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27. 잃어버렸던 것
황제가 농원을 떠나고, 나는 총관리자인 체드를 불러 황실에 우리 농원의 마법 식물을 납품하기로 한 사실을 알렸다.
“정확한 내용은 조율해봐야겠지만, 우선 납품할만한 품목을 선정해서 샘플부터 보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공녀님.”
샘플을 보낼 때 나도 같이 입궁해서 스콰이어 비전 마법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당장 목록을 추려서 말해줘. 더 아름다운 형태로 배양할 수 있는 식물이 있는지도 확인해주고.”
“예!”
그 밖에도 농원 운영 시스템을 확인하고 부족하거나 오류가 있는 부분을 수정하느라 하루가 빠듯했다.
황실에 납품할 식물 확인, 새로운 식물 배양 연구, 보고서 확인, 주변 농가 안전 확인 등.
쏟아지는 일거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때, 체드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다 주었다.
“공녀님, 좀 드시면서 일하십시오.”
“아, 고마워.”
나는 직원 식당에서 만들었다는 고기 샌드위치의 맛이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허겁지겁 먹어 치우고 서류를 정리했다.
그러고 나니 벌써 하늘이 새파랗게 질린 저녁 시간이었다.
직원들도 퇴근해야 하니 개인 연구실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일리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의아하기는 했지만 뭔가 일이 생긴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개운하게 씻은 후 옷을 갈아입었다.
“해가 떨어져도 덥네.”
날이 저물었다 한들 7월의 밤이 서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일리야랑 같이 있을 때는 서늘하고 좋았는데. 아마 마법으로 기온을 조절해준 거겠지.’
“그럼 나도 할 수 있지 않나?”
나는 다소 건방진 생각으로 내부 온도를 떨어뜨리는 마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장 한계에 부딪혔다.
“음. 이 방식은 안 되겠어.”
좀 더 머리를 써보자. 어떻게 하면 적은 마력으로 큰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에어컨 수준의 시원함이 아니더라도 선풍기 정도의…….
“그렇다면 천장에 프로펠러를 달면 되지 않나? 공기 순환 장치를 통해 내부 온도를 떨어뜨리는 건 훨씬 간단하니까.”
나는 빈 종이에 기억나는 대로 실링팬을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 파티 시즌이기도 하니까 집에 설치해두면 손님들도 좋아하겠지.’
집중해서 프로펠러를 작동시킬 술식을 만들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일리야인가? 아니면 혹시 점성술사?’
“누구세요?”
달칵.
의아하게 문을 열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보였다.
“……데미안?”
한밤중에 나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데미안이었다.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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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못 본 사이에 더 섹시해졌구나ㅠㅠ]
오랜만에 본 데미안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맨얼굴, 몸에 달라붙는 새까만 옷과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는 금속 장식 등.
그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날카롭고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고…… 아니,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어?”
데미안은 뜨겁게 침묵하다가 울컥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부인.”
그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신체 기능마저 멈춰버려서 심장도 멎어버린 기분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성좌들은 나보다 한발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였는지 폭발적인 후원을 보내왔다.
하나 나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데미안이 날 부인이라고 부른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라 좀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데미안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와락 끌어안았다.
감정이 들끓어 힘을 주체하지 못한 모양인지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쳐야 할 정도로 그는 몹시 고양되어 있었다.
“보고 싶었어요, 부인.”
데미안이 몸을 미세하게 떨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울 것처럼 말해왔다.
그립고 사랑스러운 감각이었다.
이는 내가 아는 데미안이다.
나를 사랑하는, 그리고 내가 잃어버렸던 데미안.
온 육신에 전율이 끼쳤다.
“데미안…? 정말로 데미안 너야?”
믿을 수 없다는 듯 묻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시야는 뿌옇게 물들어 별빛과 농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고흐의 그림처럼 빙글빙글 뒤섞였다.
내 머리 위에서 데미안의 고개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네, 저예요. 당신의 보육원생 데미안.”
나처럼 그도 울고 있었다.
띠링!
[성좌 ‘금쪽같은 내 새끼 데미안’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던미안 개같이 부활!!!!!!!!]
띠링!
[성좌 ‘데릴사위 데미안’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난 돌아올 줄 알았어T_T 데미안 믿고 있었다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그가 살아났다. 내게 돌아왔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외면하고 있던 슬픔과 두려움이 녹아내렸다.
기적을 목격한 경이로움만이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울부짖었는지, 아니면 다정한 말을 쏟아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이 해후가 꿈일까 봐 떨었던 것도 같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도 못하고 상대의 숨을, 온기를 확인했다.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어요.”
그건 데미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죽어버릴 사람처럼 나를 안고서 온 얼굴에 키스했다.
“보고 싶었어요, 부인. 정말로 미치도록 보고 싶었어요.”
우리는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마주 웃었다.
던전에서의 마지막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눈물로 재회했다.
세상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쌓인 아픔이 전부 눈물로 흘러나와 마음에 오직 기쁨만이 남게 되었을 때, 간신히 진정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차분해지니 한 가지 의문이 고개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던전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난 거야?”
말을 꺼내니 또 다른 의문점이 생겨났다.
“그리고…… 혹시 이곳의 데미안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그가 사라지고 던전의 데미안이 나타난 거라면 어떡하지.
띠링!
[성좌 ‘막드매니아’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맞네… 원래 데미안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인클이랑 악클은 자아를 따로 구분했었는데, 던미안이랑 데미안은 자아가 합쳐진 건가?]
내 불안을 읽은 듯 데미안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토라진 얼굴이었다.
“모르겠어요. 사실 기억이 뒤섞인 상태라서 지금 좀 혼란스러워요.”
“기억이 뒤섞여?”
“네. 이 몸은 그 ‘데미안’의 것이니까요. 이제는 동일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까 이 세계의 데미안이 존재한다는 거지?”
창작물에서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기억이 공존하고 있다는 거지? 동기화된 거겠지?
데미안이 다소 차갑게 대답했다.
“글쎄요. 눈을 떠보니 고문당하는 중이기는 했어요. 죽었다가 제가 깨어나며 이 육체가 다시금 살아난 걸지도 모르죠.”
“……뭐? 고문이라니?”
설마 로드 콘스탄틴의 짓인가?
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본 데미안이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홧김에 괜한 말을 내뱉었다는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고문까지는 아니었어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너 언제 기억이 돌아온 건데?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진정해요, 부인.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고, 제가 다 정리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그렇다기엔 데미안이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고문당했다며! 다쳤는데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스티그마타는 배신을 용서하지 않아. 죽일 때까지 널 쫓을 거라고!”
“……그래요?”
그때 복부에 손이 스치자 데미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음.”
신음까지 흘리다니, 상처가 있는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역시 다쳤지? 어디 봐봐.”
나는 당장 옷자락을 걷어 올렸고 복부에 시퍼런 멍이 든 것을 발견했다.
“이게 대체……. 멍만 든 거야? 내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뼈는? 뼈는 어때?”
혹시 다른 곳도 다쳤는데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여기 의료용 마법 식물도 많이 있으니까 응급 처치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때 데미안이 끙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부인…….”
“왜? 이 부분은 멍이 없는데 혹시 아파? 설마 다른 문제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여름 볕을 쬔 듯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데미안을 발견했다.
어쩐지 숨도 거칠어져 있었다.
그가 곤란해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간지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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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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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져! 책임져! 책임져! 책임져!]
“……아.”
그런 문제가 아니었구나.
당혹스러운 마음에 얼른 그의 복부를 더듬던 손을 떼어내려는데, 커다란 손에 붙들렸다.
데미안은 심장께를 문지르게 했다.
“저 여기도 아파요, 부인. 이쪽도 봐주세요.”
“자, 잠깐만.”
계속 손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쪽도 아픈데……. 그리고 여기도 아프고.”
“하나도 안 아프면서 거짓말할래?!”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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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거짓말]
내가 그만 놀리라는 뜻으로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데미안이 손을 놓아주며 배시시 웃었다.
“부인 손이 닿으니까 이제 괜찮아졌어요.”
……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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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행복은 다 가짜였어… 이게 ‘진짜 행복’이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