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 * *
스티그마타가 황제를 공격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수도 전역을 뒤덮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스티그마타는 대체 뿌리가 어디인지 좀처럼 찾을 수 없는 기이한 테러 집단이었다.
다들 존재는 알고 있으나 실체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래서 스티그마타가 정말 존재는 하는지 의심하는 자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의심의 화살은 다섯 공작가에 돌아갔다.
유지스가 어린 시절 허수아비 황제였으며 그를 조종해 세상을 지배하려 했던 공작 가문들이 있었단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랬기에 이번 사태를 두고 “스티그마타라는 집단은 허상에 불과하고, 황제와 은원이 남은 누군가가 후환을 없애려 하는 게 아닌가?”라고 의심했다.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누군가’는 십중팔구 스콰이어 가문이었고.
그 때문에 황제가 수도로 돌아온 날, 라울은 테레제의 안위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황실에 불려가야 했다.
이런 상황에 다른 공작들이라고 마음 편히 있을 수는 없었다.
섣불리 활개 치고 다녔다간 의심의 화살이 저들에게 날아올 테니.
그래도 파티는 멈추지 않았다.
이곳, 카펜터 공작가의 후원에 모인 영애들도 수도 근처에 던전이 열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티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던전이 열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황실에서 직접 조치하기도 했고, 돈만 주면 사지로 알아서 기쁘게 들어갈 이들이 수두룩하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진짜 문제는 황제의 기행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하루 동안 테레제 스콰이어 공녀와 함께 계셨대요.”
한 영애가 심각한 어조로 현재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세 가지 화제 중 하나를 입에 올렸다.
영애들은 자연스레 가장 좋은 자리에 고고하게 앉은 세실리아 카펜터를 힐끗거렸다.
저열한 방식으로 리비를 따돌린 정황이 밝혀지며 그녀의 위신이 떨어지긴 했으나, 무슨 일이든 시간이 약이었다.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세실리아가 카펜터 공녀인 이상 결국 권력은 회복된다.
그게 바로 혈통의 힘이었다.
“아아, 황제 폐하께서 새로운 국책 사업 파트너로 테레제 스콰이어 공녀를 지목하셨죠? 그 일 때문인 듯하네요.”
그들의 말이 연이어지자 세실리아는 느지막하게 전혀 몰랐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요즘 마법협회에서 의뢰가 쏟아지는 바람에 너무 바빠서 소식에 뜸했네요.”
티파티에 모인 영애의 대부분은 비마법사였다.
온갖 인재가 모인 수도에서 마법사는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였으나 원래 비마법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으니 당연한 비율이기는 했다.
영애들은 세실리아가 마법협회를 굳이 들먹이며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고 있음을 정확히 파악했다.
“아무렴요. 마법협회는 공녀님 없이 돌아가질 않으니까요.”
“공녀님은 언제나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이바지하느라 바쁘신데 이런 소식은 저희가 챙겨야죠.”
세실리아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실컷 쏟아내며 추켜세우면서도 다들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네가 이 소식을 몰랐을 리 있겠니?’
속내가 어떻든 겉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세실리아는 테레제가 언급되면서 망쳐진 기분이 조금 회복되는 걸 느끼며 염려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그 선배가 과연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발할라 학생이라고 다 같은 엘리트가 아닌데요.”
그때 한 영애가 툭 말했다.
“그런가요? 테레제 님이 이번 학기 수석이라고 하던데요.”
평소에도 혼자만의 열등감에 세실리아와 은근히 신경전을 벌이고는 하던 영애였다.
그녀는 지금 굉장히 신나 있었다.
“그리고 제가 지인의 지인에게 들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농원에 머무시는 내내 테레제 님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네요.”
그 말에 담긴 저의는 명확했다.
‘너 정말 황후 후보 맞니?’
자리에 모인 영애들은 다들 선 넘은 발언이라고는 생각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사태를 관망했다.
그때, 세실리아가 찻물이 가득 든 도자기 주전자를 집어 던졌다.
방향은 제 속을 긁어댄 주제도 모르는 백작가 영애였다.
“꺄악!”
뜨거운 찻물과 함께 주전자에 얻어맞은 영애가 비명을 지르며 볼썽사납게 의자에서 넘어졌다.
세실리아가 혀를 찼다.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도자기를 쥐면 너무 미끄러워서 종종 놓친다니까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동의를 구하는 시선이 영애들을 쭉 훑었다.
영애들은 맞장구치며 세실리아의 비위를 맞추었고, 시녀들이 다가와 엉엉 우는 백작 영애를 데리고 나갔다.
하나 이미 파티는 망쳐졌다.
세실리아는 피곤해서 쉬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한 척하던 얼굴은 저택으로 들어오자마자 악귀처럼 변했다.
“아까 그년도, 아비도 다시는 사교계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알겠습니다.”
세실리아는 화가 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 황실 무도회에서 반드시 테레제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건재함을 증명해야 했다.
황제가 무슨 생각으로 테레제를 가까이하는지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어 성숙해진 저를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 정말 미쳤어요?!”
세실리아는 어머니의 침실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 더러운 평민 애를 내 친자로 받아들이라고요?”
“말 가려서 하시오! 데미안은 내 피가 절반이나 흐르는 아들이오!”
자신의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부모는 사사건건 말다툼을 일삼았다.
요즘은 그 싸움이 좀 더 심해졌을 뿐.
대부분 데미안을 가문에 입적시키자는 문제에서 비롯된 갈등이었다.
“약혼 중에 딴살림 차려서 낳은 자식을 품으라니. 당장 파혼하려던 걸 당신이 애걸복걸해서 참았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요!”
“그래서 나는 자식과 생이별해야만 했소! 데미안은 일리야 번스타인의 아성에 버금가는 유망주요. 가뜩이나 가문에 인재가 부족한데, 그토록 훌륭한 마법사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놓친다는 게 말이 되오?”
“세실리아가 마법협회의 주축인 마법사인데, 그깟 평민이 뭐가 대수란 거예요?”
“그야 돈으로 매수했으니까!”
세실리아는 치욕스러움에 이를 빠드득 갈았다.
“세실리아는 그래봤자 고작 발할라 1학년생이오. 재능? 있지. 데미안만큼은 아니지만!”
“당신 정말…….”
“가문을 위해 당신 하나만 참으면 되는데, 그게 그리 어렵단 말이오?! 이기적인 여자 같으니!”
세실리아는 거기까지만 듣고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차라리 둘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아가씨, 의상실에서 드레스 가봉 때문에……”
세실리아는 다가온 시녀의 뺨을 때렸다.
“주인의 기분도 살필 줄 모르고 네 일만 하려는 게 무슨 시녀라고. 지금 내가 드레스 가봉을 확인할 기분으로 보이니?”
“……죄송합니다, 아가씨.”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꼴도 보기 싫으니 썩 꺼져!”
세실리아는 애꿎은 물건을 집어 던지며 분풀이했다.
‘내가 가주가 되면 데미안 그 인간부터 죽여버릴 거야!’
아니. 사실 가장 죽여버리고 싶은 건 스콰이어 자매였다.
그들은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그것들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인생은 걸림돌 하나 없이 순탄했을 텐데.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건 아니지만 카펜터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로서 모든 걸 누리며 살았다.
한데 발할라에서 망신당한 이후 아버지가 묘하게 차가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노망이라도 든 건지, 요즘 들어 데미안을 친자로 들이자는 헛소리를 줄기차게 내뱉고 있었다.
‘데미안을 후계자로 올리고 난 적당한 곳에 팔아치우려는 게 틀림없어.’
세실리아는 유력한 황후 후보인 척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결혼 적령기가 끝나기 전까지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며 이 위치를 즐길 생각이었다.
하나 모든 게 틀어졌다.
세상이 제게만 너무나 가혹했다.
“내가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니잖아.”
그냥 제게 주어진 것을 온전히 쥐고서 사랑받고 인정받으며 살고 싶었다.
“나도 스콰이어 공작님 같은 아버지만 있었어도…….”
결국 숨겨지지 않은 질투와 열등감이 흘러나왔다.
취한 딸을 업고 가던 그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윌로우 공작과 대거리하던 모습도, 마법협회장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던 모습도.
그리고 그런 든든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던 테레제의 모습까지도.
전부 제게 주어졌어야 할 완벽한 그림이었다.
나는 고귀한 공녀인데 어째서 부모란 작자들은 저리도 모자라고 한심스러울까?
아랫것들 보기도 부끄럽지 않은지 허구한 날 싸우고 있고.
그러니 사교계에까지 소문이 난 게 아닌가.
요즘 사교계를 달구는 세 가지 소문 중 하나는 황제와 테레제의 사이에 관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오즈월드 발렌시아 후작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제 아비의 사생아에 대한 소문이었다.
수치스러워서 살 수가 없었다.
세실리아는 침대에 파묻혀 한참 울다가 베개 아래에서 나무 인형 하나를 꺼냈다.
영애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마음 인형이었다.
고작 나무로 만들어진 유치한 인형 주제에 꼭 끌어안고 있으면 실제로 자신을 좀먹던 생각들이 조금 걷혔다.
그 감각은 꽤 중독적이어서 자꾸만 인형에 의지하게 되었다.
세실리아는 인형을 끌어안은 채 훌쩍거리며 악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나무 인형의 새까만 눈알이 붉게 물들었다.
* * *
최근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아마 황폐해진 마음이 어두운 꿈들을 보여준 거겠지.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꿈에 남색 털을 가진 고양이가 나온 것이다.
고양이의 두 눈동자는 너무나도 예쁜 황금색이었다.
야옹.
고양이가 내게 다가와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아윽. 심장 아파.’
나는 나약한 인간답게 감히 애교부리는 고양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신줏단지처럼 품에 안아 들었다.
고양이가 뺨에 뽀뽀했다. 폭력적인 귀여움에 어지러워졌다.
이번에는 입술에 뽀뽀했다. 역시 너무 귀여워서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이 고양이, 묘하게 누구를 떠올리게 하는데…….’
어쩐지 낯이 익은 고양이가 조금 성가실 정도로 얼굴에 자꾸만 뽀뽀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고양이가 원래 뽀뽀도 하나?’
문득 현실과의 괴리를 느낀 순간, 고양이가 거대해지더니 돌연 호랑이가 되었다.
우아하고 매끈한 남색의 호랑이가 내 위에서 잡아먹을 듯이 아가리를 벌렸다.
어흥.
나를 놀리듯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눈이 반짝 떠졌고, 막 입술을 겹치고 있던 데미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띠링!
[성좌 ‘도파민중독’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엔도르핀, 세로토닌, 옥시토신, 도파민 let’s go]
데미안이 맞붙은 입술을 쪽 소리 나게 떨어뜨리며 말갛게 웃었다.
“잘 잤어요, 부인?”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