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준비 끝났어요, 아가씨!”
엘로이즈는 역작이 탄생했다며 위풍당당하게 가슴을 쭉 내밀었다.
“마신께서 검은 머리칼과 은회색 눈동자라고 하셨잖아요. 거기에서 착안해서 ‘마신의 강림’ 같은 콘셉트로 꾸며보았어요.”
나는 어깨를 과감히 드러낸 검은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카락은 느슨한 형태로 틀어 올려 보석으로 장식했고 손에는 검은 레이스 장갑을 꼈다.
다행히도 오즈월드가 멋대로 끼운 루비 반지는 장갑을 끼느라 잠깐 벗은 정도로는 퀘스트 실패 판정이 뜨지 않았다.
‘그냥 확 빼버릴까 보다.’
하나 호감도가 대폭 내려간 오즈월드와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나쁘게 작용할지 몰랐기에 충동을 억눌렀다.
몸단장을 마치고 마차를 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을 때, 분위기가 묘하게 들떠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마침 다가오는 중인 미란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누가 왔어?”
“그렇지 않아도 아가씨를 찾아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발렌시아 후작님께서 아가씨를 에스코트하러 오셨어요.”
전혀 달갑지 않은 소식에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신의 유희>에서 진행되는 여름 무도회 이벤트에서 에스코트 상대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호감도가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신세도 지고 싶지 않았기에 호위 기사를 대동할 생각이었다.
“나는 그분께 에스코트를 부탁한 적 없는데 왜 오신 거래?”
“가주님께서 부탁하셨다고 하네요.”
“아버지가?”
내가 마뜩잖아하자 미란다가 현관 쪽으로 등을 부드럽게 떠밀며 말했다.
“평범한 무도회였다면 가주님께서도 신경 쓰지 않으셨을 거예요. 하지만 여름 무도회는 파트너의 품격까지도 평가되니 아가씨께서 돋보였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신 듯합니다.”
사교계의 꽃이 되려면 그런 부분까지도 신경 써야겠지.
나는 별수 없이 가족들과 오즈월드가 함께 서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오즈월드는 금빛 머리카락을 말끔히 넘기고 있어 우아하고 오만해 보였다.
내가 뭘 입을지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분위기가 비슷한 검은 슈트 차림이었는데, 여성 사용인들이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쥐고서 담백하고 깍듯하게 예를 갖추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발렌시아 후작님.”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입술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으나 눈빛은 권태로워서 그렇게 느껴졌다.
곧 그의 시선이 내게 맞춰졌다.
그러자 빛이 한계까지 파고든 깊은 바닷속처럼 어두운 눈동자에 이채가 생겨났다.
오즈월드가 루비 반지를 낀 손에 키스했다.
“네,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테레제 양은 못 본 새 뭔가 달라진 것 같군요.”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설마 구프엘에게 성력을 받은 걸 들켰나?’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으나 최대한 태연하게 반응했다.
“어떤 점이 달라진 것 같은지 알려주시겠어요?”
그와의 대화는 꼭 살인마와 하는 숨바꼭질 같았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오즈월드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 그가 헛소리를 지껄였다.
“오늘따라 더 예뻐 보입니다.”
내가 질색하며 미간을 좁히자 오즈월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마차 한 대가 정문으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자카리였다.
리비는 상기된 표정으로 얼른 자카리에게 다가갔다.
“제 청을 들어주실 줄 몰랐어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습니다.”
자카리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인사했다.
라울은 한눈에 리비의 짝사랑 상대임을 알아보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 기억으로 경은 윌로우 가문의 봉신 가문 출신 기사인데. 어찌 스콰이어 가문의 여식을 에스코트하는가?”
리비는 당황한 얼굴로 라울의 팔을 붙들었다.
반면 자카리는 태연했다.
“제 기사 책봉식은 황실에서 치러졌으니, 가문과 상관없습니다.”
“가문을 버리겠다는 뜻인가?”
“저와는 상관없는 곳입니다.”
자카리는 인간으로 둔갑해있을 뿐, 이곳의 규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비인간적이었다.
라울은 자카리의 태도에서 위화감을 느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천사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상황을 무마하려 끼어들었다.
“자카리 경은 제 기숙사를 찾지 못해 길을 잃었던 리비를 도와주셨었어요.”
자카리는 내내 무표정하다가 날 발견하고는 지나치게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했다.
공작 부부에게 보인 태도보다 훨씬 정중했으며 존경마저 느껴지는 행동에 당혹스러워졌다.
‘아… 설마 내가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았나?’
그렇다면 저 태도가 이해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자카리를 일으켰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자카리 경. 그냥 편하게 대하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을 때, 오즈월드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만 마차에 오르시죠. 무도회 시작 전까지 도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울은 미간에 깊은 골을 그린 채 일단 다들 마차에 타라며 손짓했다.
그렇게 아직 정식으로 사교계에 데뷔하지 못한 주세페를 제외한 모두가 마차에 올랐다.
젊은 남녀만 달랑 마차에 태울 수 없었기에 리비와 자카리는 라울과 함께, 나와 오즈월드는 로잔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로잔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즈월드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간 바빴나 봐요. 연회에서 뵙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후작.”
오즈월드가 미간을 찡그리며 미소 지었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빨리 수도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이렇게 오셔서 우리 테레제의 파트너가 되어줬네요. 갑자기 한 부탁인데 흔쾌히 받아주어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먼저 파트너로 받아달라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한발 늦은 거였으니까요.”
나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누가 파트너로 받아주기나 한대?’
그때 오즈월드가 갑자기 날 쳐다보며 물었다.
“그간 잘 지냈습니까?”
순간 하도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쩜 이렇게 뻔뻔스러운 질문을 할 수가 있을까?
“네. 저는 잘 지냈어요. 후작님도 잘 지내셨어요? 바쁜 일은 처리되셨고요?”
“처리 못 했습니다.”
당연히 처리했다는 대답을 들을 거로 생각하고 예의상 한 질문이었다.
한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심지어 의아할 정도로 솔직했다.
오즈월드는 얼떨떨해하는 내게 확신을 주듯 반복해 말했다.
“처리하지 못했는데 온 겁니다.”
“……그러시군요.”
왜냐고 묻지 않았다.
이유를 듣지 않아도 그가 뭐라고 대답할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고작 뭐라고 말할지 예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소름 끼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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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장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건가? ㅠㅠ]
‘다쳤다고? 안티한테 공격당한 건가?’
하지만 내 기억상 안티들은 아예 격이 다른 존재처럼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었는데.
하디의 말로는 안티와 피해자 연합은 다른 조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일을 일으킨 쪽은 피해자 연합인가?
그들에게는 오즈월드를 상대할 비장의 한 수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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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건 답도 없다 ㅋㅋ 오즈월드가 방송에서 판테온 일은 언급 자제해달라고 공지했는데 꾸역꾸역 언급하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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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제인 거지 금지 아닌데? ㅋㅋ 진짜로 못 하게 할 거였으면 본인이 알파 위원장인데 알파 권한으로 경고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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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이러네 ㅋㅋ 판테온 일 언급하지 말라고; 말귀 못 알아들음?]
‘이게 무슨 소리지? 오즈월드가 알파 위원장이라고?’
성좌들은 후원으로 몇 차례 싸우더니 금방 제재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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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창을 확인하자마자 나도 모르게 오즈월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로잔과 대화하던 중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서 눈을 마주쳤다.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오즈월드를 완벽히 알고 있지는 않지만, 태도를 보니 방송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뇨. 아무것도.”
마차는 북새통을 이루는 황성으로 진입하더니 어느새 멈춰 섰다.
우리 마차 문을 열어준 것은 베인 시종장이었다.
“제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지나치게 파격적인 대우에 다른 귀족들이 연회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쪽을 구경할 정도였다.
그러다 나와 오즈월드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는 감탄이 잇따랐다.
좋은 구경거리라는 듯 흥미로워하는 표정들이었다.
물론 귀족들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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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만 기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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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기 싸움?! 벌써 기 싸움?! 벌써 기 싸움?! 벌써 기 싸움?! 벌써 기 싸움?! 벌써 기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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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야 빨리 나와라!!!! 니 마누라 난리 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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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데미안]
성좌들은 남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상황에 잔뜩 흥분해 있었다.
‘클라이드가 없기는 하지만.’
클라이드를 떠올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남몰래 스콰이어 나비를 통해 클라이드를 찾아볼 수 있을지도 연구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 세계에 그의 영혼 조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테레제 양.”
나는 멍하니 서 있다가 오즈월드의 부름에 간신히 정신 차렸다.
언제부터였는지, 그가 내게 팔을 내밀고 있었다.
“아, 잠깐 딴생각하느라……. 들어가요.”
오즈월드는 내가 왜 멍하니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에스코트했다.
어느새 라울과 리비, 자카리까지 합류하여 연회장으로 들어서니,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더욱 쏠렸다.
우리는 아는 얼굴이 보이면 간단하게 인사하며 순조롭게 연회장 안쪽으로 향했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