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 * *
쿵쿵쿵.
까맣게 점멸된 의식을 뚫고 거슬리는 소음이 침입했다.
나는 노곤함에 미간을 찡그리며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쿵쿵쿵.
아, 제발. 어제 너무 늦게 잠들었단 말이야, 엘로이즈.
……잠깐만.
‘지금 나 스콰이어 공작저가 아니라 농원의 개인 연구실에 있지 않나?’
쿵쿵쿵.
또다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 나를 토닥여주던 일리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마음대로 돌아다녔다가 황실 사람에게 모습을 들키면 곤란한데.
띠링!
[성좌 ‘일리테레 아니면 죽음’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일리야는 너 잠드는 거 보고 밖으로 나갔어]
‘그렇구나. ……그나저나 지금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누구지?’
비척비척 일어나 시계를 보니 오전 8시였다.
나는 의문의 방문객을 맞이하기 위해 침실을 나와 연구실 내부를 가로질렀다.
쿵쿵쿵!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노크 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누구세요?”
상대의 정체를 물으니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늙은이에게 물 한 잔만 주시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른 문을 열었다.
노크한 사람은 이곳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보랏빛 면사포를 쓴 흰 머리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황금으로 된 장신구를 주렁주렁 걸치고 있었으며 한 손에는 수정 구슬을 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점성술사의 모습이었다.
‘벌써 이 캐릭터가 등장할 때가 되었나?’
[성좌들이 의문의 노인에 대해 궁금증을 드러냅니다.]
“들어오세요.”
“친절한 아가씨로구먼.”
점성술사는 제집처럼 연구실을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차도 있는데 드실래요?”
“그냥 시원한 물 한 잔이면 되오.”
나는 컵에 물을 가득 따라서 건네주었다.
“고맙소. 내 보답으로 점을 봐주리다.”
점성술사는 플레이어가 어떤 엔딩을 맞이할지 힌트를 주는 캐릭터였다.
“이름이 무엇이오?”
“테레제 스콰이어예요.”
우웅-!
점성술사가 손에 든 수정 구슬에 신묘한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수정 구슬을 유심히 관찰했다.
‘게임에 있는 설정이기는 하지만, 저건 마법과는 다른 힘인데 대체 무슨 원리로 이루어져 있을까? 원리를 알면 나도 사용할 수 있나?’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나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힘에 어떤 개연성이 적용되었을지, 궁금해하고 있을 무렵.
“흠. 희한하군.”
점성술사가 미간을 슬쩍 좁혔다.
나는 이 점성술이 엔딩을 알려주는 중요한 힌트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표정을 굳혔다.
“결과가 나왔나요?”
“나왔소. 아가씨에게는 가장 존귀하고 가장 비천한 명운이 동시에 존재하는구려. 이렇게 상반된 운명은 공존하기 어려운 법인데.”
띠링!
[성좌 ‘설명충’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ㅁㅊ 이거 게임 중간 점검이네]
“안 좋은 건가요?”
내 질문에 점성술사가 수정 구슬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고 나쁜 문제는 아니라오. 어느 쪽으로 가든 길이 있을 테니.”
‘그래서 내가 어떤 엔딩을 맞이한다는 거지?’
남자주인공의 호감도 상태에 따라 가장 유력한 후보를 알려주어야 하는데 점성술사는 이상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나는 대놓고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누구랑 결혼할 것 같나요?”
“결혼이라…….”
점성술사는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더니 턱을 매만졌다.
“조만간 하겠구먼.”
띠링!
[성좌 ‘미식가’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누구냐?! 어서 와라! 아무나 다 먹어주마!]
그 순간 수정 구슬의 빛이 툭 꺼졌다.
“늙은이는 이만 가봐야겠소.”
나는 떠나려는 점성술사를 가로막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잠깐만요! 제가 누구랑 결혼하는지는 모르세요?”
“수정 구슬의 힘이 떨어져서 그것까지는 모르오. 조만간 결혼하는 거라면 좋아하는 상대가 있는 거 아니오?”
“전혀 없어요. 혹시 결과에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요?”
“큰일 날 소리. 이는 신께서 내게 허락한 특별한 힘이오.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나는 울적한 얼굴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점성술사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나를 돌아보았다.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조금 놀랐을 때.
“잃어버린 것은 되찾게 될 겁니다.”
점성술사는 그 말만 남기고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밖을 살폈으나 점성술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잃어버린 걸 되찾는다고?”
그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있었다.
“설마, 클라이드?”
[‘클라이드’ 루트를 지지하는 성좌들이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하지만 어떻게 되찾는단 거지?’
클라이드는 시공간의 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는데.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우두커니 서 있다가 서둘러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자칫 꾸물거리다간 유지스를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내로 희귀 작물 10종 퀘스트를 완료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체 난 누구랑 결혼한다는 거야?”
게다가 일리야는 어딜 갔길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어디를 돌아다니든 그의 자유지만, 이왕이면 내가 덜 골치 아프도록 얌전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집을 나섰다.
“헥헥헥!”
그러자 현관 앞에서 엎드려 있던 늑대가 신나게 다가왔다.
“잘 잤어? 별일은 없었고?”
별일 없었다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기대를 벗어났다.
“방금 또 던전이 생겨났다고?”
심지어 위치는 황제의 별장과 가까운 곳이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띠링!
[성좌 ‘프로훈수러’ 님이 1,000,000코인 후원하셨습니다.]
[스티그마타는 못 없애는 건가? 가만히 뒀다가는 진짜 사고에 휘말리게 생겼는데?]
없앨 수 있었다.
‘데미안의 호감도가 꽉 차면.’
나는 쏜살같이 달려 황제의 별장으로 향했다.
그곳은 난리 난 상태였다.
“통촉하여주십시오, 폐하!”
“통촉하여주십시오, 폐하!”
‘또 던전이 생성됐는데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건가.’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는지 베인 시종장이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오셨군요, 공녀님. 지금 폐하께서는 침실에서 나오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렇군요…….”
“혹시 공녀님께서 폐하를 설득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제가요?”
어째서 내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하는 거지?
‘이 시종장, 감 떨어졌나?’
내가 기겁하는 반응을 보이자 베인은 왜 그러는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공녀님이 도착하면 침실로 들여보내라 하셨습니다.”
“……네에.”
나는 치과에 끌려가는 아이처럼 서러운 표정으로 베인 시종장과 함께 황제의 침실까지 다가갔다.
똑똑.
“폐하, 스콰이어 공녀가 도착하였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들라 하라.”
베인은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며 친절히 문을 열어주었다.
침실 안은 술과 담배 냄새로 가득해, 당장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는 말끔히 제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더니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태어나서 그런 꼴을 한 귀족 영애는 처음 보는군.”
나는 그의 시비에 굴하지 않고 예를 갖추었다. 그러자 유지스는 성가시단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이 사달에 인사받는 것도 귀찮으니까.”
침실 문을 굳게 닫아두고 있었으나 목이 터져라 “통촉하여주십시오, 폐하!”라며 신하들이 울부짖으니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인 유지스가 용케도 전부 죽이지 않고 잘 인내하고 있었다.
‘술병이랑 재떨이를 보면 아주 잘 참은 건 아닌 거 같긴 하지만.’
유지스는 담배를 비벼끄며 물었다.
“공녀도 짐에게 위험하니 황궁으로 돌아가라고 할 건가?”
“그런 부탁을 받기는 했습니다.”
내 솔직한 대답에 유지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부탁한 사람은 베인이겠군. 그 영감이 어쩐 일로 안 하던 짓을 하는지…… 쯧.”
유지스는 순식간에 언짢아진 얼굴로 유리잔을 꽉 쥐었다.
저러다 깨질라.
“상황이 위험한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지켜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유지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온통 가정이군. 진짜 위험한 건지, 정녕 짐을 지킬 수 있는지 확실히 말해.”
나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그가 원하는 대로 말을 정정했다.
“위험한 상황이지만 제가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웃긴 말이었다.
‘본인이 나보다 훨씬 강하면서.’
유지스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나를 비웃었다.
“아직 마법 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학생이 짐을 지켜줄 수 있겠나? 새로운 방식의 음해 같은데.”
하나 현재 중요한 건 황제가 지닌 일신의 무력이 아닌 신하를 설득할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였다.
바깥의 저들은 어제 마법 동물들의 대행렬을 목격한 이들이었다.
지금도 바깥에는 정찰을 위해 마법 새들이 날아다니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애당초 던전이 이곳에 생기지 않고 조금 벗어난 것도 동물들이 막아낸 결과인 듯하고.’
나는 신하들의 말을 들어주기 싫어서 고집 피우는 유지스에게 제안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마수는 제 상대가 아닌 데다가 마법 동물들은 제게 우호적입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제 곁을 떠나지만 않으신다면, 함께 농원을 둘러보는 정도는 안전하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집에 갈래, 순순히 나랑 농원 둘러볼래?
유지스가 손에 든 유리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행색뿐만 아니라 언행도 참 파격적이야. 공녀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우리가 함께 침실을 나오자 일대에 침묵이 감돌았다.
유지스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스콰이어 공녀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짐을 지켜줄 터이니, 안심하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한 국책 사업을 확인하라더군. 이의 있나?”
신하들도 이게 유지스가 보일 수 있는 최대치의 양보라는 사실을 인지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께서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이토록 깊으신데 소신들이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생각하기는 개뿔.
유지스는 제국이 쑥대밭이 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대들이 짐의 마음을 헤아려줄 줄 알았네. 그럼 짐은 이만 공녀와 함께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러 떠나겠네.”
유지스는 별장을 나오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머저리들 같으니.”
욕도 시원하게 내뱉어주었고.
그는 신하들이 뒤편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못내 통쾌한 듯했다.
BJ악역영애