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띠링!
[성좌 ‘개복치 황제 유지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하는 짓만 보면 신하들이 유복치가 빨리 죽어버렸으면 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보호하려고 하지?]
띠링!
[성좌 ‘지나가던 성좌’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이런 시대에서는 족보가 중요하다 보니 당연한 거 아닌가? 황가의 피가 흐르지 않은 사람을 황제로 세울 수가 없잖아]
유지스는 제 뜻을 꺾지 못해 결국 호위대를 꾸려 쫓아오는 신하들을 보더니 내게 물었다.
“공녀는 저들이 왜 저렇게 짐을 황궁에 가두지 못해 안달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야 세상에서 가장 귀하신 분이니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내 정석적인 대답에 유지스가 픽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짐이 죽으면 로드리고 가문의 직계 혈통이 끊기게 생겼으니.”
로드리고 황가의 핏줄은 보랏빛 눈동자를 타고나며, 색이 짙을수록 강력한 신의 은총을 받은 자라고 해석되었다.
그리고 유지스는 역대 황제 중 제일 선명한 보라색 눈이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유지스는 신의 아들이라 불리기도 했다.
감당 못할 난폭함 때문에 그런 성스러운 칭호로 유지스를 지칭하는 이들이 대폭 줄어들기는 했지만.
“공녀가 보기에도 짐이 신의 아들 같은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네.”
“순진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술술 잘하는군.”
유지스는 비아냥대면서도 더 심술궂게 굴지는 않았다.
드물게도 기분이 좋은 날인지 한가로운 걸음으로 농원을 둘러보았다.
“농원에 와보길 잘했구나.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오늘은 두통도 없이 개운하게 일어나지더군.”
‘아침부터 독한 위스키에 줄담배를 피운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다니 다행이었다.
내가 살면서 본 사람 중 유지스만큼 기분이 태도가 되는 이도 없었으니.
유지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비슷한 풍경에 질린다는 듯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래서 연구실로 데려가 각종 우수한 효능이 있는 작물을 보여 주었다.
유지스는 나무껍질을 손에서 굴리며 확인해봤다.
“이게 항염증 효과가 있는 나무껍질이라고?”
“네. 진정 효과도 뛰어나서 불면증에도 좋습니다.”
불면증을 개선할 수 있다는 말에도 유지스는 영 심드렁해했다.
“생긴 게 재미없군. 효능이 최고로 좋은데 외양도 더 그럴싸한 건 없나? 예쁘게 생긴 꽃 같은 거 말이야.”
“관상용으로 좋은 약초꽃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럼 그것들로 몇 종류 추려서 황실로 보내. 제프리에게 일러둘 테니 앞으로 황실에서 사용하는 마법 식물은 공녀의 농원에서 재배하는 것으로 쓰겠다.”
띠링!
[퀘스트: 마법 농원에서 희귀 작물 10종 이상 키우기 완료]
▸보상: +5,000,000코인, 황실 납품 권한 획득
‘희귀 작물로 분류되는 것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재배하지도 않았는데 완료 판정을 주는구나.’
아마 유지스가 황실에 납품하라고 말한 게 주효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게 많은데도 그토록 큰 권한을 주셔서 황공합니다, 폐하.”
나는 예를 갖추어 감사를 표한 뒤 눈짓으로 주변인들을 물렸다.
그동안 유지스는 마법 식물에 맺힌 열매를 하나 따서 위로 던졌다 받는 손장난을 쳤다.
“짐에게 할 말이라도 있나?”
“네. 폐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유지스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다.
“마법 식물 납품 권한 대신 스콰이어 나비에 대해 아는 것이 있다면 사실대로 알려주십시오.”
탁.
유지스는 열매를 잡아채더니 더는 던지지 않았다.
“이상한 말을 하는군. 짐이 스콰이어 나비를 어찌 알겠느냐?”
예상대로 유지스는 순순히 자신이 아는 사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다지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패를 꺼냈다.
“폐하의 손을 치료한 사람은 접니다.”
띠링!
[성좌 ‘개복치 황제 유지스’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헉 아까 거짓말한 거냐고 유복치 또 눈깔 돌 텐데 그래도 돼?]
내가 실토하자 유지스의 손아귀에 담긴 열매가 으깨지며 과즙이 사방으로 튀었다.
붉은색 과즙이 황제의 흰 장갑을 물들이는 광경은 제법 오싹했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역시 공녀였지?”
형편없이 망가진 열매가 바닥에 툭 떨어지며 시큼한 향이 밴 손이 내 턱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처음부터 틀림없이 공녀일 거라 생각했지. 짐은 이런 쪽으로 감이 좋거든.”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심장은 아까부터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하나 그뿐이었다.
“폐하께서 그날의 기억을 잊으라고 에둘러서 표현하신 건 줄 알았습니다.”
귀족 특유의 성가신 화법인 줄 알았다는 내 말에 유지스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짐이 공녀의 입이 무거운지 아닌지 시험해보는 줄 알았다고? 공녀는 순진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술술 잘도 내뱉는구나.”
턱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나는 황제의 겁박에도 의젓한 태도를 유지했다.
“저는 폐하께서 잊으라 하면 잊고 기억하라 하면 기억할 뿐입니다.”
“참으로 충성스럽군. 누가 보면 짐에게 영원을 맹세한 기사라 생각될 정도로. 언제부터 스콰이어 가문이 짐에게 그리도 애틋했지?”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조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콰이어 가문은 윌로우만큼 로드리고 황가와도 사이가 나빴다.
유지스는 섭정 배후에 스콰이어 가문이 있다고 생각했고 반 정도는 진실이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말은 다 개소리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애틋해지려고요.”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유지스를 위해주고, 편들어주고, 기분을 맞춰주는 일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내 대답에 상대 쪽에서 어금니가 으드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을 기만하는 나를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 걸까?
절로 가슴이 선뜩해지는 반응이었으나 심정을 표출하진 않았다.
말로서 얻을 것이 있는 싸움에서는 흥분하는 쪽이 진다. 보편적으로 통하는 법칙이었다.
‘어떻게든 반드시 스콰이어 나비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야겠어.’
검은 나비가 스콰이어 나비인지는 모르겠으나 불확실한 실마리라도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유지스는 턱을 붙든 손을 떨어뜨리더니, 권태로워진 얼굴로 젖은 장갑을 바닥에 툭 벗어던졌다.
“짐의 기억에는 없는 그 날, 공녀에게 스콰이어 나비 이야기를 꺼냈다는 뜻인가?”
양보와 합의, 협력 같은 개념은 개나 줘버린 유지스가 한발 물러나 대화할 의지를 보였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띠링!
[성좌 ‘마음으로 낳은 테레제’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하ㅠㅠ 저 새끼가 혹시라도 우리 애 때릴까 봐 개쫄았네]
나는 속으로 반색했으나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말했다.
“네. 스콰이어 나비는 사역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유지스가 혀를 찼다.
“하, 그날 짐의 기분이 아주 좋았던 모양이지?”
“기분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좋은지 이유도 알고?”
“…….”
내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유지스가 피식 웃었다.
“짐이 말해주었나 보군. 침실을 기어들어 온 것보다 그게 더 놀라운데.”
그때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지스는 짜증으로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뭐지?”
베인 시종장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폐하, 수도에서 군대와 함께 속히 환궁하시어 옥체를 보존하여 주시라는 귀족들의 청원서가 도착하였습니다.”
‘군대라고?’
그 말에 창밖을 내려다보자 무장한 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유지스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짐이 수도를 벗어나면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나는 줄 아는가 보군.”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신의 아들인 황제를 인간 토템쯤으로 여기는 기조가 있기는 했다.
그러니 국사에 그토록 무관심하고 폭력적이고 개짓거리를 일삼아도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지만.
귀족들의 환궁 요청은 유지스만큼이나 나도 달갑지 않았다.
‘하필 이 중요한 타이밍에.’
그때 유지스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황궁으로 오면 스콰이어 가문의 비전 마법서를 공녀에게만 비밀리에 보여주겠다. 그러니 직접 보고 알아봐.”
“…!”
진짜로 마법서를 갖고 있구나!
“다만 이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온갖 반역죄를 물어 스콰이어 가문을 세상에서 없애버릴 것이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절대 비밀로 하겠다고 맹세했다.
“참.”
유지스는 수도로 돌아가기 전에 덧붙여 말했다.
“아까 이야기했던 대로 이 농원에서 재배하는 작물을 추려 황실로 보내거라. 짐은 이깟 시시한 권한을 줬다가 뺏는 짓은 하지 않아.”
그러면 나야 좋은 일이었다.
황실에 마법 식물을 납품하면 엄청난 돈을 벌 테니까.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예를 갖추었다.
“황공합니다, 폐하.”
유지스는 질 나쁜 미소를 띤 얼굴로 다시금 강조했다.
“예쁜 것으로 보내거라. 짐의 궁에도 잘 어울릴, 아주아주 예쁜 것으로.”
만일 성에 차지 않는다면 각오하라는 투였다.
띠링!
[성좌 ‘티 없이 맑은 아이’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알았어! 테레제 보낼게!]
그렇게 유지스는 군대와 함께 황궁으로 떠났다.
BJ악역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