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악역영애-218화 (219/277)
  • 218화

    “구프엘?”

    젊고 아름답던 구프엘은 빠르게 늙어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힘을 전부 받게 되면 구프엘이 죽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힘껏 털어도 붙든 손에 강력한 자성이 생긴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변한 구프엘은 여전히 우아했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나를 타일렀다.

    “어차피 난 내 창조주께 버림받았다. 이대로 서서히 말라 죽어 가는 게 내게 주어진 말로였지. 그런 주제에 이런 성력을 가지고 있어봤자 뭘 하겠니?”

    “구프엘!”

    모든 성력을 전달한 구프엘이 하얀 모래가 되어 무너지기 전, 내게 말했다.

    “절대로 오즈월드를 믿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검은 장막이 내려앉듯 시야가 어두워졌다.

    * * *

    시야가 돌아왔다.

    돌과 금속으로 이루어진 공간이 내뿜는 차가운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찬 순간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허억!”

    띠링!

    [성좌 ‘테레제에 인생 베팅’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왜 갑자기 쓰러졌어ㅠㅠ 괜찮아?]

    ‘어지러워.’

    온몸이 욱신거렸다.

    세포 하나하나가 예민하게 깨어난 이 감각을 딱 한 번 느껴본 적 있었다.

    바로 빛의 제단에서 클라이드가 죽던 순간이었다.

    사무엘에게 형벌을 내릴 때 느낀 초월적인 상태였다.

    심장의 울림이 온 육신을 뒤흔들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턱에 고여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까지 귓전에 천둥이 치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우욱…!”

    극심한 어지럼증이 밀려들며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내가 왜 이러지? 그 성력이라는 것 때문인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똑바로 있기가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움찔.

    그때 유지스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깨어난 건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을 들어 유지스를 응시하고 있으니 그가 눈을 뜨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유지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짐이 쓰러졌었… 왜 그러지?”

    내 상태를 본 유지스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를 보니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힘겹게 입술을 떨어뜨렸다.

    “폐하… 이제 괜찮으세요?”

    말을 끝맺자마자 혼절해버린 탓에 대답은 듣지 못했다.

    * * *

    황제의 침실은 유례가 없는 사태로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시종장 베인과 방을 치우는 시종들, 황궁의, 제프리, 그리고 유지스와 침대에 누워있는 테레제까지.

    심지어 다들 신발에 천을 덧대고 있지도 않았다.

    유지스 황제의 치세 중 단 한 번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황궁의는 진찰을 마친 듯 황제에게 테레제의 상태를 보고했다.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상태이기는 하오나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어, 곧 깨어나실 겁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 말에 유지스가 한쪽 눈썹을 치올렸다.

    “걱정? 짐이 왜 걱정을 한다는 것이냐? 공녀를 침대에 눕혀놓았다고 해서 짐의 애인이라고 생각했나?”

    황궁의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 침대에 눕히는 쪽이 훨씬 이상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유지스의 날카로운 반응에 얼른 사죄했다.

    “소인이 실언했습니다, 폐하.”

    유지스가 성가시단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황궁의는 불똥이 튀기 전에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그가 날카롭게 반응하기는 했지만, 평소와 비교하면 몹시 온유한 태도라 볼 수 있었다.

    신속하게 침실을 치우고 테레제가 가져온 마법 꽃까지 예쁘게 장식을 마친 시종들이 물러나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제프리가 말문을 열었다.

    “큰 이상이 없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스콰이어 가문에 알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테레제가 입궁한 지 1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젊고 미혼인 영애가 황제에게 잘 보이려 미련하게 며칠씩 쫄쫄 굶다가 파티장에서 혼절하는 일도 종종 있지 않은가.

    물론 제프리는 예전의 테레제라면 몰라도 현재의 테레제가 그런 행동을 할 것 같지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황실 편의적으로 치부해버렸다.

    제프리는 무려 본인 침대를 내어주고서 침대 옆에 놓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황제를 힐끗 훔쳐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군.’

    며칠간 침실 근처로는 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하게 했던 유지스가 돌연 밖으로 나와 큰 소리로 베인을 찾았고.

    베인이 필요한 인력을 전부 데리고 침실에 왔을 때는 이미 테레제가 혼절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황제가 직접 테레제를 본인 침대에 눕혔다는 뜻이었다.

    제프리의 시선은 고운 얼굴로 잠든 테레제에게 향했다.

    예쁘장한 얼굴인 건 알았다.

    한창 미모에 물이 오를 나이이기도 했다.

    한데 테레제 스콰이어는 그 정도가 지나칠 정도로 볼 때마다 눈부시게 미모가 피어났다.

    그래서 지독한 인간 불신자인 황제조차 마음이 동한 건가 싶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테레제 양이 깨어나면 적당한 보상을 내려 무마하는 쪽이 좋을 듯합니다만. 어찌 처리할까요, 폐하?”

    유지스는 아무래도 좋았기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알아서 처리해.”

    “예, 폐하.”

    제프리가 예를 갖추고 침실을 나가자 베인도 마찬가지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유지스는 딱히 둘을 붙들어둘 생각은 없었으나 미혼의 영애를 이곳에 혼자 두고 다들 나가버리는 작태에 헛웃음을 흘렸다.

    “뭘 기대하는 건지.”

    요즘 황궁 내에서 테레제의 평판이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러든가 말든가 내버려 두었더니 이 꼴이었다.

    “어이가 없군.”

    그는 눈을 뜨자마자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 걸 깨닫고는 테레제가 제게 포션을 먹였음을 눈치챘다.

    게다가 혼절하던 와중에도 괜찮냐고 묻는 태도까지, 하나 같이 거슬렸다.

    “진짜 속내가 뭔지 궁금한데.”

    마법 농원에서 테레제가 이제부터 애틋해지겠다고 말하던 순간이 저주처럼 유지스의 뇌리에 남았다.

    이젠 존재하지도 않는 줄 알았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게 불쾌했다. 자신의 감정이 역겹고 추했다.

    또 예전처럼 머저리가 될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

    한데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면 할수록 두통은 심해졌고 악몽이 매일 나타났다.

    사실상 테레제가 최근 황실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것도 모르고서 다들 은밀하게 영웅을 보듯 테레제를 힐끔거리는 꼬락서니에 신경질이 날 정도였다.

    “쯧.”

    유지스는 혀를 차며 전리품 창고에서 테레제를 데리고 나올 때 함께 챙겨온 스콰이어 비전 마법서를 소환했다.

    테레제의 몸통만 한 비전서가 유지스의 손에 들리자 썩 커 보이지 않았다.

    “감히 짐이 허락하기도 전에 비전 마법서를 건드리질 않나.”

    그는 테레제가 쓰러진 원인이 스콰이어 비전 마법서 때문임을 진작 눈치챘다.

    자물쇠가 풀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책인데 대체 왜 혼절한 것인지 모르겠군.”

    아마도 비전 마법서에 혈족에게만 반응하는 장치가 걸려 있는 듯했다.

    그러니 역대 황제 중 누구도 이 책을 열어본 이가 없는 것이리라.

    유지스는 시시하다는 얼굴로 책장을 넘기다가 덮어버렸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책을 얻으려고 두 가문을 이간질했다니.”

    100년 전, 윌로우의 후계자가 정부와 도망치며 스콰이어의 장녀를 모욕한 일은 사실 황실에서 꾸민 음모였다.

    두 가문의 결합은 로드리고 황가에 위협적이었으며 스콰이어 가문의 비전 마법서를 탐냈기 때문이다.

    이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마법서가 아니다.

    마신과 통할 수 있는 수단인 ‘성서’였다.

    유지스는 턱을 괸 자세로 테레제의 말간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속이 끓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대체 정체가 뭐야.”

    대체 뭐길래 이렇게 특별해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화가 났다.

    * * *

    치지지직.

    [“안녕, 신지우.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흑백 영상이 송출되고 있는 옛날 텔레비전과 낡은 소파. 저번에 온 장소였다.

    화면에는 아름다운 소년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오늘은 저 소년이 ‘오즈월드 컴퍼니 피해자 연합’ 수장의 본체를 대신해 나와 대화할 모양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인가.’

    피아노를 전공한 동생이 매번 똑같은 부분을 틀리다가 성질을 못 이기고 피아노 한 대를 부숴버렸던 적이 있다.

    ‘그때 연습하던 곡이 바로 저 곡이었는데.’

    나는 오래된 상념을 치우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오즈월드는 잠잠하고 당신이 나타난 걸 보니 그 남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요?”

    [“역시 판단 능력이 좋구나. 네 말대로 판테온에 문제가 생겼어. 아니, 일으켰다고 해야겠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저한테 쉽게 알려줘도 돼요? 배신하면 어쩌려고.”

    [“너는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저번에도 느꼈지만, 기이할 정도로 날 신뢰했다.

    저 신뢰는 내 성격을 믿어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약점을 쥔 사람의 태도와 비슷해. 그렇다고 내 약점을 쥐고 궁지에 몰려는 것처럼 보인다는 건 아니지만.’

    “오늘 시그니오 황제가 다스리는 행성을 다녀왔어요. 당신이 보낸 건가요?”

    [“이번에는 우리가 한 게 아니야. 아마도 너의 세계가 네게 필요한 걸 주기 위해 보낸 것 같은데?”]

    그게 설마 구프엘의 성력이었나?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힘을 얻고 싶지 않은데.’

    내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본 소년이 위로를 건네듯 조용하고 부드러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달빛’이었다.

    [“구프엘이 하는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 자책하지 마.”]

    “구프엘과 아는 사이였어요?”

    [“응. 너무나도.”]

    소년은 잠깐 미소 짓더니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네게 성력이 생겼단 사실을 오즈월드가 알지 못하도록 숨겨주려고 왔어. 꿈에서 깨어나면 저절로 그렇게 되어있을 거야.”]

    나는 문득 저 사람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 이름은 뭐예요?”

    [“아차. 우리가 아직 통성명을 안 했던가? 하디라고 불러줘.”]

    궁금한 게 또 있었다.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가 뭐였죠? 못 들었었거든요.”

    소년이 “아, 그거?”라고 중얼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네가 오즈월드의 소원이 될 수 있겠다고 말했었어.”]

    “소원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오, 이런. 너무 늦었어. 소원이라고 말한 건 딱히 의미심장한 비유가 아니야. 있는 그대로의 뜻을 생각해봐. 그럼 안녕.”]

    툭.

    티비가 꺼졌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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