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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20화 (221/277)
  • 220화

    솔직히 한순간 혹할 정도로 솔깃한 제안이었다.

    하나 안전장치 없이 덥석 물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그 말씀, 신께 맹세해주실 수 있나요?”

    “맹세하겠다.”

    황제가 신에게 한 맹세는 단순히 말의 진정성을 높이는 것 이상의 효력이 있었다.

    신께 맹세한 말을 어기면 실제로 ‘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랬기에 누구도 감히 황제에게 신께 맹세하겠냐고 묻지 못했다.

    군주를 시험하고 협박하는 행위이잖은가.

    하지만 나는 했다.

    ‘유지스의 기분이 좋아 보여.’

    그는 너그러울 때 놀라울 정도로 느슨해지는 타입이었는데, 역시나 흔쾌히 맹세했다.

    그렇다면야 적당한 선에서 솔직하게 말할 의향이 있었다.

    “왜 폐하를 걱정하냐고 물으셨죠? 그게 못마땅하시면 걱정하게 만들지나 말고 그런 말씀을 하시던가요.”

    여기까지 하고 말을 잠깐 끊었는데. 유지스는 눈썹만 휙 치들 뿐, 얌전히 내 말을 경청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럼 더 거리낄 게 없지.

    “어차피 신하가 하는 일이 주군을 걱정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걱정하는 건데. 제가 폐하를 좀 걱정하면 어때서 자꾸 꼬치꼬치 물으세요? 대체 무슨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거예요?”

    속으로 꿍쳐두기만 했던 불만을 입에 담으니 평소의 생각들이 막힘없이 술술 나왔다.

    “그리고 제가 폐하를 염려하는 게 추궁까지 당할 일인가요? 오늘도 보세요. 제가 비싸고 귀한 포션을 사용해서 폐하의 두통을 낫게 해드렸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범죄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몰아가시고!”

    “그래서 억울하다?”

    “네! 제가 괜찮냐고 묻는 것도 싫고, 멋대로 포션을 먹이는 것도 싫으시면, 먼저 알아서 약을 드시면 되잖아요.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부리시고요!”

    “쓸데없는 고집……?”

    “그리고 제발 술 좀 그만 드세요. 담배도 그만 피우시고요. 그게 두통을 더 심하게 만든다는 거 아시잖아요? 다 큰 어른이면 그런 것쯤은 참을 줄도 아셔야죠. 제 동생 주세페가 더 어른스럽겠어요. 그 애는 술도 담배도 안 하거든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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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잖아]

    “말 다했나?”

    “아니요? 아직 한참 더 남았어요.”

    “그래도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약속하신 5분 아직 안 지났는데요. 신께 한 맹세를 어기실 건 아니시겠죠?”

    “하고 싶다면 계속해. 그런데 공녀가 종알거릴수록 머리가 아파서 입을 막아버리고 싶어져.”

    유지스가 내 입술을 응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좋다면 계속하고.”

    이건 협박이다. 아니면 경고든가.

    한데 그의 시선이나 목소리, 침실 안을 떠도는 들쩍지근한 공기 때문인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당연한가? 위협이 아니라 유혹에 가까울 테니까.

    나는 당황한 얼굴로 눈꺼풀만 연신 깜빡거렸고, 유지스는 그런 내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용케도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모양이지?”

    “글…쎄요?”

    ‘유지스의 호감도가 변했나?’

    [호감도: ♥♥♡♡♡]

    혹시나 해서 호감도를 확인하니 검은 하트가 3개에서 2개로 줄어있었다.

    비난을 듣고 호감도가 오르는 그의 기묘한 변태성에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으음. 일단 화제를 전환하자.

    나는 괜히 시계를 확인하며 말을 돌렸다.

    “앗, 5분 지났네요.”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시시해졌다는 듯, 방금까지 열기가 느껴지던 시선이 무료해졌다.

    유지스가 건조하게 충고했다.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거면 건드리지 마.”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유지스는 침실 문을 벌컥 열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리에게 비전 마법서를 스콰이어 가문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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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짓도 참 밉게 하네ㅡㅡ 얘는 안 먹어야겠다]

    유지스는 활짝 열린 문에 등을 기댄 채 날 돌아보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공녀는 이만 돌아가 봐. 여름 무도회에서 또 보도록 하지.”

    갑작스러운 축객령이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예를 갖추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호감도가 올랐다고는 하나, 그래도 검은 하트다.

    유지스와 시간을 길게 보내봤자 좋을 건 없었기에 미련 없이 침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날, 수도 전역에 내가 황제의 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   *   *

    한동안 파티가 끊이지 않았던 스콰이어 공작가가 적막에 잠겼다.

    100년 만에 되찾은 비전 마법서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전 마법서를 되찾게 된 경위 때문이겠지.

    라울은 무려 제프리가 직접 전령으로 나서서 가져온 비전 마법서를 돌려받으면서도 굳은 낯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100년 전 일에 황실이 개입해 있었단 사실을 확인하고 격노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걱정에 가까웠다.

    “오늘은 쉬고 내일 이야기하자꾸나.”

    그리고 오늘 아침.

    라울은 가족끼리 식사를 마친 후 나만 서재로 조용히 불러 앉혔다.

    “아비에게 솔직하게 말하거라. 황제 폐하와 어떤 사이냐.”

    유지스와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으리라는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었다.

    오늘 엘로이즈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황제 폐하께서 아가씨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는데, 진짜예요…?”

    사교계에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도 말했다.

    달갑지 않은 오해였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라울은 그럴 리가 있겠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특정인에게만 생전 하지 않은 행동을 보이고 계신다. 대상은 전부 너였지. 한데 어찌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게야?”

    그건 내가 이 세계관의 창조주라서 유지스도 무의식적으로 뭔가를 느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라울은 날 흘겨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질문 상대가 잘못되기는 했지. 폐하께서 널 총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데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먹지를 못하고 있으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폐하 성격에 제가 마음에 들었으면, 당장 황궁에 들어 앉혔을 거라고요.”

    “모르겠다는 말만 하던 것치고는 폐하에 대해 빠삭하구나.”

    “…아무튼 아무 사이도 아니고, 어떤 사이도 되고 싶지 않아요.”

    내 단호한 반응에 라울이 이마를 짚었다.

    “상대가 공작가 자제이기만 했어도 콧방귀나 뀌며 무시했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황제 폐하야. 마음이 있고 없고가 중요치 않아.”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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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신분제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황제 폐하께서도 저와 결혼하고 싶을 만큼 관심 있는 건 아니니까요.”

    “다시 말해서 결혼까지는 아니라도, 네게 관심이 있기는 하다는 게로구나.”

    말이 그렇게 되네…….

    라울은 양손을 깍지 끼고서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된 김에 약혼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느냐?”

    “네? 누구랑요?”

    “권력도 있고, 재력도 충분하고, 황제에게 쉽게 기죽지도 않을 정도의 입지가 있는 인물이어야겠지. 번스타인 교수나 발렌시아 후작이 해당하겠구나.”

    내가 어색하게 미소만 지으며 내키지 않는다는 낌새를 보이자, 라울이 미간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상황이 급한 걸 떠나서 다들 원하는 신랑감인데 뭐가 문제야? 설마 데미안 그놈 때문이냐? 널 버리고 비참하게 만든 놈이 뭐가 좋다고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려!”

    “그 일은 데미안이랑 상관없다니까요. 그리고 걔는 제 친구예요.”

    “진심이냐? 정말로 마음이 없는 게야?”

    “네. 정말로 없어요.”

    [‘데미안’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실망합니다.]

    라울은 몇 번이나 집요하게 정말로 마음이 없는 게 맞느냐 물었고, 나는 반복해서 우리는 친구라고 대답했다.

    쓸데없는 실랑이가 여러 번 이어진 후에야 라울이 마뜩잖아하는 음색으로 말했다.

    “그 녀석, 카펜터 공작의 친자로 인정받았다. 너와 정식으로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는 뜻이야. 한데도 네 마음에 변화가 없느냐?”

    뜻밖의 말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턱 막혔다.

    붉은 하트가 4개인 데미안이라면 절대로 그럴 리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배드엔딩 루트로 이어지고 있는 거지?’

    내가 미간을 찡그리고 있으니, 라울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은 눈빛으로 덧붙였다.

    “어제 네가 황궁에 있는 동안, 카펜터 공작이 우리 장학 재단과의 계약을 파기하러 직접 찾아왔다. 뻔뻔스럽게도 네게 약혼자는 있느냐고 묻더구나.”

    “……데미안이 카펜터 공자가 되었다고 해서 결혼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에요.”

    라울은 골치 아픈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자며 손을 내젓더니 비전 마법서를 거론했다.

    “널 따로 부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책의 자물쇠가 풀려있던데 읽어보았느냐?”

    “네. 다 읽지는 못했지만요.”

    “그래. 너도 읽어서 알겠지만, 이건 마신을 섬기는 신도들의 성전이다. 스콰이어 혈족은 대대로 마신을 섬기는 첫 번째 종이었지.”

    마신은 성신의 딸로, 검은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를 지녔다.

    마신은 성신을 대신해 세상에 내려와 인간들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사실은 비전 마법서가 사라지며 세상에 잊히고 말았다.

    “마신의 영향으로 스콰이어 직계 혈족은 검은 머리카락과 은회색 눈동자를 타고나게 되었지.”

    또한 마신은 자신의 신실한 종을 위해 강령술을 알려주었다.

    인간은 너무 약하고 보잘것없으니. 죽은 후 나비가 되어 다른 월등한 종족들 사이에서 살아남으라고, 애틋한 마음으로 준 능력이었다.

    라울이 들려준 이야기에 나는 감동하고 말았다.

    게임에서 성신과 마신에 대한 설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는 세계관에서 자체적으로 형성된 부분이었고, 그래서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세계를 나만큼이나, 어쩌면 나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마신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요.”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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