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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J악역영애-207화 (208/277)
  • 207화

    * * *

    데미안은 창에 기대어 명백히 사랑에 빠진 눈으로 멀어지는 마차를 응시했다.

    그 안에는 제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죄 없는 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만나고자 했던 아름다운 여자가 타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뺨이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심장은 힘껏 달리고 났을 때보다 벅차게 뛰어댔다.

    아프고 뻐근하고 괴로운 감각이었다. 동시에 황홀하고 달콤했다.

    이 상태로 마차에 함께 탔다면 틀림없이 저질스러운 짓을 벌였을 것이다.

    그건 곤란했다. 미움받을 테니까.

    “부인…….”

    데미안은 어리광부리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녀를 생각하면 초조해졌다.

    마차가 멀어질수록 벌써 그리움이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날 정도였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조그맣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섬찟했다.

    테레제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라울 스콰이어라. 언뜻 부인과 닮은 듯했으나 몹시도 달라 보였던 그 남자가 아버지라고?

    “이상하네.”

    자신이 볼 땐 그저 남 같은데.

    데미안은 눈꺼풀을 느른하게 깜빡거리다가 창밖으로 휙 뛰어내렸다.

    그러자 며칠째 감시자처럼 자신을 노려보는 마법 새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은 자신이 위험한 인물인지 아닌지 가늠하는 듯한 태도였다.

    마법 동물이라니. 자신이 살던 던전 속 세계에는 저런 존재가 없었다. 확실히 여긴 별세계 같았다.

    데미안은 새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이 몸의 원래 주인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야릇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이 몸에 축적된 백마력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것 같네.’

    백마력은 즉각적으로 반응해 상처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겨우 힘을 조절해 멍 하나를 남겨두었다.

    부인은 아픈 자신에게 약했다.

    일부러 팔을 부러뜨려서 보육원으로 저를 찾아오게 했던 그때부터 파악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데미안은 농원을 벗어나 먼 곳으로 느긋하게 이동했다.

    마법 동물들이 관여하지 않는 지점까지 도달했을 때.

    탁!

    근처에 숨어있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데미안의 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스티그마타의 일원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드?”

    남자가 로드라 부른 이는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그 호칭이 당연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전부 수도로 돌아간다.”

    “현재 수도의 경계가 삼엄해져서 움직이기 어려우실 텐데요.”

    현재 발할라는 방학 중이었고 평민 데미안으로는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이 좁았다.

    그래서 테레제를 만나러 오기 전, 시간을 바삐 보내며 조치해둔 바가 있었다.

    데미안은 저와 닮은 듯 다른 카펜터 공작의 역겨운 면상을 떠올리며 차갑게 말했다.

    “그건 해결할 방법이 있다.”

    진짜 문제는 ‘황제’ 그 자체였다.

    “눈알이라도 뽑아버리면 좋을 텐데.”

    로드리고 직계 황족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면 어떤 본질이 보일지 모른다.

    그래서 황제가 농원에 머무는 동안 테레제를 만나러 올 수 없었다.

    테레제와의 시간을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분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었다.

    “황제를 건드렸으니 한동안 귀족들의 경계가 높아질 거다. 마음 인형이나 잔뜩 뿌려놓도록 해.”

    “명을 받듭니다.”

    스티그마타의 일원이 명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데미안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하아. 부인은 대체 어떤 루트로 스티그마타에 대해 그리 잘 알고 있는 걸까.”

    전날 그녀가 스티그마타를 경계하며 쏟아냈던 말들에 놀랐었다.

    심지어 이쪽 데미안이 스티그마타의 일원이라는 사실도 아는 듯했고.

    데미안은 고개를 젖힌 채 눈을 스르륵 떴다.

    파란 하늘을 담은 눈동자의 색은 태양 같은 금빛이 아닌 불길한 빨간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더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존재하던 세상이 악마가 만들어낸 던전이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었을 때처럼.

    분명 그녀가 사는 세상으로 왔는데도 같은 감각을 느끼다니, 기이한 일이었다.

    ‘확실히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데미안은 생각에 잠긴 채 말을 묶어둔 장소까지 걸어갔다.

    그러다 자신을 감시하는 마법 새와 다시 마주쳤다.

    새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적아를 구별하려는 듯이 집요하게 그를 가늠할 뿐이었다.

    “신기하네. 왜 날 저렇게 쳐다보지? 혹시 부인한테 이를 거야?”

    새는 대답이 없었다.

    매끄러운 동작으로 안장에 올라탄 데미안은 고삐를 쥔 채 그대로 멈췄다.

    그의 시선이 재빠르게 자신을 쳐다보는 중인 마법 새에게 가닿았다.

    “……마법 동물은 악마와 천적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들은 분명 마기에 예민하다고 알고 있는데 저 새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백마력 때문인가 했는데 어쩐지 석연찮았다.

    던전에서 1월 31일이 되기 전.

    지금 부인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동안 데미안은 악마와 계약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다.

    데미안은 붉어져 있을 제 눈가를 문질렀다.

    마법 동물이 저를 적대하지 않는다. 하나 계속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계약한 게 악마가 아니었나?”

    * * *

    남부에서 온 발렌시아 후작이 사교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남성이 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파티 중 하나인 샤티 부인의 살롱에 나타난 금발의 미남자, 오즈월드는 단숨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매료시켰다.

    그는 젊고 잘생겼으며 대부호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누구에게든 공평하게 친절했으며 항상 여유가 느껴지는 태도를 고수하여 그야말로 귀족다운 모습을 유지했다.

    귀족들은 발렌시아 후작을 품평할만한 자리가 마련될 때마다 너도나도 비슷한 감상을 꺼냈다.

    “발렌시아 후작님은 모두에게 똑같이 대해요. 그래서인지 사용인들이 특히나 그를 잘 따르더군요.”

    “태도가 무척 부드럽죠. 젊은 남자가 그러기 쉽지 않은데 말이에요.”

    “하지만 이상하게 어렵지 않나요?”

    모두가 마지막 말에 잠깐 침묵하더니 그 이야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비밀스럽게 품고 있던 생각을 쏟아냈다.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군요?”

    “분명 신사적인데 이상하게 그의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저는 그분이 너무 잘생겨서 위축되는 줄 알았잖아요.”

    “하긴. 발렌시아 후작님은 무서울 정도로 잘생기긴 했어요.”

    귀부인들은 금세 농담으로 까르르 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오즈월드를 향해 느꼈던 묘한 느낌이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뚜렷하게 자각했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어느 귀부인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발렌시아 후작님은 훨씬 고귀한 신분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죠. 타고난 위엄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자 동조하는 미소들이 흘렀다.

    그때 함성이 들려와 귀부인들의 시선이 폴로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인 장소로 향했다.

    “또 발렌시아 후작님이 골을 넣었네요.”

    귀부인들은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열심히 폴로 경기에 임하고 있는지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그들이 시선을 돌린 이유는 오직 매끈한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복장으로 맑은 땀방울을 흘리는 오즈월드를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어쩜 저렇게 잘생겼을까.”

    누군가가 차마 삼키지 못하고 툭 꺼낸 진심에 귀부인들은 또다시 까르르 웃었다.

    날이 무척 더웠지만, 눈이 이토록 즐거우니 견딜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발렌시아 후작님이 스콰이어 가문과 친하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귀부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듣자 하니 테레제 양은 발렌시아 후작님에게 초대받아 저택에 놀러갔다던 걸요? 아마 결혼 상대로 고려 중인 게 아닐까요?”

    귀부인들은 테레제의 위상이 전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 아직 겪어본 바가 없었기에 혀를 내둘렀다.

    “발렌시아 후작님은 공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들일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만한 미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그때 조용히 있던 한 귀부인이 끼어들었다.

    “샤티 부인이 공녀에게 무척 호감을 보인다고 이야기 들었어요.”

    샤티 부인은 귀족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황제의 대모라 여겨지고 있었다.

    성질머리 더러운 유지스가 희한하게도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샤티 부인의 말은 조금 귀담아듣기 때문이었다.

    “번스타인 교수도 공녀를 무척 귀애한다던데요? 단순히 제자로만 여기는 것 같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러자 다들 헛웃음 지었다.

    “이러다 공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요?”

    “이미 시작한 것 같기도 해요. 카펜터 공작가에서 소문대로 그 평민 아들을 입적시킨다면 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겠지요.”

    “아. 공녀의 호위 마법사라는 그 잘생긴 학생이요?”

    이쯤 되니 그 어떤 인물보다도 테레제 스콰이어가 궁금해졌다.

    “이번 여름 무도회가 무척 기대되네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가십이 넘쳐나는 사교 시즌이 되리라.

    * * *

    귀부인들이 이번 결혼 시장의 전망을 유추하고 있을 무렵.

    경기를 끝낸 오즈월드는 수건으로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아냈다.

    이른 오전에 시작했음에도 여름이라 그런지 옷이 흠뻑 젖었다.

    덕분에 하얀 모슬린 셔츠가 근육들에 달라붙어 남들 보기 흐뭇한 광경을 만들어 주었다.

    오즈월드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그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키케가 나타나 귓가에 속삭였다.

    “징계 위원회에서 주인님을 소환했다. 바로 응해야 한다.”

    “이유가 뭡니까?”

    “체호프 살해 용의자로 다비드가 지목됐다. 체호프와 동맹 관계였던 채널 관리자들이 배후가 주인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아.”

    오즈월드는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무표정한 얼굴이 평소보다 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곧 가도록 하죠.”

    BJ악역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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