지 다가와 성격 고약해 보이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
“여보, 여기는 민츠버그…….”
나는 민츠버그 부인을 소개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유지스가 내 등허리를 감싸 안고서 뺨에 키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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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미쳤다]
분명히 동작은 가벼웠다.
한데 키 차이 때문인지 발뒤꿈치가 살짝 위로 떴다가 다시 바닥에 닿았다.
입술을 뺨에 깊이 묻었다 떨어뜨린 유지스가 여전히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속삭이듯 물었다.
“날 기다릴 줄 알았더니, 혼자 도망가기나 하고. 찾았잖아.”
“아니…….”
나는 하마터면 그를 폐하라고 부를 뻔했다가 간신히 말을 삼켰다.
던전 주민이 있는 자리에서는 설정에 맞지 않는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행동은 금지였다.
그랬다가는 공격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겨우 당혹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힌 뒤 유지스의 가슴팍을 슬쩍 밀어내며 눈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저는 손님을 맞이해야 하잖아요. 이분은 민츠버그 공작부인이세요. 여기는 우리 세실의 친구인 아비가일 양이고요.”
유지스는 그제야 다른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민츠버그 부인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습니다.”
무례할 정도로 성의 없는 태도였음에도 민츠버그 부인은 뺨이 달아오른 채 어쩔 줄 모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처음 뵈어요, 로드리고 공작님. 조안나 민츠버그라고 합니다.”
“네.”
“조부님들께서 저희 아이들의 약혼을 주관하시는 바람에 너무 늦게 뵈었네요…….”
그때 멍한 얼굴로 유지스의 얼굴을 구경 중이던 아비가일이 민츠버그 부인의 치맛자락을 당겼다.
“우리 아빠보다 더 잘생겼어!”
“아비가일!”
민츠버그 부인이 당황하며 아비가일을 안아 들었다.
“죄송해요. 아이가 워낙 솔직해서요.”
“괜찮습니다.”
유지스는 아비가일을 쳐다보더니 피식 웃어주었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수줍음으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민츠버그 부인의 품에 숨어들 듯 안겼다.
수줍은 건 비단 아비가일만이 아니었다.
민츠버그 부인은 뺨을 넘어서 귓바퀴와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유지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괜히 시선을 돌렸다.
“…후우! 덥네요, 여기.”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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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내 장르의 냄새가 난다? ㅋㅋ]
정확했다.
이 던전의 장르를 정확히 말하자면 ‘막장 육아물’이거든.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