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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17화 (218/277)

217화

* * *

눈앞에 검은 장막이 내려앉은 건 찰나에 불과했다.

한데 그 찰나의 시간동안 무언가 크게 바뀌었다.

먼저, 공기가 텁텁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으면 이만 눈 좀 떠보게, 이방인.”

낯선 목소리였고, 낯선 언어였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분명한 목소리의 주인은 부드럽고 우아한 말투를 사용했다.

그리고 나를 ‘이방인’이라 불렀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시야에 빛이 스미며 앞이 환해졌다.

“여긴, 콜록!”

여기는 어디냐고 물으려는데 목이 바짝 말라 기침이 사정없이 튀어나왔다.

내가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괴로워하자 물에 탄 코코아색 옷을 걸친 여자가 다가와 물을 마시게 도와주었다.

“천천히 마시게.”

바가지에 담긴 물을 전부 마시자 깔끄럽던 공기가 한층 부드럽게 느껴졌다.

나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내게 물을 준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하관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매우 아름다웠다.

“감사합니다.”

내가 제대로 된 첫마디로 감사 인사를 건넬 줄 몰랐다는 듯 여자가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더욱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의 바른 이방인이로군. 소속되지 않은 차원으로 이동되어 상태가 좋지 않을 텐데도.”

여자의 말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있어 정리가 필요했다.

“잠시만요. 제게 잠깐 생각할 시간 좀 주시겠어요?”

“영리하구나. 침착하기까지 하고.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모양이지?”

여자는 내가 한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아주 제 마음에 쏙 든다는 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숨만 잘 쉬어도 칭찬을 퍼부을 기세에 외려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자, 우선 방송이 멀쩡한지부터 확인해 보자.’

나는 상태창을 전부 불러내 보았지만 먹통이었다.

성좌들의 후원도 뚝 끊겼고.

‘지난번에 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처럼 오류가 발생한 건가.’

다음으로 확인해 볼 것은 장소였다.

이곳은 천막 안이었다.

바닥은 버적버적하게 모래알이 밟혔고 살림살이를 보아하니 단출하다 못해 초라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후텁지근했다.

여름인가 싶은데 막상 내 앞의 여자는 온몸을 천으로 감싸고 있었다.

‘꼭 사막 부족처럼 보여.’

그렇다는 건 여기가 사막 지역이라는 뜻일까?

이건 바깥 상태를 보면 곧바로 확인될 의문이었다.

“잠깐 밖을 확인해봐도 될까요?”

“그편이 이 행성을 이해하기가 빠르겠지.”

여자는 좋은 선택이라며 나를 데리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은…….

“벽?”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거대한 벽이었다.

혹시 여기가 성벽 내부였나 싶어서 뒤를 돌았다. 한데 또 거대한 벽이 보였다.

두 벽의 차이점이 있었다.

앞쪽에 보이는 벽보다 뒤쪽의 벽이 훨씬 깨끗하다는 것.

여자가 앞쪽의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벽 너머는 사막이라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하늘에 뜬 커다란 달을 발견했다.

“이만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더 있다가는 자네의 연약한 피부가 견디지 못할 거야.”

우리는 다시 천막으로 들어와 낡은 테이블을 가운데에 두고서 마주 앉았다.

음. 우선 통성명해야겠지?

“저는 테레제 스콰이어라고 합니다. 테레제라고 부르세요.”

“음? 이번에야말로 여기가 어디냐고 물을 줄 알았더니 인사부터 하는 건가? 난 구프엘이라 하네.”

구프엘은 점잖고 우아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지만 숨겨지지 않는 장난기가 엿보였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는 사람인데도 알 수 없는 호감이 느껴졌다.

그건 구프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나는 구프엘이 물어 봐주길 계속 기다리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이곳은 시그니오 황가의 행성이라네. 그리고 여긴 7구역이지. 7구역이란 일곱 번째로 폐기된 구역이라는 뜻이네.”

구프엘은 설명하길 좋아하는 성격으로 추정되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살던 곳과 전혀 겹치는 게 없는 설정이라서 이해가 잘 안 가요.”

“설정? 재미있는 표현법이군.”

“여기가 시그니오 황가의 행성이라는 건, 이 행성 자체가 하나의 제국이라는 건가요?”

“그렇단다.”

그러니까 한 황가가 지구를 다스린다, 이런 느낌인 거지?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SF물에서 충분히 다뤄질 법한 이야기였다.

“일곱 번째로 폐기된 구역이라는 건 이곳이 모종의 이유로 척박해져서 버려졌다는 뜻이겠죠. 벽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이곳과 달리 풍요로울 테고요?”

“정확하게 파악했군. 이번 이방인은 이해력이 좋구나.”

이제 이 차원에 대한 이해는 얼추 마쳤다.

“저처럼 다른 차원의 사람이 이곳으로 종종 떨어지나요?”

“별의 힘이 약해질수록 외부의 간섭이 쉬워지거든. 그래서인지 종종 길을 잃은 이방인이 흘러들어오지. 참고로 넌 이 앞의 우물가에 쓰러져 있었단다.”

별의 힘이 약해질수록.

이는 폐기된 구역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이 행성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건가요?”

“그래. 별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끌어다 사용한 탓이지.”

구프엘이 돌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 앉은 자세로 손바닥을 아래로 펼쳤다.

그러자 모래알이 굴러다니던 바닥에서 녹색 이파리가 퐁퐁 튀어나오더니 금세 천막 안이 잔디밭으로 변했다.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구프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별의 에너지를 사용해서 죽은 것도 다시 살릴 수 있다네. 대신 행성의 어딘가는 더 황폐해졌겠지만.”

“이곳에는 마력이 없나요?”

“마력? 그게 뭐지?”

“모여라.”

나는 마법을 사용해 허공에 물을 생성했다.

하나 물은 금방 사라져버렸다.

“어?”

마법이 유지되지 않아 놀라고 있을 때 구프엘이 눈을 반짝였다.

“오, 그게 마력이구나. 아주 약한 힘이지만 재미있어.”

“여긴 마력이 잘 유지되지 않네요.”

“아마도 그보다 상위 에너지가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마력도 결국 에너지니까 성력(星力)에 흡수되어버리는 것 같구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곳은 내가 모르는 세계다.

그리고 난 이런 경험이 한 차례 있었다.

“이 행성의 황제 이름이 혹시 오즈월드인가요?”

구프엘은 몹시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당황한 것처럼 잠시 침묵하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끌어 내렸다.

“황제 폐하를 알고 있니?”

“네. 만난 적 있어요.”

“만난 적도 있다고? …설마 그게 황궁이었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프엘이 이마를 짚었다.

“폐하께서 수배령을 내린 이방인이 너였구나.”

“네? 수배령이요?”

“얼마 전부터 황제 폐하의 직속 기사들이 나비와 함께 사라진 침입자를 찾고 있단다.”

‘설마 낙원의 문을 통해서 만났던 그때와 시점을 공유하는 건가?’

구프엘은 좀 더 은밀한 장소로 이동해야겠다며 내 손을 잡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폐하께서 네게 성력을 나눠주셨니?”

“네? 아뇨, 그런 적은…”

없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뇌리로 영상이 하나 탁 켜진 듯 어떤 장면이 재생되었다.

“또 성가신 짓을 벌이고 있군요.”

오즈월드……?

‘잠깐만. 이게 무슨 기억이야? 오즈월드가 왜 내 손에 키스하고 있지?’

장소는 천계였다.

아마도 내가 한창 잠이 모자라 상태가 좋지 않았던 때인 것 같았다.

한데 이상했다. 이때의 나는 오즈월드를 만난 적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즈월드가 내 얼굴에도 입을 맞추는 역겨운 짓거리를 절대로 잊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나는 그에게 매달리며 더 입 맞춰주길 갈구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흘려 넣어주는 어떤 힘을 갈구한 것이었다.

그가 입을 맞추는 자리마다 별빛이 마구 쏟아지는 듯 경이로운 감각이 흘러들어왔다.

“이제 곧 정신이 들 겁니다. 이 순간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오즈월드는 일부러 내 기억을 지운 거였다.

“어차피 곧 창조물을 믿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을 때, 경악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구프엘과 눈이 마주쳤다.

“자네는 아주 먼 미래에서 온 존재였군. 그 이상한 머리에 빨간 옷을 입은 남자는 폐하처럼 보이던데.”

“제 기억을 보셨어요?”

구프엘이 날 붙들고 있던 손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폐하의 성력과 내 성력이 공명하며 일부러 지운 기억이 되살아난 것 같더구나.”

나는 오즈월드에게 입맞춤 당했던 손을 쓸어 만졌다.

‘성력이 여전히 내 안에 존재하는 거라면, 사용할 수도 있나?’

하지만 마력 이외의 다른 힘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성력을 확인해 보는 사이 구프엘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폐하께서는 결국 원하는 바를 쟁취하신 모양이구나.”

‘오즈월드가 원하는 게 뭐지?’

구프엘은 내가 뭘 궁금해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덧붙여 말했다.

“전지전능한 자유.”

자유라는 말의 수식어로 전지전능이 붙자 몹시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게 정확한 표현이야.’

오즈월드는 성좌들이 사는 판테온에서도 압도적인 힘을 가진 채 인간을 장난감으로 만들어 쥐락펴락하는 존재이잖은가.

그러다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당신은 어떤 존재이길래 황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건가요?”

구프엘은 겸연쩍게 대답했다.

“내가 폐하의 스승이었기 때문이지.”

오즈월드의 스승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충격적인 정체가 연속해서 밝혀져다.

“그리고 한때 약혼자였다. 파혼한 지 오래되었지만.”

내가 충격으로 입을 떡 벌리자 구프엘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분을 사랑한 게 아니라 성녀는 원래 황제 폐하와 혼인하게 되어있단다.”

황제의 스승이자 약혼자였던 사람이 어째서 이런 척박한 곳에 천막을 쳐두고 초라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성녀가 정확히 어떤 위치인지는 모르겠지만, 황후가 될 정도라면 엄청난 지위인 것 같은데.

나는 구프엘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하나 대화를 시도하기도 전에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구프엘이 굳은 표정으로 성력을 펼쳐 천막을 반투명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이리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12인의 기사들이다. 널 찾으러 온 게 틀림없어 보이는구나.”

“12인이 아니라 13인 같은데요?”

“황제의 직속 기사는 정원이 12명이란다. 13명일 리 없지. 아무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들은 이 차원에서 가장 강력하니 어서 피해야 해.”

그때 갑자기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빛에 휩싸인 채 옅어지기 시작했다.

위험한 느낌은 아니었다.

구프엘은 나를 살펴보더니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의 신은 자비롭군. 위험해지니 네가 살던 곳으로 도로 데려가는 걸 보면.”

그러고 보니 스콰이어 비전 마법서가 날 이리로 보낸 건데, 대체 이유가 뭐였을까?

‘돌아가면 다시 책을 확인해봐야겠어.’

“만나서 반가웠어요, 구프엘.”

“나도 무척 반가웠다.”

그때 구프엘이 투명하게 옅어진 내 손을 붙잡았다.

‘악수하려는 건가?’

“이건 작별 선물이란다.”

그 말과 함께 내 안으로 별처럼 눈부신 힘이 쏟아져 들어왔다.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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