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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26화 (227/277)
  • 226화

    내가 기뻐할 동안 유지스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손에 구정물이라도 묻은 사람처럼 허공에 들고 있었다.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해?’라고 묻는 눈빛이 매우 살벌했다.

    “흐아암.”

    그때 세실리아가 하품을 내뱉었다.

    “이제 낮잠 주무실 시간이네요. 마님, 아가씨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첫 번째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은 덕분에 이 자리에 있던 사용인 전원이 다가와 꾸벅꾸벅 조는 세실리아를 데려갔다.

    유지스는 우리 둘만 남게 되자마자 비아냥거리듯 입을 열었다.

    “보기보다 능청스럽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맞받아쳤다.

    “실력이 좋은 거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던전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아아. 짐은 실력이 없어서 던전 클리어에 방해나 될 뿐이다?”

    “그런 뜻은 아니지만, 폐하께서는 저처럼 던전 경험이 풍부하지 않으시니 제 의견에 적극적으로 따라주시면 좋겠어요.”

    “짐을 지키는 게 신하가 할 일 아니던가?”

    내게 협조할 생각이 없다는 투였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물론입니다, 폐하.”라고 대답하면서도 속으로는 주먹을 날렸다.

    ‘애초에 도움받을 기대도 안 했어요, 이 인간아.’

    그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계절감에 전혀 맞지 않게 벨벳 원단으로 목과 팔 전체를 감싼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두덩이는 새카맸고 입술은 짙은 와인색이었다.

    누가 봐도 섬뜩한 모습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드리고 공작 각하, 로드리고 공작부인. 저택 총관리인 윈다라고 합니다.”

    공작이라고 불린 유지스는 세실리아의 욕망이 적나라하게 투영된 이 세계가 같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내 성이 로드리고이기는 하는군. 카펜터라 불렸으면 기분 상할 뻔했어.”

    윈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각하께서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띠링!

    [성좌 ‘쫄보’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이번 던전의 가이드인가…? 지금까지 나온 가이드 중에 제일 무섭게 생겼는데ㅠ]

    성좌의 추측대로 윈다가 이번 던전의 가이드이자 가장 엄격한 평가자였다.

    “이사한 첫날부터 힘드시겠지만, 하루빨리 수도 사교계에 뿌리내리시려면 먼저 저택부터 둘러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스킵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유지스에게 저택 내부 구조를 학습시킬 겸, 나도 실제로 돌아다녀 보며 공간을 파악하기 위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겠네. 당신도 같이 갈 거죠?”

    내가 아는 기혼자 중 가장 기품있는 여성은 로잔이었다.

    그래서인지 흠잡을 데 없는 아내를 흉내 내는 내 말투는 자연스럽게 로잔을 닮아 있었다.

    유지스는 혀를 한 번 차더니 내게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겠다는 뜻이었다.

    윈다는 내가 팔짱 끼는 모습을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저택 내부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 던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설명했다.

    “수도 귀족들은 부부간의 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부 사이가 어떤지에 따라 가정의 평화, 자식 교육, 가문의 번영이 달라진다고 생각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의 구현 정도를 확인했다.

    사실 이 저택은 카펜터 공작가와 똑같아서, 그곳에 몇 차례 방문한 적 있는 유지스도 아예 낯설지는 않을 터였다.

    부부가 각자 사용할 개인 침실, 응접실, 파티장, 음악실 등을 소개받고 나니 슬슬 진이 빠졌다.

    윈다는 밀랍 인형처럼 생기 없어 보이는 시녀가 지키고 선 문 앞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이곳이 세실리아 아가씨의 방입니다. 시녀가 언제나 앞을 지키고 있을 테니 용건이 있으시면 이 아이에게 말씀하십시오.”

    내내 침묵하고 있던 유지스가 물었다.

    “왜 열어보지는 않고?”

    “아가씨는 낮잠 중이십니다.”

    그때 문득 얼마 전 리비랑 같이 샤티 부인에게 받은 가르침이 떠올랐다.

    안주인으로서 집안을 다스리는 법, 양육법 등을 배웠었는데 이렇게 빨리 가르침을 실행할 날이 올 줄이야.

    윈다는 반대편 통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부부 침실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띠링!

    [성좌 ‘주책바가지’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부끄러워잉 ^///^]

    ‘아… 그러고 보니 부부니까 한 침실을 쓰는 게 평가지에 반영되지?’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자주 붙어있는지, 얼마나 친밀하게 서로를 대하는지도 전부 평가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별점 5점을 받으려면 유지스와 한방을 쓰고 키스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매우 주도적으로 유지스를 이끌고 있었다.

    하나 그 행동력이 그새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건지, 걷는 자세부터 뚝딱뚝딱 어색해졌다.

    유지스가 그런 날 비웃었다.

    “부부 침실이라. 개인 침실 말고 또 침실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두 분께서 함께 사용하시는 침실입니다.”

    “오, 무척 궁금하군.”

    윈다는 통로의 끝으로 가더니 문을 열었다.

    부부 침실은 외려 개인 침실보다 작았다.

    내부에 욕실, 간이 드레스 룸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런 듯했다.

    침대에는 캐노피가 여러 겹 겹쳐진 형태로 로맨틱하게 늘어져 있었고 시트 위는 꽃잎으로 가득했다.

    꼭 신혼부부를 위한 방 같았다.

    유지스는 휘적휘적 방을 가로지르며 내부를 살펴보고는 툭 말했다.

    “나쁘진 않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조그마한 크래커를 한입에 쏙 집어넣었다.

    “디저트 맛은 형편없지만.”

    누구는 심란해서 쭈뼛거리며 서 있는데 유지스는 태평하게 디저트 품평이나 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설렁줄을 당기십시오. 그럼 식사 시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용건이 끝난 윈다가 물러났다.

    유지스는 꽃잎이 흩뿌려진 침대에 털썩 앉더니 목을 죈 크라바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뭐, 뭐야. 왜 풀어? 뭘 하려고?’

    내 눈이 점점 커지고 있을 때 유지스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리로 와.”

    “……왜요?”

    “지금 짐에게 ‘왜요?’라고 했나?”

    “……아니요.”

    빌어먹을 신분제 같으니.

    내가 처형대로 끌려가는 사형수처럼 발을 질질 끌어 앞으로 다가가니, 유지스가 별꼴을 다 본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여보, 여보 거리면서 짐에게 잘도 엉겨 붙더니. 그새 정신이 든 모양이지?”

    “그건 던전 내 역할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됐으니 갈아입을 옷이나 가져와.”

    나는 순순히 드레스 룸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왔다.

    그러자 유지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

    내가 의아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자 유지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환복을 돕지 않고 뭘 빤히 보고 있지?”

    “네? 제가 환복을 도우라고요?”

    “여기에 공녀 말고 누가 더 있나?”

    “윈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설렁줄을 당기라고…….”

    그러자 유지스가 불쾌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그 불길한 것들에게 짐의 시중을 맡기라는 뜻인가?”

    그게 싫으면 스스로 옷을 갈아입으시면 되잖아요.

    나는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간신히 삼켰다.

    “알겠습니다…….”

    스스로 옷도 갈아입을 줄 모르는 고귀한 황제와 앞으로 어떻게 이 던전을 헤쳐 나가야 할지 벌써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스륵.

    우선 느슨하게 풀린 크라바트부터 매듭을 풀어 침대에 올려두었다.

    이어 재킷, 조끼까지 단추를 풀어 옆에다 놓았다.

    이제 드레스 셔츠에 손을 댈 차례였다.

    침실 안은 단추가 톡톡 풀리는 소리만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다 마침내 그의 흉악한 복부까지 단추를 풀어 내렸을 때, 갑자기 손을 붙들렸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들자 어쩐지 화를 참는 표정을 한 유지스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나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니 유지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환복은 됐으니 술이나 가져와. 시가도.”

    띠링!

    [성좌 ‘도파민중독’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 왜!!!!!!!!!!!!!!!!!]

    다행이다. 여기서 더 시키지는 않는구나.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얼른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또 유지스가 변덕을 부리기 전에 이 침실을 나가야 했다.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잠깐, 여기 말고 짐의 개인 침실로 가져와.”

    알겠다고 대답하려는데 유지스가 먼저 부부 침실을 나갔다.

    “…하아.”

    나는 곧장 나가지 않고 낡고 지친 기분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띠링!

    [성좌 ‘과몰입오타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무도회에서 남자주인공들 사이에 껴서 왕 노릇하는 모습 좀 보나 했더니 난데없이 시녀로 취직해버렸네…]

    “그러게요. 이 던전의 핵심은 제멋대로 구는 유지스를 합격점 받을 수 있는 남편이자 아빠로 만드는 건데. 아무래도 글렀죠?”

    그도 그럴 것이 이 던전은 애초에 호감도가 붉은 하트인 남자주인공과 들어와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구조라고.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요.”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자유도랄 게 없지만, 나는 자유 의지로 새로운 공략법을 만들 수 있다.

    “내기해서 이겨야죠.”

    BJ 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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