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 * *
참 우스운 일이었다.
유지스는 며칠간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드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망하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는 제국 때문에 ‘업’을 쌓지 않기 위해서 국무 수행했었다. 뭐 그마저도 최소한이었지만.
정말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돌아버리겠다 싶을 정도가 돼야, 자존심을 내려놓고 국정을 돌보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죽지는 못한다. 그렇게 ‘계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신이시여.
사람 보는 눈이라고는 정말이지 형편없어서 로드리고 혈족에게 이딴 의무를 지우시다니.
직계 혈족도, 시집온 아내도 함께 미쳐버리게 만드는 이 정신 나간 황가에 어찌 제국의 명운을 맡기셨을까?
유지스는 왜 로드리고 혈족이 신에게 간택되었는지 늘 의문이었다.
사실 마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스콰이어 혈족이 더 낫지 않나?
아, 생각해 보니 그 집단이 대대로 마법에 미쳐있어서 가문을 이끄는 게 용하다고는 하던데, 이번 세대를 보면 멀쩡한 것 같았다. ……아닌가?
아무튼.
혈족의 의무에 대한 증오심으로 긴 반항기를 보내는 중인 유지스는 던전에 처박힌 지금이 생에 가장 완벽한 순간이었다.
바로 어제, 술래잡기하던 테레제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지스는 어제부터 도통 펴질 줄 모르는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기분이 좋지 않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랬다.
그때 노크가 들려왔다.
당연히 어제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테레제가 술과 시가를 가져왔으리라 생각하고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가주님.”
하나 들어온 사람은 웬 시녀였다.
“공…작부인은 어디에 있지?”
유지스는 습관처럼 공녀라 부를 뻔하다가 공작부인으로 빠르게 정정했다.
시녀가 테이블 위에 술과 시가를 올려두며 대답했다.
“마님께서는 세실리아 아가씨와 외출하셨습니다.”
외출이라니. 이 저택을 그렇게 멋대로 벗어날 수 있었던 건가?
“허락도 없이 외출했다고?”
유지스의 짜증에 찬 중얼거림을 들은 시녀가 미묘해진 표정으로 돌연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마님께서는 정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계세요.”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미간을 좁히자, 시녀가 “주제넘은 소리를 해 죄송합니다.”라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에서 나갔다.
유지스는 잠시 눈을 감은 채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났다.
“……아. 이건가?”
지금까지 잠잠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줄 알았던 테레제가 실은 뭔가를 하고 있었다.
그 결과가 방금 시녀가 지껄인 헛소리였고.
유지스는 알면서도 당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침실을 나섰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사용인들은 그를 발견할 때마다 고개 숙이며 예를 갖추었으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는 익숙한 얼굴인 윈다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아내는 어디로 갔지?”
“세실리아 아가씨의 친구인 아비가일 민츠버그 양의 초대를 받아 외출하셨습니다. 곧 오실 겁니다.”
“아비가일 민츠버그?”
처음 듣는 이름에 의아해하자 윈다가 설명했다.
“민츠버그 공작가의 영애입니다. 민츠버그 가문은 사교계의 영향력이 막대한 곳이지요. 또한 헨리 민츠버그 영식은 세실리아 아가씨의 약혼자이기도 합니다.”
“아아.”
전혀 관심 없는 이야기였다.
세실리아의 망상을 토대로 본인 좋을 대로 꾸며진 인물과 무대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 않은가.
“비위도 좋군.”
그런 역겨운 놀이에 얼마나 열심히 어울려줬으면 사용인들을 죄다 본인 편으로 만들었을까, 테레제는.
내기할 때 보인 열의 없는 자신감이 기이했었는데, 이미 어떻게 하면 될지 답을 알고 있어서 그런 태도였나?
사용인들을 구워삶은 걸 보면 5살짜리 세실리아는 안 봐도 훤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내기에서 이길지가 궁금하긴 한데.’
자신을 이 집에서 내쫓기라도 할 셈인가? 아니면 남편을 바꿀 수가 있나?
유지스는 테레제가 어떻게 나올지 가정에 가정을 거듭하며 정원으로 나갔다.
그늘막에서 기둥에 어깨를 기대어 서 있으니 곧 정문이 열리며 마차 한 대가 진입하는 게 보였다.
곧 저택에서 테레제와 세실리아를 맞이하기 위해 사용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유지스의 눈치를 살피며 마차에서 내려오는 테레제와 세실리아를 반겼다.
“다녀오셨습니까, 마님.”
“재미있게 놀다 오셨어요, 아가씨?”
“응!”
세실리아는 한 손에 커다란 막대사탕을 들고서 해맑게 웃다가 유지스를 발견하고는 놀랐는지 입술을 벌렸다.
아이의 떨리는 눈동자가 유지스가 뻑뻑 피우는 중인 시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곧 하얀 찐빵 같은 얼굴이 잔뜩 찌그러졌고,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우… 으… 으흑….”
세실리아가 돌연 눈물을 보이자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테레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실리아를 안아 들고서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세실.”
“흐어어어어엉!”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걸까?
왜 괜찮다고 위로하는 순간 세실리아가 대성통곡하는 건지 몹시도 궁금했다.
테레제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처연하게 미소 지었다.
“엄마가 잘못해서 아빠가 화나신 거야.”
“아, 아니야! 엄마 잘못 없어!”
엉엉 울던 세실리아가 유지스를 휙 노려보았다.
“아빠는 바보야! 엄마가 싫을 때마다 저 막대기에서 연기를 내뿜는 아빠 때문에 세실은 속상해!”
유지스는 피우던 시가를 내려다보았다.
아하. 그러니까 자신이 테레제를 언짢아할 때마다 시가를 피운다고 세실리아에게 거짓말했다는 거지?
“하.”
기가 차서.
“오해했나 본데.”
유지스는 시가를 바닥에 툭 버린 뒤 그들에게 다가갔다.
“시가를 피우는 건 네가 먹는 막대사탕 같은 거다. 그거 말고 다른 이유는 없어.”
“어, 엄마를 싫어할 때마다 피우는 게 아니라?”
“그래.”
그러자 세실리아는 눈물을 뚝 그치고 환하게 웃었다.
“엄마! 아빠가 엄마를 싫어하는 게 아니래! 다행이다. 그치?”
겨우 이딴 한 마디로 해결될 거짓말이라니.
고작 며칠 사이에 사용인들을 휘어잡은 실력을 보고 내심 자신을 어떻게 이길지 기대했는데. 몹시 실망스러웠다.
아니, 실망스러워질 뻔했다.
“그럴 리가, 세실.”
테레제는 여전히 처연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탕은 달콤하지. 하지만 아빠가 피우시는 시가는 수명을 줄어들게 하는 무서운 독이란다.”
“어…?”
“아빠는 엄마가 싫어서, 일찍 엄마를 떠나고 싶어서, 술 마시고 시가도 피우시는 거야.”
그러고는 눈물도 나지 않는 주제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손으로 눈가를 콕콕 찍었다.
“엄마는 우리 세실이랑 아빠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건데…….”
세실리아는 멍한 얼굴로 테레제와 유지스를 번갈아 보더니 어느새 다가온 윈다에게 물었다.
“윈다. 시가는 몸에 나쁜 거야…?”
“좋지는 않습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실리아의 두 눈에 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으아아앙! 싫어! 아빠 죽으면 안 돼!”
“울지 마, 우리 세실. 그럼 이렇게 할까? 엄마 방에 술이랑 시가를 전부 숨겨놓고 있을게. 그러면 안전하겠지?”
세실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용인들의 눈동자에 붉은 기운이 어렸다.
“명을 따릅니다, 아가씨.”
사용인들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저택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유지스의 음주와 흡연 통제권이 테레제에게 홀라당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유지스는 일련의 사태를 쭉 지켜보다가 여전히 세실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는 테레제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테레제가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세실리아가 바라서요. 이해해줄 수 있죠?”
명백한 승리자의 표정이었다.
* * *
나는 울다 지쳐 잠든 세실리아를 사용인에게 넘겨주고 개인 침실로 향했다.
어느새 사치품 창고에서 시가를 꺼내 온 사용인들이 드레스 룸 안에 있는 금고에다 시가를 넣고 있었다.
“다들 수고했어.”
“아니에요, 마님. 진작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용인들은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남편에게 소박맞고 매일 술 담배 심부름이나 하는 가엾은 아내처럼 연기했더니, 다들 한 마음 한뜻으로 내 편이 되어주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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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스가 어이없어하는 표정 지었던 거 왜 이렇게 웃기지 ㅋㅋ]
“아참, 마님. 여기 술 창고 열쇠 받으세요.”
사용인들은 세실리아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술 창고에 자물쇠를 달았다. 엄청난 행동력이었다.
그들은 내 방에서 나가기 전에 신신당부했다.
“만일 주인님께서 내놓으라 협박하시면 꼭 저희한테 말씀하세요. 확 다 가져다 버릴 테니까요!”
그때 홀연히 침실에 들어온 유지스가 빈정거렸다.
“대단한 의기투합이군.”
“어머머!”
사용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황급히 입술을 덮었다.
나는 당황한 그들에게 얼른 가보라고 손짓한 뒤 유지스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셨어요? 이리로 앉으세요.”
사용인들은 부리나케 침실을 나갔고 금방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유지스가 삐뚜름하게 웃었다.
“솜씨가 좋군.”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원하는 게 있을 때마다 내게 술과 시가를 걸고 협상할 생각인가?”
“네.”
“저택 밖에서 쇼핑할 수 있다면서. 그럼 짐이 직접 술과 시가를 사면 그만인데. 아, 그것도 염두에 두었나?”
“네. 세실리아가 폐하께 술과 흡연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폐하의 의지로는 던전 어디에서도 구하실 수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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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 위에 던전주가 있다 이 말이야~]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