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사무엘의 눈빛은 광기에 휩싸여 혼탁하게 번들거렸다.
그야말로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모습에 원로 천사들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래도 과거의 영광을 생각해서 원로 천사들은 최대한 점잖게 그를 대해주었다.
“여긴 당신이 낄 자리가 아닙니다. 돌아가시죠.”
사무엘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쳐버렸다.
창조주를 보았노라고. 그리고 버림받았노라고.
그는 종말론을 외치고 다니는 사이비 교주처럼 천계는 곧 멸망할 거라고 주장했다.
“창조주께서는 당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천계를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보다 못한 원로 천사 중 하나가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
“헛소리할 거면 썩 꺼지시오! 가뜩이나 지금 일리야 때문에 비상사태인데 시간 뺏지 말고!”
사무엘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닐 텐데, 참 어리석군요. 어차피 일리야 손에 죽지 않더라도 당신들은 곧 심판당할 겁니다.”
“입조심 하시오, 사무엘!”
“하나 우리는 죽어도 구원받지 못할 겁니다. 그럴 바에는 신께 용서를 구하고 지옥이나 다름없는 천계에서라도 빌빌거리며 사는 게 낫지요.”
사무엘은 모두를 격분하게 만들어놓고 흥이 떨어졌다는 듯 원로원을 나오다가 자카리를 발견했다.
그러자 잔뜩 뒤틀려있던 표정이 한순간에 돌변해 다정하고 애처로워졌다.
“아들아.”
자카리는 늘 고압적이고 차가웠던 아버지의 성격이 유해진 것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다.
“내게 인간계로 갈 수 있는 권한을 넘겨다오. 더 늦기 전에 용서를 구해야 해.”
사무엘은 계속해서 자카리에게 인간계로 내려갈 권한을 넘기라고 윽박지르고 타이르고 애원했다.
지금까지는 남들처럼 단지 아버지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나 그의 입에서 ‘테레제’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상황이 달라졌다.
“제발 부탁이다. 난 테레제 님을 뵈어야만 해!”
그때, 자카리의 뒤편에서 일리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추해졌군, 사무엘.”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경멸이었다.
사무엘은 일리야를 발견하자마자 악귀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오랜만이군, 일리야. 동생의 복수를 하려고 일부러 날 찾아온 것인가?”
동생이란 말에 일리야가 눈썹을 까딱 움직였다.
유일하게 얻은 색다른 단서였다.
그래서 떠보았다.
“클라이드의 복수를 말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낙인이 사라지자마자 헐레벌떡 천계로 진입한 이유가 없잖은가.”
사무엘은 낄낄 웃으며 일리야를 조롱했다.
“아니면 이번엔 자네가 제단에 올라 희생되어 줄 생각인가? 보다시피 천계를 유지해주던 클라이드의 생명력이 갑자기 사라져버렸거든.”
“……아아.”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야 전말이 대강이나마 이해되었다.
“내게 클라이드라는 형제가 있었고 그가 천계를 위해 희생되었군.”
그래서 자신이 원로 천사들을 죽이고 악마가 된 거였다.
그제야 아귀가 맞지 않았던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지기 시작했다.
일리야가 사무엘에게 물었다.
“테레제가 몽마의 꿈속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못하도록 한 건가?”
“그래. 창조주께서 내게 내리신 형벌이지. 덕분에 나는 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었다.”
테레제가 창조주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인간에 불과했다.
한데 무슨 수로 사무엘에게 저런 형벌을 내릴 수 있었던 걸까?
아무래도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빛의 제단을 직접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일리야는 사무엘을 후려쳤다.
사무엘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넝마처럼 바닥을 굴러야 했다.
일리야는 정신을 잃은 사무엘을 벽에다 십자 형태로 매달았다.
당장 죽이진 않았다.
괜히 소란이 일어나서 정작 중요한 일을 하기도 전에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길 수도 있었으니까.
빛의 제단에 다녀온 후 원로 천사들을 전부 처단해도 늦지 않는다.
일리야가 날개를 펼치자 이곳까지 그를 안내한 자카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정말 테레제 스콰이어가 창조주란 말입니까?”
“창조주라기보다는 창작자라 표현하는 쪽이 더 정확하다. 이곳은 그녀가 만든 이야기 속 세상이니까.”
“……이야기라고요?”
“그래. 이 세상은 허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야기를 실제 차원으로 생성한 자가 따로 있다는 뜻이지.”
자카리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어지럼증마저 느꼈다.
일리야는 떠나기 전, 혼란스러워하는 자카리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잃어버린 ‘클라이드’를 되찾는 거다. 그가 사라지며 이야기가 뒤틀려버린 것 같으니까.”
일리야는 거기까지 설명해주고는 곧장 빛의 제단으로 이동했다.
실로 오랜만에 오게 된 빛의 제단은 여전히 성스러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불미스러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일리야는 제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이곳이 이렇게 어두웠나?”
제단 위로 쏟아지는 빛은 여전했다. 한데도 묘하게 기억보다 어두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일리야는 곧 답을 찾았다.
그가 선 자리에서부터 벽까지 마치 불에 그을린 것처럼 어떤 자국이 생겨나 있었다.
아니, 그을린 게 아니라 형체 없는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비 날개?”
흐릿하게 남은 자국은 한 쌍의 나비 날개 모양이었다.
제단에 이런 자국이 남을 이유가 있나?
의아하진 일리야가 무릎을 굽혀 날개 자국에 손을 대었을 때였다.
“여기서 또 뵙는군요.”
낯선 기억이 떠올랐다.
추적자를 전부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코앞에서 검은 우산을 쓴 웬 사내가 나타났었다.
그는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을 걸었다.
“우리가 만난 적 있었나?”
“꿈에서였죠. 기억나지 않겠지만.”
상대가 말한 ‘꿈’의 정체는 몽마의 꿈이 틀림없었다.
거기까지 짐작해내자 곧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몽마의 꿈속에서 상대를 만났던 기억이었다.
“실례지만 방송에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뇌리에서 지워져 있던 일과 함께 상대의 이름이 기억났다.
“오즈월드.”
이름을 육성으로 내뱉은 순간.
스르르르르르륵――――――!
갑자기 날개 자국이 짙어지더니 손을 대고 있는 지점으로 쏜살같이 모여들었다.
“-!”
강력한 힘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와 일리야의 육신을 지배했다.
세포가 하나하나 뒤바뀌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재구성되는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날개가 허물어졌다.
밝은 녹안이 어둡게 물들고 머리카락은 다시금 검붉은색으로 뒤바뀌었다.
창조주가 조형했던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하나 완벽하게 다른 존재가 되었다.
일리야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신음했다.
“이게 대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혈관을 타고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 * *
나는 몸단장하는 내내 미심쩍은 상태로 거울을 노려보았다.
꽃무늬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내 모습은 보기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의문인 점은, 정말로 이게 황제가 말한 ‘예쁜 꽃’이냐는 거였다.
‘괜히 비웃음당하는 거 아니야?’
어쨌든 황실에 가져갈 꽃은 엄격한 기준으로 선별해 마차에 실어두었다.
유지스에게 선물할 좋은 술과 시가도 준비했다.
게다가 내 예법은 마침내 상급 수준으로 올랐다.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상태였다.
라울은 나를 마차까지 데려다주며 걱정스러운지 미간을 펴질 못했다.
“정말로 아비가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그럼요. 사업 이야기를 하러 가는 건데요.”
‘스콰이어 비전 마법서를 확인해야 해서 저 혼자만 가야 해요.’
나는 절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라울을 안심시킨 후에야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다녀올게요.”
마차는 황궁으로 출발했다.
“오늘따라 날씨도 좋네.”
며칠 내내 더위가 기승이더니 오늘따라 숨이 턱 막히던 열기가 얌전했고 바람도 싱그럽게 불었다.
모든 게 좋은 징조로 느껴지는 상쾌한 날씨였다.
황궁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베인 시종장이 몸소 입구까지 나와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녀님!”
시종들은 뒤따라 우렁찬 목소리로 내게 깍듯이 예를 갖추었다.
그게 이상했다.
‘콧대 높은 황실 사람들이 날 이렇게까지 반길 이유가 없는데?’
게다가 다들 묘하게 살았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베인 시종장을 따라 태양궁으로 들어섰을 무렵,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궁인들이 전부 신발에 천을 덧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인이 자리에서 굳은 날 보더니 들켜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실은 폐하께서 최근 들어 계속 기분이 안 좋으셨습니다.”
띠링!
[성좌 ‘개복치 황제 유지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아이고]
상급 예법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나는 속으로 욕설을 한 바가지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폐하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신하 된 자세로 부드러운 음성을 낼 수 있었다.
“제가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군요. 폐하께서 제 방문을 탐탁하게 여겨주시는 날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냉큼 튀려고 했을 때였다.
“죄송하지만 현재 누구도 폐하의 침실을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오늘의 방문 일정을 미뤄달라는 청도 드리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 말씀은……?”
베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원래 일정대로 이행해주시길 바랍니다.”
무서워서 아무도 못 들어가는 황제의 침실에 기어이 날 밀어 넣겠다는 뜻이잖아!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