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28. 여름 무도회
나는 장인을 통해 실링팬을 구현해냈다.
실링팬은 시범적으로 공작저 별채에 설치되었다.
실링팬 시연식에 참석한 라울과 로잔이 시원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며 감탄했다.
“어머나, 정말로 시원하네.”
“간단해 보이는 장치인데 효과가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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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이면 본관에 설치하지 왜 별채에다가 달아놓은 거예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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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저택에 덩그러니 실링팬 달아놓으면 볼품없어 보이고 분위기도 안 맞음]
‘프로훈수러’ 성좌의 말대로였다.
귀족들은 겉보기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족속들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물건이라고 해도 주변과 어우러지지 않으면 대번에 안목이 떨어진다며 흠을 잡을 것이다.
그래서 더운 나라 특유의 분위기를 살려 별채를 꾸밀 작정이었다.
그러면 스콰이어 가문에서 여는 특별한 여름 파티에 대해 입소문이 퍼질 것이고, 괜찮은 평판을 쌓을 거라는 계산이 착착 세워졌다.
계획을 들은 라울이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확실히 이런 쪽은 아비보단 네가 전문가로구나.”
“…….”
이거 칭찬 아닌 것 같은데?
파티광이었던 테레제의 과거를 돌려 까는 거 맞지?
내가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로잔이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관상용 식물로 내부를 채워두면 온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느껴질 테지.”
“네. 티파티에는 구운 과자나 빵 대신 과일이나 디저트 와인, 차갑게 식힌 차가 잘 어울릴 거예요. 주스도 좋고요.”
“달콤한 과일은 기후가 따뜻한 곳에서 잘 자라니 그런 점이 잘 연상되겠구나. 좋은 생각이야.”
드레스 코드는 마법 식물을 이용한 장식 혹은 꽃무늬 옷으로 하면 파티에 초대된 손님들도 확고한 콘셉트에 즐거워할 것 같았다.
“마법 식물은 농원에서 얼마든지 공수할 수 있으니 그걸로 코르사주를 만들면 될 거예요.”
로잔이 내게 물었다.
“이 공간에 네 손님을 먼저 초대하는 건 어떠니?”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클예부였다.
‘클예부는 어떻게 됐을까? 연결고리인 클라이드가 사라졌는데 뭐라고 하면서 초대해야 하지?’
내가 고민하고 있자 로잔이 운을 띄웠다.
“왜, 널 무척이나 따르는 영애들 있잖니.”
그러자 라울이 골치 아파하는 얼굴로 불쑥 끼어들었다.
“테랑둥이인지 뭔지, 그 클럽을 말하는 것이오? 맨날 몰려다니면서 술 마시고 사고 치는 영애들이잖소.”
테랑…… 뭐라고요?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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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예부에서 테레제 추앙하는 클럽으로 바뀌었구나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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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납득된다… 클예부 애들이 이상할 정도로 테레제를 좋아하더라고]
“젊을 땐 다 그런 거죠, 여보. 당신도 테레제 나이에 그랬잖아요.”
“전혀!”
로잔이 라울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작위적으로 호호호 웃었다.
“여보? 여름 방학인데 테레제도 친구들을 불러서 좀 놀기도 해야죠. 내내 집이랑 농원에만 있었는데,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나는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 시간이 생기자 그간 미뤄둔 일을 몰아서 처리하느라고 매우 바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라울은 뭔가 깨닫는 게 있었는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사교 시즌에는 파티를 주최하거나 참석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지. 공녀의 지위에 걸맞게 대외 활동에 신경 쓰도록 해라.”
맞는 말이긴 한데 문제가 있었다.
“딱히 부를 사람 없어요.”
내 대답을 들은 라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이름으로 들어오는 선물만 해도 방 두 개는 너끈히 채우는데, 왜 부를 사람이 없어?”
기숙사에서 지내느라 집에 오지를 않으니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진짜로 없는데…….”
리비와 주세페는 친구가 많다.
오늘도 두 사람은 친구들이 초대한 파티에 참석하느라 아쉽게도 실링팬 시연식에 불참했다.
으음. 이러니까 나 되게 친구 없는 것 같잖아? 아니…… 없나?
‘미모사 정도면 친구지.’
뭐, 친구가 있든 없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마법 농원 일이 바빠서 시간이 없……”
띠링!
[퀘스트: 올해의 사교계 꽃으로 선정되기]
▸보상: 100,000,000코인
▸실패: 사교계 평판이 최악으로 떨어져 수도에서 추방
“……지만 역시 사교 시즌에는 파티가 가장 중요하죠.”
사교계의 꽃이 되려면 여름 무도회 마지막 날에 황제와 첫 춤을 춰야 한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교계 꽃이 된다는 건 꽤 복합적인 개념이었다.
그해 결혼 시장에 뛰어든 여성 중 얼마나 매력적인 파티를 주최했는지, 주변 평판은 어떤지, 외모나 패션, 교양 수준 등.
평가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통틀어 그해 가장 매력적인 미혼의 영애를 뽑아 앉히는 대단히 성가신 자리였다.
황후 엔딩을 보려면 반드시 사교계의 꽃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남주를 통틀어 유지스 루트가 제일 어려운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괴로움에 머리를 싸매며 끙끙 앓았다.
그러자 라울이 묘하게 속상한 표정을 짓더니 굳은 결심을 마친 얼굴로 내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리 고민할 것 없다. 친구 따위는 아비가 얼마든지 만들어 주마.”
“네?”
갑자기 무슨 말이지?
내가 맥락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을 때 라울이 전장에 나가는 기사처럼 집사에게 결연히 말했다.
“수도에서 가장 화려하고 호화로운 파티를 열겠다. 황궁 무도회보다 더 웅장하게 준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가주님.”
“……??”
설마 내가 친구가 없어서 괴로워하는 거라고 오해받은 건가?
띠링!
[성좌 ‘로판중독영애’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기대되는군요. 사교계의 꽃을 거머쥘 그 날이.]
마침 사교계 평판을 올려야 하니 라울이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게 무척 도움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떨떠름하지……?
* * *
사교계의 꽃이 되는 첫걸음은 ‘테랑둥이 클럽’을 초대하는 일이었다.
테랑둥이는 테레제와 사랑둥이라는 끔찍한 합성어였다.
“꺄아아~ 오랜만이에요!”
“다들 잘 지내셨죠, 우리 테랑둥이들?”
“이렇게 발할라가 아닌 멋진 곳에서 만나니까 더욱 반가워요!”
“꺄르르륵!”
대체 얘들은 왜 내 팬클럽을 만든 거지?
그리고 왜 테레제가 자기 팬클럽의 회장인 건데?
‘다 이상하잖아!’
띠링!
[성좌 ‘로맨스극혐’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테레제가 본인 팬클럽을 스스로 만들었다는 설정으로 바뀐 거 잘 어울리네; 시스템 캐해 정확도 보소 ㄷㄷ]
아니, 본인 팬클럽을 만든 건 그렇다 치자.
대체 얘들은 왜 거기에 가입한 걸로 된 거냐고.
심지어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는 눈치였다.
‘혹시 이것도 오류가 아닐까? 그것도 굉장히 심각한 오류 같은데.’
나는 불안한 마음에 마력을 이용해서 클라이드의 모습을 허공에 구현해보았다.
“얘들아, 이 남자 어때?”
그러자 별채가 조용해졌다.
다들 클라이드를 보더니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그러다 별채가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악!”
“뭐, 뭐, 뭐예요, 저분은?!”
“대체 누구죠? 누구신데 이렇게나 완벽한 얼굴일 수가 있죠?”
“실존 인물인가요? 실존 인물이죠? 그렇죠?”
“이상하게 어떤 남자를 봐도 눈에 차질 않더라니. 저는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아으윽…! 당장 이분을 추종하고 싶어요…!”
클예부는 다행히도 정상이었다.
이들이 클라이드에게 제대로 반응한다는 사실이 꼭 그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증거 같기도 해서 이상하게 안심되었다.
내가 마력을 거두자 영애들은 몹시 안타까워하며 야단법석을 부렸다.
간신히 분위기가 진정되었을 때, 누군가가 내게 질문했다.
“혹시 파비오 영식이 새로운 영애와 약혼했다는 소식 들으셨어요?”
파비오 영식? 그게 누구지?
“파비오가 누구야?”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영애들이 까르르 웃었다.
“테레제 님과 파혼했던 영식이요! 벌써 잊으셨어요?”
“이해해요. 아무래도 기억에 남지 않는 인상이기는 하죠.”
그제야 나는 오래된 기억을 뒤져 생트리오 호텔에서 보았던 파비오 영식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아. 새로 약혼했구나.”
관심 없는 인물의 소식에 심드렁하게 반응하고 있으니 클예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테레제 님은 약혼 계획 없으세요?”
“저도 궁금해요! 제국에서 가장 잘생긴 남성분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계시잖아요.”
“심지어 이번에 수도로 올라온 발렌시아 후작님까지도요!”
“요즘 사교계에서는 다들 테레제 님이 누구와 첫 데이트를 하실지 궁금해하고 있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학업에 충실할 계획이라 약혼은 아직 할 생각 없어.”
그러자 영애들이 대번에 실망스러워하는 반응을 쏟아냈다.
“하아아……. 예전이었다면 농담처럼 들렸을 텐데…….”
“이제는 정말 수석까지 되셨으니 농담으로 들리지 않아요.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리신 거예요, 테레제 님.”
누가 들으면 수석이 된 게 탈선이라고 생각될 어조였다.
“제발 발렌시아 후작님이랑 데이트해주시면 안 돼요? 네에?”
“어머? 당연히 데미안 선배랑 데이트해야죠!”
데미안을 거론한 영애가 목소리를 낮추어 은밀하게 이야기했다.
“듣자 하니 그분이 실은 카펜터 공작님의 혼외자식이래요. 곧 가문에 입적될 분위기라고 들었어요.”
그 말에 당혹스러워졌다.
“데미안이 카펜터 공작가에 입적될 것 같다고? 사실이니?”
“대신전 쪽을 통해서 들은 이야기라 확실해요. 거기서 친자를 공증받을 것 같아요.”
띠링!
[성좌 ‘데릴사위 데미안’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헉 그러면 이제 신분 차이도 없으니까 데미안이랑 수월하게 이어질 수 있겠다!!]
‘데미안이 카펜터 공작의 친자로 인정받는 건 배드엔딩 루트인데.’
하지만 내가 본 데미안은 분명 붉은 하트가 4개였다.
어째서 시나리오 진행이 이렇게 꼬인 거지?
던전의 데미안이 현실에 나타나서 설정이 뒤바뀐 건가?
그 사이 영애들은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렇다면 데미안 선배 동생이 세실리아 양이라는 거잖아요! 그건 너무 치명적인 흠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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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가 시누이 되는 건 곤란하긴 하지]
“가족 관계 깔끔하고 집안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번스타인 교수님이 결혼 상대로 가장 적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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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옳은 말]
“다들 왜 황제 폐하는 빼놓으세요? 요즘 사교계에서 차기 황후로 테레제 님이 가장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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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 내가 유지스 지지하기는 하지만, 테레제한테 선뜻 들이밀지는 못하겠네……]
영애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테레제 님은 누가 제일 좋으세요?!”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